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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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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정조 탕평의 글과 그림의 힘 -2 규장각 사호원 수교 현판 규장각 관원을 보호하고 위상을 세워주는 글귀 규장각 관원들이 근무하는 사무실을 규장각 2층 건물보다 더 깊숙한 곳에 있어 불편한 점이 많았습니다. 정조는 사무실인 이문원을 인정전 서쪽으로 옮기도록 했습니다. 규장각 실무 담당자인 서리들의 공간에 '사호헌'이라 이름을 지어주면서 '비록 상급 관청 서리라 해도 출입할 수 없게 하라'고 명을 내렸습니다. 규장각 위상을 세우기 위한 정조의 세심한 노력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표암 강세황공 칠십일세 진영 어제 제문 - 정조 탁 트인 흉금, 고상한 운치, 서화는 거친 자취일 뿐 붓을 휘들러 수만 장 글씨를 궁중의 병풍과 시전지에 썼네. 판서 지냈으니 벼슬은 낮지 않은데 삼절은 당나라 정건(705~764)의 수준 중국에 사진으로 갔다가 기로소..
영.정조 탕평의 글과 그림의 힘 언제 : 2024년 2월 7일 수요일 어디 : 국립중앙박물관 특별기획실 2024년은 영조 즉위 3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특별전 은 영조와 정조가 나라의 중심에 서서 ‘탕평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글과 그림의 힘’을 어떻게 활용했는지에 주목하는 전시입니다. 붕당이 극심해 신하들이 왕을 선택할 정도로 왕권이 흔들린 상황에서 영조는 탕평의 길로 나아가기 위해 ‘글’로 방향을 설정하고, 인재를 고루 등용하고 왕도를 바로 세워 탕평을 이루고자 글과 그림으로 소통했습니다. 정조는 영조의 탕평책을 계승하며 규장각 신하 등 친위세력을 양성하는 등 치밀하게 국정을 이끌었습니다. 영조와 정조가 뜻을 전달하기 위해 글과 그림으로 ‘소통’했듯 전시는 ‘소통’의 산물입니다. 누구나 다 아는 영조와 정조의 알려지지 않은 이..
광개토대왕릉비와 국립중앙박물관소장 탁본 광개토대왕릉비 광개토대왕릉에는 고구려 광개토대왕(재위 391~412년)의 아들인 장수왕이 아버지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414년에 세운 비입니다. 비는 압록강 북쪽 지금의 중국 지안에 위치합니다. 장군총과 태왕릉이 위치한 고구려 왕들의 무덤 가운데에 있습니다. 높이 약 6.39m의 돌에 1,775자를 새겼는데, 그중 일부는 마모되어 판독이 어렵습니다. 비의 내용은 1. 고구려 건국신화와 왕의 즉위. 2. 광개토대왕의 업적. 3. 왕릉 관리 규정인 수묘제에 관한 것입니다. 비는 고구려 멸망 이후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1877년에 그 존재가 다시 알려지면서 본격적으로 연구가 시작되었으며, 비의 탁본도 여러 점 제작되어 전해지고 있습니다. 광개토대왕릉비에는 당시 고구려 사람들이 직접 남긴 기록으로 그 ..
Good Bye - 서울올림픽주경기장 88 서울 올림픽 주 경기장으로 사용된 서울 잠실종합운동장 올림픽주경기장이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다음 달 시작되는 리모델링 공사를 거쳐 3년 뒤 복합 문화 공간으로 재탄생할 예정이다. 원형의 모습을 기록하기로 했다. 드론을 띄워 내려다보니 지붕이 만들어내는 우아한 곡선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군데군데 보이는 녹슨 철판과 빛바랜 외벽은 세월의 풍파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한국을 대표하는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한 올림픽주경기장은 콘크리트 기둥 80개로 둘러싸였고, 조선 시대 백자 항아리에서 영감을 받아 지붕을 부드러운 곡선으로 그려냈다고 한다. 이런 외관의 특징을 최대한 보전하면서 리모델링을 진행할 예정이다. 국민들 마음속에 많은 추억을 남긴 경기장. 세계에 한국을 알리는 계기가 된 서울 올림픽은 물론이..
대한제국의 길 - 사진전 -3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제국의 재무장관 블라디미르 코콥초프와 회담하기 위해 하얼빈에 오게 되었다. 이 소식을 대동공보사에서 전해들은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 암살에 자원했다. 10월 21일에 대동공보사 기자 이강(李剛)의 지원을 받아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난 안중근은 우덕순과 조도선, 유동하와 함께 하얼빈(哈尔滨, 哈爾濱(하얼빈), Harbin)에 도착했다. 당초 계획은 동청철도(東淸鐵道)의 출발지인 장춘의 남장춘(南長春), 관성자(寬城子)역과 도착지인 하얼빈, 채가구(蔡家溝)역의 4개 지점에서 암살을 시도하려 하였으나 자금과 인력이 부족하여 도착지인 하얼빈과 채가구에서 저격하기로 계획을 변경하였다. 이에 따라 우덕순과 조도선은 채가구역으로 이동하였으며 안중근은 하얼빈역에서 공격하기로..
대한제국의 길 - 사진전 -2 을사조약(乙巳條約) 혹은 제2차 한일 협약(第二次韓日協約), 을사늑약(乙巳勒約)으로 불리는 조약은 1905년 11월 17일 대한제국의 외부대신 박제순과 일본 제국의 주한 공사 하야시 곤스케에 의해 체결된 조약이다. 체결 당시에는 아무런 명칭이 정해지지 않았으며 대한제국이 멸망한 후 조선총독부에 의해 편찬된 고종실록에는 한일협상조약(韓日協商條約)이라고 기재되었다. 을사년에 체결되었기 때문에 을사협약(乙巳協約), 을사5조약(乙巳五條約), 또는 불평등 조약임을 강조하는 목적으로는 을사늑약(乙巳勒約)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일본어로는 보통 제2차 일한 협약(第二次日韓協約 다이니지닛칸쿄야쿠) 또는 일한보호협약(日韓保護条約 닛칸호고조야쿠)이라고 부른다. 1965년에 대한민국 정부와 일본 정부는 한일 국교를 정상화하..
대한제국의 길 - 사진전 -1 대한제국(大韓帝國, Korean Empire)은 1897년 10월 12일부터 1910년 8월 29일까지 존재했던 제국으로 조선을 계승한 국가이자 한반도의 마지막 군주국이다. 1897년 고종황제가 대한제국 수립 선포 이후 대한제국 정부는 여러 개혁을 시도했고, 자주적 국가가 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일본 제국에게 외교권이 박탈되었고, 이후 일본과 체결한 여러 조약으로 사실상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하였다. 1910년 8월 29일 한일 병합 조약으로, 대한제국은 일본 제국에 병합되었다. 이 이름에 사용된 대한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거쳐, 오늘날의 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 국호로 이어지고 있다. (위키백과 참조) 1897년 10월 12일 대한제국 고종은 환구단(圜丘壇)을 짓고 ..
1952년 6.25 전쟁 중 미군이 찍은 희귀사진 58매 1952년 6.25 전쟁 중 미군이 찍은 희귀사진 58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