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의 즉위와 개혁정치의 산실 규장각
복수(사도세자) 대신 화합 선택하고 개혁 고삐 당겨
정조(1752~1800년, 재위 1776~1800년)는 세종과 함께 조선을 대표하는 개혁 군주로 기억된다.
하지만 정조에게는 지울 수 없는 상처가 있었다. 바로 아버지 사도세자의 비극적인 죽음이다.
영조에 의해 아버지가 죽어가는 현장에 있었던 11세의 정조. 그날의 참변이 결코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을 터다.
사실 정조가 왕위에 오르는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노론의 집요한 반대가 있었기 때문.
사도세자의 죽음에 깊이 관여한 노론 벽파 세력들은 정조가 왕위에 오르면 생길지도 모를 엄청난 정치적 후폭풍을 염려했다.
온갖 방해를 일삼았지만 정조는 이를 극복했다.
이 과정에서 노론벽파가 껄끄럽긴 정조도 마찬가지. 정조는 세손 시절 항상 갑옷을 입고 잠자리에 들었다고 한다.
궁궐에 자객이 들어올 정도로 신변의 위협을 느낀 탓이다.
정조가 세손 시절 머물렀던 거처는 존현각(尊賢閣)이었고, 영조는 경희궁에서 승하했다.
정조는 1776년 3월 경희궁에서 즉위식을 올린 후 한동안 경희궁 흥정당에 머물렀다.
‘정조실록’에는 정조 즉위 직후인 1776년 7월 경희궁에 ‘도둑’이 들었다는 사실이 기록돼 있다.
그만큼 정조 초기 왕에 대한 경호는 부실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정조는 그해 8월 6일 거처를 경희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겼다.
개혁 정치를 수행하긴 창덕궁이 적합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정조는 즉위 후 영조의 탕평 이념을 계승해 탕평책을 바탕으로 한 왕권 강화에 힘을 기울였다.
이것은 ‘성왕론(聖王論)’이라는 새로운 정치이념으로 자리 잡았다.
성왕론은 왕을 정치의 핵심 주체이자 적극적인 정치가로 보는 입장.
붕당(朋黨)이 공론 형성과 관련된 본래의 기능을 상실하고 각 당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전위 조직으로 전락했다는
부정적인 붕당관에서 나온 정치이념이다.
정조는 자신을 정치가이자 성왕으로 이해하면서 중국의 성인 군주인 요, 순, 우 삼대 제왕을 모범으로 삼고
왕 중심의 개혁 정치를 강력하게 추진할 의지를 비춘 것이다.
왕권을 위협하는 세력도 견제하기 시작했다.
우선 자신의 즉위에 누구보다도 든든한 힘이 됐지만 권력을 함부로 휘두르며 파벌을 만들었던 홍국영을 축출했다.
왕권 강화에는 외척도 예외일 수 없었다.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고 있던 외종조부 홍인한(洪麟漢)을 사사(賜死)하고 그를 뒷받침했던 상당수 인물도 극형에 처하면서
왕권 강화의 기반을 조성했다.
하지만 사도세자 죽음에 관여한 인물에 대한 정치적 보복은 최대한 자제했다.
정조는 즉위 직후인 1776년 6월 창덕궁 후원의 중심 공간에 규장각(奎章閣)을 세우고 개혁 정치의 중심 공간으로 삼았다.
세종이 집현전을 설치한 것과 유사한 방식이었다.
규장각은 세조 때 이미 양성지에 의해 만들어졌으나,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다.
숙종대에 이르러 비로소 종정시(宗正寺)에 작은 건물을 별도로 지어 ‘규장각’이라 쓴 숙종의 친필 현판을 걸고
역대 왕들의 어제(御製)나 어필(御筆) 등 일부 자료를 보관하는 장소로 삼았다.
이후 유명무실했던 규장각은 정조의 개혁 정책을 뒷받침하는 핵심 정치 기관으로 재탄생했다.
규장각의 위치도 남다르다.
정조는 즉위 후 처소를 본궁인 창덕궁으로 옮기면서 창덕궁에서 경관이 가장 아름다운 영화당 옆 언덕을 골라 2층 누각을 짓고
어필로 ‘주합루(宙合樓)’라는 현판을 달았다.
