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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

영.정조 탕평의 글과 그림의 힘 -2

 

규장각 사호원 수교 현판

규장각 관원을 보호하고 위상을 세워주는 글귀

규장각 관원들이 근무하는 사무실을 규장각 2층 건물보다 더 깊숙한 곳에 있어

불편한 점이 많았습니다. 

정조는 사무실인 이문원을 인정전 서쪽으로 옮기도록 했습니다. 규장각 실무 담당자인 서리들의 공간에

'사호헌'이라 이름을 지어주면서 '비록 상급 관청 서리라 해도 출입할 수 없게 하라'고 

명을 내렸습니다.

규장각 위상을 세우기 위한 정조의 세심한 노력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표암 강세황공 칠십일세 진영

어제 제문 - 정조

탁 트인 흉금, 고상한 운치, 서화는 거친 자취일 뿐

붓을 휘들러 수만 장 글씨를 궁중의 병풍과 시전지에 썼네.

판서 지냈으니 벼슬은 낮지 않은데 삼절은 당나라 정건(705~764)의 수준

중국에 사진으로 갔다가 기로소 서루(西樓)에 선배 뒤를 따라 들어갔네

인재를 얻기 어려운 생각에 거친 술이나마 내리노라

조윤형(曺允亨 - 1725~1799)이 삼가 쓰다

 

 

 

박문수 문무공신 반신상

소중히 전해진 초상화로 박문수를 기억하다

박문수의 건의로 문무공신상이 1750년 다시 제작되었습니다.

이때 그려진 초상화는 상반신만 표현된 반신상입니다. 완성된 초상화 중 한 부는 첩으로 만들어

집으로 보내고, 나머지 한 부는 다른 문무공신 반신상과 함께 첩으로 꾸며 충훈붕 보관했습니다.

박문수 38세 초상에 비해 60세 초상에서는 수염이 희어지고 주름이 깊어졌습니다.

소중히 보관된 두 초상화로 그의 달라진 모습을 비교할 수 있습니다.

 

 

박문수 문무공신 전신상

영조의 탕평정치를 뒷받침한 박문수

영조가 왕세자 때 교육을 담당했던 박문수는 균역법으로 부족해진 세수를 해결하는 묘책을 내는 등

영조의 탕평정치를 뒷받침했습니다.

무신란을 진압한 공으로 그의 초상화를 제작할 때, 당대 최고 초상화가 진재해가 직접 그를 보면서

밑그림을 그렸다고 합니다.

갈색 선으로 윤곽을 그리고 색을 엷게 칠하고 음영은 좀 더 어두운 색으로 표현하는

18세기 전반 초상화 표현 방식대로 그려져 있습니다.

 

 

 

감정 표현이 거침없던 정조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 - 정조어찰첩 3책 - 정조 22

심환지는 정조의 명으로 금강산에 다녀오게 되었습니다. 이때 한 신하가 정조에게 심환지 흉을 보는

글을 올립니다. 정조는 그 신하를 가르켜 

"이 신하는 내면이 충실하지 못하니 참으로 호로자식이다"라고 심환지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감정 표현이 거침없던 정조의 또 다른 면모를 볼 수 있는 편지입니다.

 

 

 

귀한 음식으로 가르침의 공을 치하하다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 - 정조어찰첩

정조는 심환지를 아꼈습니다. 이 편지에는 정조가 심환지에게 전복, 해삼, 문어 등 

해산물을 보낸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1797년 5월 심환지는 규장각 제학이라는 높은 벼슬에 있었지만 원자(훗날의 순조)가 '소학'을 공부할 때

참석해 원자의 학습이 잘 진행될 수 있도록 힘썼습니다.

정조는 이를 고마워하며 귀한 선물을 보냈습니다.

 

 

 

왕이 건강 상태를 직접 알려주는 친밀한 사이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 - 정조어필첩

정조는 국가 기밀에 해당하는 임금의 건강 상태조차도 심환지에게 자세히 알렸습니다.

정조는 몸의 화기 때문에 약도 많이 먹고, 잠들지 못해 답답하다는 고민을 털어놓을 정도로 심환지를 믿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이 편지를 보내고 13일 뒤 정조는 49세의 나이로 승하했습니다.

 

 

 

 

 

 

 

 

 

정조가 즉위날 내린 윤음(1776)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밝히다

정조는 즉위 당일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공표하고 친아버지를 예에 맞게 대우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이어서 영조의 명으로 돌아가신 큰아버지 효창세자를 계승한 사실도 드러냈습니다.

그는 할아버지의 처분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사도세자 추숭을 인정과 예에 맞게 추진할 것이라고 

만천하에 공표한 것입니다.

 

 

 

사수도(四獸圖)

왕처럼 대우받은 사도세자

사도세자 무덤을 옮기는 과정을 기록한 의궤입니다.

사도세자의 관을 임시로 안치하는 환궁 내부에 그린 청룡, 백호, 주작,현무의 사수도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본래 왕과 왕비의 환궁에만 사수도를 그리는데, 정조는 사도세자 환궁에 사수도를

그리도록하여 친아버지를 왕에 버금가도록 대우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세자에서 장헌세자로

장조 추상시호 옥인

정조는 즉위 직후 사도세자에게 새로운 시호 '장헌'을 올리고, 이를 세긴 인장을 옥으로 만들었습니다

또한 사도세자 사당을 '경모궁'으로, 무덤을 '영우원'으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이는 영조대 왕의 친부모 사당과 무덤을

'궁'과 '원'으로 높여 왕실 지위를 높이려는 제도를 따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