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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

영.정조 탕평의 글과 그림의 힘

 

언제 : 2024년 2월 7일 수요일

어디 : 국립중앙박물관 특별기획실

 

 

2024년은 영조 즉위 3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특별전 <탕탕평평-글과 그림의 힘>은 영조와 정조가 나라의 중심에 서서 탕평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글과 그림의 힘을 어떻게 활용했는지에 주목하는 전시입니다

붕당이 극심해 신하들이 왕을 선택할 정도로 왕권이 흔들린 상황에서 영조는 탕평의 길로 나아가기 위해 

로 방향을 설정하고인재를 고루 등용하고 왕도를 바로 세워 탕평을 이루고자 글과 그림으로 소통했습니다

정조는 영조의 탕평책을 계승하며 규장각 신하 등 친위세력을 양성하는 등 치밀하게 국정을 이끌었습니다

영조와 정조가 뜻을 전달하기 위해 글과 그림으로 소통했듯 전시는 소통의 산물입니다

누구나 다 아는 영조와 정조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전시개요

영조(재위 1724~1776)와 정조(재위 1776~1800)의 시대를 '왕의 귀환'이라고 합니다.

영조와 정조는 '탕평(蕩平)을 통치이념으로 삼아 임금이 임금다운 나라를 만들었습니다.

2024년 영조 즉위 300주년을 기념해 영조와 정조의 탕평 정치에 밑받침이 된 글과 그림의 힘을 

보여 주는 전시를 개최합니다.

두 임금은 글과 그림으로 인재들과 소통하며 이상을 공유했습니다. 또 왕실의 정통성을 

바로 세우며 탕평의 길로 나아갔습니다.

특별전에 선보이는 서화 88점은 영조와 정조의 치열하고 치밀한 소통의 결과물입니다. 혼돈한 상황을

정리해 나아갈 방향을 설정하고 명분을 만들어 정당성을 강조하며, 마음을 전달해

지지 세력을 확대하고, 질서와 화합의 이상을 구현하는 데 글과 그림을 어떻게 사용했는지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길 기대합니다.

 

 

 

 

 

 

 

 

 

 

 

 

 

 

 

 

반란의 원인을 책으로 알리다.

영조는 온건파 소론과 함께 국정을 운영하던 중 급진파 소론이 일으킨 무신란(1728년)에 직면했습니다.

박문수 등 온건파 소론은 무신란을 진압하고 반란 주동자와 자신들이 무관하다고 밝혔습니다.

영조는 이 책에서 반란의 근본적 원인을 붕당으로 돌렸습니다.

책을 출판해 자신의 입지를 명확히 하는 방식은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감란록(勘亂錄)

송인명(宋寅明 -1689~1746) 등 편찬 1729년(영조 5)

종이에 목판인쇄/구4635

 

 

 

왕위 계승의 정당함을 책으로 알리다

무신란이 끝난 후에도 일부 소론들은 여전히 영조이 정통성에 의문을 가졌고,

노론도 불만이 많았습니다. 영조는 노론이 경종을 해치려한 혐의로 처벌된 "임인옥사(壬寅獄事)"가 

거짓이라는 노론의 주장을 들어주었습니다.

영조는 자신이 효종 - 현종 - 숙종의 삼종혈맥을 이었으며,

경종의 명으로 왕세자가 되었으므로 본인에게 정통성이 있음을 이 책에서 밝혔습니다.

어제대훈(御製大訓)

영조 1741년(영조 17)

종이에 목판인쇄/건희8715/2021년 이건희 기증

 

 

 

왕위 계승의 정통성을 체계적으로 밝히다.

1755년 나주 객사에 영조를 비방하는 글이 걸렸습니다. 이 사건을 수습하던 중 소론 일부가

경종이 영조가 올린 게장 때문에 죽었다고 주장하자

영조는 소론을 대규모로 처형했습니다. 이를 "을해옥사(乙亥獄事)"라 합니다.

영조는 이 사건과 경종과 자신이 관계, 즉위 과정의 합법성에 대해 더 명확하고 체계적으로 

서술하여 책으로 발간했습니다.

천의소감(闡義昭鑑)

김재로(金在魯 1682~1759) 등 편찬 1755년(영조 31)

종이에 활자인쇄/구4763

 

 

 

 

 

 

 

 

 

 

 

 

백성을 생각하는 영조의 마음

각각의 바위 위 글이 있습니다.  오른쪽은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이 한쪽으로 치우쳐 백성을 돌보지 않으면

안된다는 의미이고,

왼쪽은 백성이 미미해 보이더라도 항상 두려워하며 그들의 어려움을 생각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노년의 영조가 백성을 생각하며 그린 것입니다.

정조는 즉위 흐 이그림을 영조의 글과 함께 첩으로 제작했습니다.

 

 

 

 

 

 

 

 

 

 

 

 

글과 그림으로 뜻을 전하는 영조의 전략

털이 복슬복슬한 삽살개가 고개를 치켜들고 이빨을 드러낸 채 사납게 짖고 있습니다.

삽살개가 이토록 사납게 표현된 이유는 그림 위 영조가 직접 쓴 시에서 알 수 있습니다.

눈을 부릅뜨고 이빨을 드러내며 아무 따나 짖는 삽살개는 영조의 눈에 탕평을 반대하는 

신하들의 모습으로 보였던 듯합니다.

