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와 정순왕후의 사랑이야기
어떻게 정순왕후(영조 계비)는 영조 곁에 묻혔나
나이 차는 무려 51세.
이 혼례식은 영조의 만년 삶에 큰 동기를 부여한 듯하다.
영조는 이후 17년을 더 살았고 영조 사후 29년 뒤에 정순왕후(貞純王后)는 61세 나이로 영조 곁으로 왔다.
1757년(영조 33년) 2월, 1704년 영조와 혼례식을 치르고 53년간 해로했던 왕비 정성왕후(貞聖王后, 1692~1757년) 서씨가 사망했다.
영조는 고령을 이유로 재혼을 사양했지만 신하들 강권에 마지못해 승낙하는 방식으로 재혼을 허락했다.
그리고 삼년상이 끝난 시점인 1759년 6월 정순왕후를 계비로 맞이했다.
영조와 정성왕후의 사이에는 후사가 없어 후궁 영빈 이씨가 낳은 사도세자가 세자로 책봉돼 있었다.
혼례식이 거행되던 1759년 6월 사도세자는 대리청정을 하면서 후대 왕이 되기 위한 수업을 받고 있었다.
숙종 시절 장희빈의 경우처럼 후궁이 왕비가 되는 사례가 있었다.
하지만 장희빈의 횡포를 경험한 숙종이 후궁이 왕비가 되는 길을 제도적으로 막아버렸고 따라서 영빈 이씨는 왕비가 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영조가 66세에 맞이한 어린 계비는 왕비라는 지위를 얻게 됐다.
조선 후기 야사를 주로 기록한 ‘대동기문(大東奇聞)’에는 정순왕후가 간택될 때의 일화가 수록돼 있다.
당시 왕실에서 신부를 간택할 때 신부 아버지의 이름을 써놓은 방석을 두고 그 위에 신부가 앉게 했다.
모든 규수들이 아버지 이름을 찾아 방석에 앉았으나 정순왕후는 홀로 주저하고 있었다.
영조가 그 이유를 묻자 부친 이름이 적혀 있기 때문에 차마 앉을 수 없다고 대답했다.
이어 신부 후보감을 둘러싸고 면접 심사가 이어졌다.
영조가 세상에서 가장 깊은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어떤 신부는 산이 깊다, 어떤 신부는 물이 깊다,
어떤 신부는 구름이 깊다고 대답했다.
정순왕후는 ‘인심(人心)’이란 답으로 영조를 비롯한 왕실 심사관을 놀랍게 했다.
사람 마음은 측량하기 어렵다는 것이 인심이라고 답한 이유였다.
이어 꽃 중에서 무엇이 제일 예쁜지를 물었다.
왕비 후보들은 저마다 복숭아꽃, 매화꽃, 모란꽃과 같이 자신이 좋아하고 예뻐하는 꽃의 이름을 댔다.
정순왕후의 대답은 이번에도 달랐다. 목화꽃이라 답했다.
그 이유를 묻자 다른 꽃들은 일시적으로 좋은 데 불과하지만 목화는 솜을 만들어 많은 사람을 따뜻하게 해줄 수 있다고 했다.
영조는 어린 신부의 총명함에 고개를 끄덕였다.
왕비를 간택한 날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영조는 후보자들에게 기습 질문을 던졌다.
궁궐의 행랑(行廊) 수가 얼마인지를 알아보라고 한 것. 모두들 당황하면서 궁궐 지붕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정순왕후만이 홀로 머리를 내리고 침묵하고 있었다. 모두가 긴장하는 순간이었다.
영조가 “너는 그 수를 알아봤느냐”고 묻자,
정순왕후는 “처마 밑으로 떨어지는 물줄기를 보면 행랑의 수를 알 수 있습니다”라며 정확한 숫자를 답했다.
‘대동기문’에는 정순왕후의 강한 성격을 알 수 있게 하는 일화도 함께 소개돼 있다.
삼간택에서 왕비로 간택된 뒤 왕실에서 입을 옷을 맞추기 위해 왕비 후보의 몸 치수를 쟀다.
상궁은 옷의 치수를 재기 위해 정순왕후에게 잠시 돌아서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정순왕후는 추상같은 어조로 상궁을 쏘아보며 말했다. “네가 돌아서면 되지 왜 나를 돌아서게 하는가.”
정순왕후는 19세기 세도정치가 시작되자 그 중심에 서면서 여주(女主)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지혜로움 속에 내재했던 강한 캐릭터.
이것이 정순왕후의 본모습이 아니었을까?
왕비의 간택 이후 육례(혼례에 필요한 여섯 가지 예법)가 거행됐다.
6월 13일 진시(오전 8시경)에 영조는 창경궁 명정전에 나아가 신부에게 청혼을 하는 의식인 납채(納采)를 행했고,
신부 집에 예물을 전달하는 납징(納徵)은 6월 17일 행해졌다.
영조는 원유관과 강사포 차림으로 명정전에 나와 의식을 치른 후 사신을 신부 집으로 보냈다.
혼례식 날짜를 알리는 고기(告期)는 6월 19일에 이뤄졌으며,
왕이 친히 왕비를 맞이하는 친영(親迎) 날짜는 6월 22일로 정했다.
6월 20일엔 신부를 왕비로 책봉하는 책비(冊妃)를 명정전에서 치렀다.
육례 중 오늘날 결혼식장에서 하는 결혼식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친영이다.
