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名詩 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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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길 - 고은 들길 고은 입은 옷 그대로도 왜 그런지 새롭습니다 사람에게는 10년 20년의 가파로운 단련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어떤 울음이 잠겨 있습니다 반쯤 혹은 다 물 속에 잠겨 그것이 있는지 없는지 모릅니다 그런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오늘은 그런 사람의 울음을 만나러 나섭니다 어찌 그것을 내가 손쉽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유난스레 서쪽으로 드넓게 트인 날 아침 이슬이 풀 속 깊이 박혀 풀 끝에 맻힌 그것이 스러진 뒤에도 간난아기의 숨은 넋으로 반짝거리며 잘 젖어버리는 들길입니다 모르겠습니다 모르겠습니다 사람에게는 이런 들길이 이따금 있어야 합니다 늘 하는 일밖에 모르다가도 수시로 있다가 없어지는 구름 아래 까닭없이 나서는 들길 그러다가 먼 데 가 있는 사람이듯 무엇인가 그리워할 들길이 있어야 합니다 그 길 오다가다 ..
빗물같은 정을 주리라 - 김남조 빗물 같은 정을 주리라 김남조 너로 말하건 또한 나로 말하더라도 빈 손 빈 가슴으로 왔다가는 사람이지 기린 모양의 긴 모가지에 멋있게 빛을 걸고 서 있는 친구 가로등의 불빛으로 눈이 어리었을까 엇갈리어 지나가다 얼굴 반쯤 그만 봐버린 사람아 요샌 참 너무 많이 네 생각이 난다 사락사락 사락 눈이 한 줌 뿌리면 솜털같은 실비가 비단결 물보라로 적시는 첫봄인데 너도 빗물 같은 정을 양손으로 받아 주렴 비는 뿌린 후에 거두지 않음이니 나도 스스로운 사랑으로 주고 달라진 않으리라 아무것도 무상(無償)으로 주는 정의 자욱마다엔 무슨 꽃이 피는가 이름 없는 벗이여
그 나무에 - 박숙인 그 나무에 / 박숙인 꽃이 되어 기대어 본다 내 고요 위에 비가 내리고 그 봄비에 젖어 낯선 것들과도 조우하며 예열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간절해서 긴 간이 의자가 숨길을 열어주기도 했다 지그시 눈 감으니 거기에 네가 있었다 멀어지는 것들을 뒤로하고 인사도 없이 건네 온 계절이지만 봄꽃으로 환해서 순간순간이 좋아 그 옆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봄이어서, 수없이 바람이 지나가도 한 계절 꽃으로 있어라.
사랑했던 날보다 - 이정하 사랑했던 날보다 이 정 하 그대 아는가 만났던 날보다 더 많은 날들을 사랑했다는 것을 사랑했던 날보다 더 많은 날들을 그리워했다는 것을 그대와의 만남은 잠시였지만 그로 인한 아픔은 내 인생 전체를 덮었다 바람은 잠깐 잎새를 스치고 지나가지만 그 때문에 잎새는 내내 흔들린다는 것을 아는가 그대 이별을 두려워했더라면 애초에 사랑하지도 않았다는 것을 이별을 예감했기에 더욱 그대에게 열중할 수 있었다는 것을 상처입지 않으면 아물 수 없듯 아파하지 않으면 사랑할 수 없네 만났던 날보다 더 많은 날들을 사랑했고 사랑했던 날보다 더 많은 날들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을 그대여 진정 아는가
꽃잎에 내리는 눈 꽃잎에 내리는 눈 김철 나 두고 차마 발길 돌리지 못해 저만큼 갔다 다시 와 까꿍 하는 너처럼 시절 모르는 사람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맨밥 먹지 말고 레인지 안에 국 있어요 일 분만 돌리면 돼요 메모 적어 놓고도 다시 와 까꿍까꿍 너처럼 푼수 없는 사람 하나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 -시집『먼지였으면 좋겠다』
새해의 기도 - 이성선 새해의 기도 - 이성선 - 새해엔 서두르지 않게 하소서 가장 맑은 눈동자로 당신 가슴에서 물을 긷게 하소서 기도하는 나무가 되어 새로운 몸짓의 새가 되어 높이 비상하며 영원을 노래하는 악기가 되게 하소서 새해엔, 아아 가장 고독한 길을 가게 하소서 당신이 별 사이로 흐르는 혜성으로 찬란히 뜨는 시간 나는 그 하늘 아래 아름다운 글을 쓰며 당신에게 바치는 시집을 준비하는 나날이게 하소서.
12월 - 오세영 12월 오세영 불꽃처럼 남김없이 사라져 간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스스로 선택한 어둠을 위해서 마지막 그 빛이 꺼질 때 유성처럼 소리 없이 이 지상에 깊이 잠든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허무를 위해서 꿈이 찬란하게 무너져 내릴 때 젊은 날을 쓸쓸히 돌이키는 눈이여 안 쓰러 마라 생애의 가장 어두운 날 저녁에 사랑은 성숙하는 것 화안히 밝아 오는 어둠 속으로 시간의 마지막 심지가 연소할 때 눈 떠라 절망의 그 빛나는 눈
11월 - 나태주 11월 나태주 돌아가기엔 이미 너무 많이 와버렸고 버리기에는 차마 아까운 시간입니다 어디선가 서리맞은 어린 장미 한 송이 피를 문 입술로 이쪽을 보고 있을 것만 같습니다 낮이 조금 더 짧아졌습니다. 더욱 그대를 사랑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