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名詩 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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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 - 조병화 봄비 /조병화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아 온종일 책상에 앉아, 창 밖으로 멀리 비 내리는 바다만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노라면 문득, 거기 떠오르는 당신 생각 희미해져 가는 얼굴 그래, 그동안 안녕하셨나요 실로 먼 옛날 같기만 합니다 전설의 시대 같은 까마득한 먼 시간들 멀리 사라져 가기만 하는 시간들 돌아올 수 없는 시간들 그 속에, 당신과 나, 두 점 날이 갈수록 작아져만 갑니다 이런 아픔, 저런 아픔 아픔 속에서도 거듭 아픔 만났다가 헤어진다는 거 이 세상에 왜, 왔는지? 큰 벌을 받고 있는 거지요 꿈이 있어도 꿈대로 살 수 없는 엇갈리는 이 이승 작은 행복이 있어도 오래 간직할 수 없는 무상한 이 이승의 세계 둥우리를 틀 수 없는 자리 실로 어디로 가는 건가 오늘따라 멍하니 창 밖으로 비 내리는 바다..
겨울꽃 고드름 - 양광모 겨울꽃 고드름 양광모 거꾸로 매달려 키우는 저것이 꿈이건 사랑이건 한 번은 땅에 닿아보겠다는 뜨거운 몸짓인데 물도 뜻을 품으면 날이 선다는 것 때로는 추락이 비상이라는 것 누군가의 땅이 누군가에게는 하늘이라는 것 겨울에 태어나야 눈부신 생명도 있다는 것 거꾸로 피어나는 저것이 겨울꽃이라는 것
가난한 이름에게 - 김남조 가난한 이름에게 김남조 이 넓은 세상에서 한사람도 고독한 남자를 만나지 못해 나 쓰일모 없이 살다 갑니다. 이 넓은 세상에서 한 사람도 고독한 여인을 만나지 못해 당신도 쓰일모 없이 살다 갑니까 검은 벽의 검은 꽃 그림자 같은 어두운 향료 고독 때문에 노상 술을 마시는 고독한 남자들과 이가 시린 한겨울 밤 고독때문에 한껏 사랑을 생각하는 고독한 여인네와 이렇게들 모여 사는 멋진 세상에서 얼굴을 가리고 고독이 아쉬운 내가 돌아갑니다. 불신과 가난 그중 특별하기론 역시 고독때문에 어딘지를 서성이는 고독한 남자들과 허무와 이별 그중 특별하기론 역시 고독때문에 때로 골똘히 죽음을 생각하는 고독한 여인네와 이렇게들 모여 사는 멋진 세상에서 머리를 수그리고 당신도 고독이 아쉬운채 돌아갑니까 인간이라는 가난한 이름에..
상자속에 숨기고 싶은 그리움 -한용운 상자 속에 숨기고 싶은 그리움 한용운 그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은 어느 햇살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내 안에서만 머물게 하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바람 같은 자유와 동심 같은 호기심을 빼앗고 싶은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내게만 그리움을 주고 내게만 꿈을 키우고 내 눈 속에만 담고픈 어느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은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내 눈을 슬프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 마음을 작게 만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만을 담기에도 벅찬 욕심 많은 내가 있습니다.
가을에 - 서정주 가을에 서정주 오게 아직도 오히려 사랑할 줄 아는 이 쫓겨나는 마당귀마다, 푸르고도 여린 문(門)들이 열릴 때는 지금일세 오게 저속(低俗)에 항거(抗拒)하기에 여울지는 자네 그 소슬한 시름의 주름살들을 그대로 데리고 기러기 앞서서 떠나가야 할 섧게도 빛나는 외로운 안행(雁行)- 이마와 가슴으로 걸어야 하는 가을 안행(雁行)이 비롯해야 할 때는 지금일세 작년에 피었던 우리 마지막 꽃- 국화(菊花)꽃이 있던 자리, 올해 또 새 것이 자넬 달래 일어나려고 백로(白露)는 상강(霜降)으로 우릴 내리 모네 오게 지금은 가다듬어진 구름 헤매고 뒹굴다가 가다듬어진 구름은 이제는 양귀비(楊貴妃)의 피비린내나는 사연으로는 우릴 가로막지 않고, 휘영청한 개벽(開闢)은 또 한번 뒷문(門)으로부터 우릴 다지려 아침마다 그 서리..
그리운 등불하나 - 이해인 그리운 등불하나 이해인 내가슴 깊은 곳에 그리운 등불 하나 켜 놓겠습니다. 사랑하는 그대 언제든지 내가 그립걸랑 그 등불 향해 오십시오. 오늘처럼 하늘빛 따라 슬픔이 몰려오는 날 그대 내게로 오십시오. 나 그대 위해 기쁨이 되어 드리겠습니다. 삶에 지쳐 어깨가 무겁게 느껴지는 날 그대 내게로 오십시오. 나 그대 위해 빈 의자가 되어 드리겠습니다. 가슴이 허전해 함께 할 친구가 필요한 날 그대 내게로 오십시오. 나 그대의 좋은 친구가 되어 드리겠습니다. 그대 내게 오실 땐 푸르른 하늘 빛으로 오십시오. 고운 향내 전하는 바람으로 오십시오. 그리고, 그대 내게 오시기 전 갈색 그리운 낙엽으로 먼저 오십시오. 나 오늘도 그대 향한 그리운 등불 하나 켜 놓겠습니다.
8월 한낮 - 홍석화 8월 한낮 홍석화 밭두렁에 호박잎 축 늘어져 있는데 사철 맨발인 아내가 발바닥 움츠려 가며 김장밭을 맨다 느티나무 가지에 앉아 애가 타서 울어대는 청개구리 강물에 담긴 산에서 시원스럽게 우는 참매미 구경하던 파아란 하늘도 하얀 구름도 강물 속에 들어가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들길 - 고은 들길 고은 입은 옷 그대로도 왜 그런지 새롭습니다 사람에게는 10년 20년의 가파로운 단련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어떤 울음이 잠겨 있습니다 반쯤 혹은 다 물 속에 잠겨 그것이 있는지 없는지 모릅니다 그런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오늘은 그런 사람의 울음을 만나러 나섭니다 어찌 그것을 내가 손쉽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유난스레 서쪽으로 드넓게 트인 날 아침 이슬이 풀 속 깊이 박혀 풀 끝에 맻힌 그것이 스러진 뒤에도 간난아기의 숨은 넋으로 반짝거리며 잘 젖어버리는 들길입니다 모르겠습니다 모르겠습니다 사람에게는 이런 들길이 이따금 있어야 합니다 늘 하는 일밖에 모르다가도 수시로 있다가 없어지는 구름 아래 까닭없이 나서는 들길 그러다가 먼 데 가 있는 사람이듯 무엇인가 그리워할 들길이 있어야 합니다 그 길 오다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