친영은 영조가 어의동 별궁에서 왕비 수업을 받고 있는 정순왕후를 친히 창경궁 통명전으로 모셔오는 의식이었다.
이로써 공식적인 혼례식은 끝났고,
신하들 하례를 받은 영조는 가례도감 관원과 행사 참여 장인(匠人)에게 상을 내렸다.
혼례식이 끝난 후인 7월 15일 영조는 정순왕후와 함께 종묘에 나아가 왕실 조상에게 인사를 하는 묘현례(廟見禮)를 행했다.
영조는 생전에 두 명의 왕비를 뒀다.
한 명은 달성 서씨인 정성왕후 서씨였고, 다른 한 명이 정성왕후 사후에 계비로 들어온 정순왕후(1745~1805년)였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 영조는 세상을 떠난 뒤 누구와 함께 무덤에 묻혔을까?
13세에 혼인해 50년을 함께했던 정성왕후였을까,
아니면 66세의 영조에게 15세 꽃다운 나이에 시집와 영조의 말년을 행복하게 해준 정순왕후일까.
조선의 최장수 왕이자 가장 오랜 집권 경력을 가진 왕 영조의 무덤 조성은 어느 왕의 무덤 조성보다 중요하게 인식됐다.
영조 왕릉을 조성한 주체는 다음 왕 정조.
정성왕후는 1704년 2살 어린 연잉군(후의 영조)과 혼인했다.
혼인 당시 영조는 숙종의 4번째 왕자에 불과했지만,
경종이 몸이 약하고 후사가 없자 1721년 세제에 봉해졌고 정성왕후는 세제빈(世弟嬪)에 올랐다.
1724년 영조 즉위 후, 정성왕후는 왕비가 됐다.
1757년 정성왕후가 사망하자 영조는 부인의 무덤을 현재의 경기도 고양시 서오릉 내에 조성하고 홍릉(弘陵)이라 했다.
이곳은 영조 부친인 숙종 명릉(明陵) 오른쪽 산기슭. 영조가 자신이 사망한 후 아버지 곁에 갈 뜻을 분명히 한 것이다.
무덤 옆자리를 비워놓은 것은 후대에 반드시 이곳에 묻히겠다는 영조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었다.
영조의 뜻을 따라 영조 무덤은 숙종 무덤 옆이자 정비 무덤 곁에 조성하기로 결정됐다.
그러나 이는 영조 사후 불과 한 달 후에 뒤집혀진다.
정조는 홍릉 주변을 비롯해 영조 무덤으로 적합한 곳을 찾아보도록 했지만, 왕릉은 쉽게 결정되지 않았다.
정조는 다른 곳을 찾아볼 것을 지시했다.
영조 무덤이 원래 예정지인 정성왕후의 홍릉이 아닌 동구릉 경역 내에 정해진 것은
정조 때까지 생존해 있던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때문이었다.
홍릉 빈자리에 영조의 무덤을 정하면 정순왕후는 사후에 홀로 묻힐 가능성이 컸다.
정조는 영조와 정순왕후, 두 사람의 생전 인연과 대비가 된 정순왕후 입장을 고려해 영조의 무덤을 정성왕후 곁에 잡지 않았다.
결국 영조의 무덤은 태조 무덤인 건원릉 일대가 가장 적합하다는 의견이 모아졌고,
건원릉 서쪽 두 번째 산줄기로 결정됐다. 정조는 1776년 4월 10일 조정 회의에서 영조의 능호를 ‘원릉(元陵)’으로 정했다.
29년 후인 1805년(순조 5년) 정월 12일 정순왕후가 창덕궁의 경복전(景福殿)에서 승하했다.
순조 즉위 후 정순왕후는 왕실의 최고 어른으로 수렴청정을 했고,
신유박해라는 천주교 박해를 주도하면서 폭풍 정국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정순왕후가 승하한 후 왕릉의 간심(看審·조사를 하고 살펴봄)이 이뤄졌는데,
이미 정해져 있는 듯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순조는 당연히 영조의 능인 원릉의 옆자리를 첫 번째로 간심하도록 했다.
간심에 참여한 사람들 모두가 다른 곳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길지라고 보고했다.
영조의 산릉 자리를 정할 때 오래도록 정하지 못해 정조가 초조해하던 상황과 비교된다.
원래 정성왕후의 무덤인 홍릉 옆에는
영조가 나중에 묻힐 자리가 마련돼 있었지만 영조의 능은 태조의 건원릉 경역 내에 마련됐고
다시 그 옆에 정순왕후 능이 조성됨으로써 영조와 그의 계비 정순왕후는 나란히 함께 묻히게 됐다.
정순왕후는 정비인 정성왕후를 제치고, 29년 만에 영조 곁으로 돌아와 영조와 마지막을 함께하는 행운을 잡은 것이다.
현재 서오릉 경역에 자리를 잡은 정성왕후의 홍릉은
시아버지인 숙종과 4명의 시어머니인 인경왕후·인현왕후·인원왕후와 장희빈의 무덤 주변에 둘러싸여 있는 형국이다.
50년을 해로했건만 사후에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는 정성왕후의 모습이 애처롭기도 하다.
이에 비해 51세의 나이 차를 극복하고 남편 영조의 곁에서 영원히 잠들어 있는 정순왕후의 무덤은 사후까지 지속되는
영조와 정순왕후의 사랑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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