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바보 영조와 옹주들의 이야기
화평옹주가 오래 살았다면 사도세자도
영조는 아들 2명(효장세자, 사도세자)에 12명의 딸(7명이 장성함)을 둔 ‘딸부자’ 아버지였고 딸에 대한 사랑도 지극했다.
불행히도 3명의 딸(화완, 화유, 화령)을 제외하면 모두 자신보다 먼저 죽는 아픔을 겪었지만.
딸에 대한 애정을 보면 영조도 보통 아버지와 비슷했던 듯싶다.
영조는 정비 정성왕후와 계비 정순왕후와의 사이에서는 자식을 두지 못했기 때문에 공주는 없지만
후궁과의 사이에서는 12명의 딸을 뒀다.
12명의 딸 중 장성한 옹주는 모두 7명.
정빈 이씨(?~1746년)는 화순옹주, 사도세자 생모 영빈 이씨는 화평옹주, 화협옹주, 화완옹주 등 3명의 딸을 뒀다.
귀인 조씨는 화유옹주, 숙의 문씨는 화령옹주와 화길옹주를 낳았다.
영조의 장녀는 화순옹주(和順翁主, 1720~ 1758년)다. 1725년 2월 화순옹주에 봉해졌으며
1732년 동갑인 경주 김씨 김한신에게 시집을 갔다.
김한신은 바로 추사 김정희의 증조부가 되는 인물이다.
1758년 김한신이 39세 젊은 나이로 사망하자, 화순옹주는 큰 슬픔에 빠졌다.
곡기를 끊고 남편의 곁을 따라가고자 했다.
영조가 직접 찾아가 만류했으나 화순옹주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곡기를 끊은 옹주는 14일 만에 남편을 따라갔다.
영조는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딸이 아버지의 말을 어기고 자살한 것에 대해 매우 못마땅해했다.
정조 즉위 후 화순옹주는 열녀로 인정을 받았다.
정조는 김한신과 화순옹주 무덤 근처에 열녀문을 세웠다.
현재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 소재한 화순옹주홍문(和順翁主紅門)은 유형문화재 제45호로 지정돼 있다.
화평옹주(和平翁主, 1727~1748년)는 영빈 이씨 소생으로 사도세자의 친누이였다.
1727년(영조 3년) 창경궁 집복헌에서 태어났으며, 1738년 반남 박씨 박명원에게 시집갔다.
박명원은 박지원의 재종형이기도 한데,
1780년 청나라에 사신으로 갈 때 육촌 동생 박지원을 데리고 갔고 이때 박지원이 쓴 작품이 ‘열하일기’다.
영조는 영빈 이씨의 딸들을 매우 아꼈는데, 특히 품성이 좋은 화평을 총애해 사위와 함께 궁궐 안에 살게 했다.
화평옹주는 아버지에게 늘 꾸지람 듣는 사도세자를 위로했으며, 세자에게 사랑을 베풀어줄 것을 영조에게 건의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던 화평옹주는 1748년 22세 꽃다운 나이에 병으로 사망했다.
“딸 중에는 화평옹주가 내 마음을 알아주었다”는 영조의 회고나,
“옹주는 훌륭한 부덕(婦德)을 지니고 있었는데 졸하였으므로 왕이 사랑하는 뜻에서 통석해 마지않았다”는 사관의 평가에서 볼 수 있듯
화평옹주는 영조의 마음을 가장 사로잡은 옹주였다.
‘한중록’에도 “화평옹주가 영묘(영조)를 한결같이 대하시던 일들은 궁중 사람들이 다 아는 일로 모두 감탄했다.
선희궁(영빈 이씨)께서는 왕의 사랑이 고르지 않은 것을 서러워하셨다”며
화평옹주가 영조의 사랑을 독차지했음을 증언하는 내용이 나온다.
이어 “화평옹주가 계셨다면 부자간에 자효(慈孝)하게 살았을 것이니 착하신 옹주가 일찍 돌아가신 것이
어찌 국운에 관계하지 아니하리오. 지금 생각해도 통절하고 애석하다”고 했다.
영빈 이씨 소생의 두 번째 옹주 화협옹주(和協翁主, 1731~1752년) 또한 요절해 영조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화협옹주는 1743년 13세의 나이로 영의정을 지낸 평산 신씨 신만의 아들 신광수에게 시집을 갔지만,
1752년 언니와 똑같이 22세에 사망했다.
‘한중록’ 2편은 혜경궁(정조의 어머니)이 슬픔을 가라앉히고 화완옹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으로 서두를 장식한다.
정조가 초년에 어머니와 외가를 미워한 것은 모두 화완옹주의 이간책 때문이라 했다.
그만큼 화완옹주는 언니들과 달리 정치에도 깊이 개입한 옹주이자, 가장 드라마틱한 삶을 산 옹주였다.
영빈 이씨 소생 화완옹주(和緩翁主, 1738~1808년)는 1738년 1월에 태어났다.
