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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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잦은 병치레로 말년이 불행했던 정조 -34 잦은 병치레로 말년이 불행했던 정조 개혁의 꿈 무산..안동김씨 세도정치 개막 1800년 6월 초부터 악성 종기 때문에 앓기 시작한 정조는 몸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의원들이 온갖 처방을 써봤지만 모두 허사. 6월 28일 삼복더위 속에 거의 한 달간 투병하던 정조는 결국 창경궁 영춘헌에..
조선 후기 르네상스 이룬 정조 -33 조선 후기 르네상스 이룬 정조 정조가 국왕으로 있던 18세기 후반은 조선의 문예부흥기로서 사회 각 분야의 발전이 두드러진 시기였다. 이 시기는 세계사적으로도 역동적인 움직임이 있던 시대다. 미국이 신생 국가로 새롭게 탄생한 1776년은 정확하게 정조가 즉위한 해였다. 유럽에서는 1..
'신해통공'으로 경제 개혁에 앞장 선 정조 -32 '신해통공'으로 경제 개혁에 앞장 선 정조 소상공인 키우고 노론 기득권 세력 약화 정조는 정치에서도 뛰어난 역량을 발휘했지만, 경제 분야에서도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1791년에 단행한 신해통공(辛亥通共)이다. 신해통공의 핵심은 소상공인의 상업권을 확보하게 ..
정조의 화성(華城) 행차에 담긴 의미 -31 정조의 화성(華城) 행차에 담긴 의미는 왕권 강화·민심 소통..다목적 국가 축제 재위 20년이 되던 시점인 1795년(정조 19년) 윤 2월 9일 새벽. 정조는 창덕궁을 출발해 화성(華城)으로 향했다. 정조가 화성을 방문하는 것은 이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정조는 1789년에도 자신의 생부 사도세자의..
정조가 화성(華城)을 지은 이유 -30 정조가 화성(華城)을 지은 이유 사도세자 추모와 신도시 건설 '一石二鳥' 18세기 후반 정조의 지시로 만들어진 화성(華城)은 조선시대 성 중 가장 복원이 잘 된 건물로 꼽힌다. 화성을 구성하는 각각의 건축물은 저마다 특징을 지니면서 화성의 가치를 높여준다. 화성은 1997년 12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될 정도로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정조 개혁정치의 상징으로 평가받는 수원 화성. 정조가 화성 건설을 통해 보이고자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정조는 즉위 후 탕평책을 통해 죄인의 아들이라는 명분상 약점을 극복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데 힘썼다. 아울러 사도세자의 복권 작업을 적극 추진했다. 즉위 직후 사도세자의 위호를 장헌세자로 바꿨으며, 창경궁 바로 옆에 사도세자를 모신 사당인 경모궁(景慕宮)을 조성했다. 경모궁..
정조의 즉위와 개혁정치의 산실 규장각 -29 정조의 즉위와 개혁정치의 산실 규장각 복수(사도세자) 대신 화합 선택하고 개혁 고삐 당겨 정조(1752~1800년, 재위 1776~1800년)는 세종과 함께 조선을 대표하는 개혁 군주로 기억된다. 하지만 정조에게는 지울 수 없는 상처가 있었다. 바로 아버지 사도세자의 비극적인 죽음이다. 영조에 의해..
딸바보 영조와 옹주들의 이야기 -28 딸바보 영조와 옹주들의 이야기 화평옹주가 오래 살았다면 사도세자도 영조는 사도세자에 대한 이미지 때문인지, 아들을 죽인 비정한 아버지로 기억되는 경향이 짙다. 영조는 아들 2명(효장세자, 사도세자)에 12명의 딸(7명이 장성함)을 둔 ‘딸부자’ 아버지였고 딸에 대한 사랑도 지극..
영조와 정순왕후의 사랑이야기 -27 영조와 정순왕후의 사랑이야기 어떻게 정순왕후(영조 계비)는 영조 곁에 묻혔나 1759년(영조 35년) 6월 66세의 국왕 영조(1694~1776년, 재위 1724~1776년)는 15세 신부를 왕비로 맞았다. 나이 차는 무려 51세. 이 혼례식은 영조의 만년 삶에 큰 동기를 부여한 듯하다. 영조는 이후 17년을 더 살았고 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