삽살개

그림 김두량(1696~1763)

글 글씨 영조 1743년(영조 19)

종이에 엷은 색 - 개인 소장 -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탕평으로 나아가는 첫걸음, 인사행정

조선시대 관리들의 근무 성적 평가와 인사 발령을 결정하는 인사행정인 도목정사가 

음력 6월과 12월에 시행되었습니다.

이조와 병조가 각각 문관과 무관 인사를 주관했습니다. 왕이 참석하면 친림 도목정사라 하는데,

영조는 이전과 달리 친정을 하며 인사의 공정성을 강조했습니다. 정조는 인사행정을 온전히 주도하며

인재를 선발하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변화를 도목정사를 그린 그림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왕이 중심인 인사행정

산봉우리 다섯 개가 그려진 오봉병풍 앞 왕의 의자가 있습니다.

왕의 자리 가까이에 내시와 사관이, 다음에 승지와 규장각 관원이 있습니다. 반면 인사행정 담당인

이조와 병조 관원들은 튓마루와 전각 밖으로 밀려났습니다.

규장각 관원은 정조의 친위세력입니다. 친위세력을 바탕으로 왕의 위상을 높이겠다는 의자가 돋보입니다.

 

 

 

 

 

영조가 이조관원에게 공정한 인사행정을 당부하다.

 

 

 

영조가 병조 관원에게 인사행정의 방침을 내리다.

 

 

 

글로 깊어지는 신하들과의 유대 관계

영조가 병석에 누워 있을 때, 비가 내리지 않자 백성을 많이 걱정했습니다. 

며칠 뒤 건강을 회복했고, 얼마 후 사흘에 걸쳐 비가 내렸습니다. 영조는 이 시를 짓고 신하들에게 내려

운을 따라 시를 짓도록 했습니다. 신하들 입장에서 왕에게 보이는 시 짓기는 부담스러울 수도 있으나

왕의 시가 실린 첩에 자신의 시가 수록되는 일은 영광스럽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喜雨 단비가 내림을 기뻐하다.

(어제 갱화첩) 제 1.2면

영조 1744년(영조 20)

 

 

 

두 임금이 글로 병자호란 충신을 기리다

오달제는 병자호란 때 청나라와 화의를 끝까지 반대하다 1637년 29세에 청나라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1705년 그의 꼿꼿한 기개와 어울리는 매화 그림 위에 그의 충심을 기리는 

숙종의 글이 덧붙여졌습니다. 영조도 병자호란 발발 120년이 되는 해

오달제를 추모하는 글을 지었습니다.

오달제 그림에 두 임금의 글이 더해지면서 그림의 가치와 그의 충성심이 더 높아졌습니다.

묵매도(墨梅圖)

그림 오달제(1609~1637) 17세기 중반

글. 글씨 (상단) 숙종 1705년(숙종 31)

글(화면) 영조 1756년(영조 32)

 

 

 

 

 

명신 김육의 행적을 글로 기리다.

김육(金堉 1580~1658)은 대동법을 시행해 백성들에게 큰 도움을 준 인물입니다.

소나무 아래 한가롭게 서 있는 김육의 모습입니다. 특이하게 중국 화가가 그린 것입니다.

그림 위쪽의 영조의 시는 이 그림이 그려지고 100여 년 뒤 적은 것입니다.

영조는 온천을 다녀오는 길에 김육의 대동법 기념비를 보고 큰 감명을 받아 김육 초상에 시를 내렸습니다.

이렇듯 영조는 자신의 글로 옛 신하의 충성스러운 행적을 높였습니다.

김육 소상(金堉小像)

그림 오명(17세기 전반 활동) - 중국 17세기 전반

글 영조 1751년(영조 27)

비단에 색 - 실학박물관

 

 

 

허목 초상(許穆肖像) =보물

그림 이명기(1756~1813 이전) - 1794년(정조 18) 모사

글 채제공(1720~1799) 1794년(정조 18)

비단에 색(그림), 비단에 먹(글씨)

 

 

 

 

 

 

 

특별히 당부하는 마음을 담아

정조가 평안도 영변 부사로 임명되어 떠나는 서형수를 응원하는 마음으로 쓴 글과 시가 적혀 있다.

작품 규모와 품격만으로도 정조가 51세의 서형수를 얼마나 특별하게 대했는지 알 수 있다.

이 작품의 서체는 정조의 다른 글씨와 다른 점이 많다.

증 절용부백부임지행

글. 글시 정조 -1799년(정조 23)

비단에 먹

 

 

 

정조의 정책과 학문 연구 기관 설립

정조는 영조에 이어 군주가 정치와 학문을 이끌어 나가는 군사가 되고자 했습니다.

신하보다 학문적으로 우위에 서 있도록 노력했습니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바로 규장각을 건립하도록

지시했습니다. 규장각에서 젊은 관리들을 교육 시켰고, 규장각 관원들은 정조의 탕평 정책을 뒷받침했습니다.

규장각의 위상에 어울리게 이 그림에서 규장각 2층 건물에 다른 건물들보다 더 크게 그려져 있습니다.

규장각도

단원 김홍도(1745~1805)

1776년(정조 즉위년) 추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