영조가 낳은 옹주 12명 중 9번째여서 9왕녀라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영조의 옹주 중에는 조기에 사망한 경우가 많아 1738년 당시 생존해 있던 옹주는 화순옹주, 화평옹주, 화협옹주 3명뿐이었다.
영조가 44세에 본 늦둥이 딸이어서 그런지 태어나자마자 영조의 사랑이 지극했다.
1748년 영조의 총애를 받던 화평옹주 사망 후 영조의 사랑은 전적으로 화완옹주에게 갔고,
11세의 소녀는 그 편애에 집착했다.
1749년 3월 12세가 된 화완옹주는 정우량의 아들 정치달과 혼인하고 출합(出閤·궁을 나감)해 향교동에 신혼집을 마련했다.
결혼 후에도 옹주는 영조의 총애를 받았다.
“화완옹주가 왕의 딸들 가운데에서 가장 깊은 사랑을 받았고 성질도 요사하게 지혜롭고 민첩하므로,
염치없이 승진을 다투는 조정의 인사는 모두 정우량과 그 아우 정휘량에게 청탁을 했다.”
세상 부러울 것 없던 옹주에게 큰 슬픔이 찾아왔다.
1756년에 낳은 딸이 이듬해 1월에, 다음 달엔 남편마저도 세상을 떠났다.
영조는 사위의 초상을 치른 후 화완옹주를 궁궐에 들어와 살게 했다.
20세에 청상과부가 돼 궁궐로 돌아온 화완옹주와 64세에 왕비를 잃은 영조는 서로에게 좋은 의지처가 됐다.
옹주가 입궐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758년 1월, 이번엔 형부인 김한신에 이어 큰언니 화순옹주가 남편을 따라 죽는 일이 벌어졌다.
영조는 화평옹주, 화협옹주에 이어 다시 한 번 딸을 잃는 비극을 겪었고 당연히 궁궐 분위기는 침울했다.
이때 영조를 위로해준 이 역시 화완옹주였다.
1759년 6월 영조가 66세의 나이로 15세 신부 정순왕후를 계비로 맞이했다.
영조에게도 잠시나마 안정이 찾아왔지만, 반대로 영조와 사도세자의 갈등은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다.
영조와 창덕궁에 함께 거처했던 사도세자는 가능한 한 영조와 떨어져 살 것을 희망했다.
이를 위해 누이동생인 화완옹주가 큰 역할을 했음이 ‘한중록’에 기록돼 있다.
화완옹주는 영조와 사도세자 사이의 메신저 역할을 톡톡히 했는데 이 모든 일은 영조의 딸에 대한 무한신뢰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1762년 사도세자가 28세의 나이로 뒤주에 갇혀 죽는 비극의 주인공이 된 이후에도
화완옹주는 영조, 정순왕후와 함께 경희궁에 살았다.
특히 세손인 정조가 경희궁으로 오자 마치 어머니처럼 세손을 대했고 혜경궁 홍씨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화완옹주가 세손을 독점하려는 모습을 보이면서 혜경궁과의 갈등이 시작됐다.
‘한중록’에는 당시 상황에 대해 “화완옹주의 성품이 이기기 좋아하고
시기와 질투심이 강했으며 권세 좋아하기가 유별나서 온갖 일이 다 일어났다”고 기록돼 있다.
옹주의 집착이 커지자 세손도 고모를 멀리했다.
이에 화완옹주는 세손 대신 자신의 양자인 정후겸에게 애정을 쏟았다. 동시에 정순왕후와 밀착해 세손을 견제했다.
실록에는 “화완옹주는 궁중에 앉아 그의 아들을 위해 흉당들을 도왔다”고 기록돼 있다.
이런 처신은 정조 즉위 후 외척 세력 척결의 중요한 배경이 됐다.
1776년 영조의 승하는 옹주에게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정조는 즉위 보름 만에 정후겸을 귀양 보낸 후 사약을 내렸다.
세상 사람들은 정후겸의 배후인 화완옹주를 ‘옹주’라 칭하지 않고, ‘정처(鄭妻)’라 불렀다.
그만큼 화완옹주가 민심에 지탄의 대상이 되던 존재였음을 알 수 있다.
영조의 생전 지극한 총애 때문이었을까?
정조는 영조의 삼년상 동안 옹주를 처벌하지 않다가, 삼년상이 끝난 후 스스로 자결할 것을 명했다.
그러나 강화도 교동도에 유배된 화완옹주는 끝까지 자결하지 않고 모진 세월을 견뎌냈다.
여론을 의식해 자결을 명했지만 정조 또한 끝까지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려 하진 않았다.
결국 20여년의 세월이 흐른 후인 1799년(정조 23년), 정조는 정처의 죄를 용서하라는 전교를 내렸다.
서녀로 강등된 후 20년 가까운 유배 생활을 한 화완옹주는 마지막 순간 옹주의 명예를 회복하고 70세까지 장수했다.
영조의 딸 중 가장 장수했지만 그만큼 수난도 많았고
드라마틱한 삶을 살아간 옹주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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