이곳 1층에 역대 선왕이 남긴 어제, 어필 등을 보관하게 했는데, 이곳이 바로 규장각이다.
정조는 당파나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젊고 참신한 능력 있는 젊은 인재를 규장각에 모았다.
정약용 등 당대를 대표하는 학자들이 함께 규장각에 나와 연구하면서 정조 개혁 정치의 파트너가 됐다.
이후 규장각은 조선 후기 문화 중흥을 이끌어가는 두뇌 집단의 산실로 거듭난다.
특히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서이수와 같은 서얼을 적극 등용한 점이 주목된다.
규장각의 가장 중요한 업무는 역대 왕의 글이나 책을 정리하고 이것을 바탕으로 개혁 정치의 방향을 설정하는 것.
‘법고창신(法古創新·전통을 본받아 새것을 창출한다)’은 규장각을 설립한 취지에 가장 부합되는 정신이었다.
규장각은 점차 역대 왕들의 업적을 토대로 새로운 정책을 만들어내는 작업을 통해 권력의 핵심 기관으로 자리 잡았다.
정조는 규장각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 당대 최고 인재를 발탁했을 뿐 아니라,
아무리 관직이 높은 신하라도 함부로 규장각에 들어올 수 없게 함으로써 외부의 정치적 간섭을 배제했다.
‘객래불기(客來不起·손님이 와도 일어나지 말아라)’와 같은 현판을 직접 내려 규장각 신하들이 학문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때로는 정조 자신이 몸소 그들과 날이 새는 줄도 모르고 대화를 나누며 학문에 대해 토론했다.
규장각에서는 정조의 학문적 열정이 담긴 수많은 책이 편찬되기도 했다.
정조는 창덕궁과 같은 궁궐은 전쟁이나 약탈의 위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판단해
국방상 안전지대인 강화도에 규장각의 지방 분소 격인 외규장각(外奎章閣) 건립을 명했다.
1782년(정조 6년) 2월 외규장각 완공을 알리는 강화유수의 보고가 올라왔고,
이를 계기로 외규장각에서 왕실의 주요 자료가 보다 체계적으로 관리됐다.
이후 100여년간 외규장각은 왕실 문화의 보고(寶庫)로 자리를 잡는다.
1784년에 편찬된 ‘규장각지(奎章閣志)’에 따르면, 외규장각은 6칸 크기의 규모로 행궁(行宮)의 동쪽에 자리 잡았다.
외규장각은 정조 이후 그 위상이 점점 커졌다.
역대 왕의 저술과 어필을 비롯해 국가 주요 행사 기록을 담은 의궤,
지도 등 조선 후기 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를 보관해왔다.
하지만 정조대의 영광을 뒤로하고,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의 침공으로 외규장각은 철저히 파괴됐다.
강화도에 주둔했던 프랑스군은 조선군의 강렬한 저항으로 퇴각하면서 외규장각에 보관됐던 책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특히 그들의 눈을 자극한 것은 채색 비단 장정에 선명한 그림으로 장식된 왕이 친히 열람한 의궤 즉, ‘어람용 의궤’였다.
프랑스군이 약탈해간 외규장각 소장 어람용 의궤 297책은 오랜 기간 파리국립도서관에 보관돼 있었다.
1990년대 이후 치열하게 전개된 우리의 문화재 반환 운동 노력의 결과 2011년 4월 마침내 국내로 반환됐다.
145년 만에 돌아온 외규장각 의궤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규장각에는 규장각 신하들이 모여 연구하는 규장각 이외에 여러 부속 건물이 있었다.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 근처에 사무실에 해당하는 이문원(摛文院)을 뒀고,
역대 왕의 초상화와 어필 등을 보관한 봉모당(奉謨堂),
국내의 서적을 보관한 서고(書庫)와 포쇄(曝曬·서책을 정기적으로 햇볕이나 바람에 말리는 작업)를 위한 공간인 서향각(書香閣),
중국에서 수입한 서적을 보관한 개유와(皆有窩), 열고관(閱古觀), 그리고 휴식 공간으로 부용정이 있었다.
개유와와 열고관에는 중국 측 2만여 책을 분류, 보관했다.
정조는 1781년 서호수로 하여금 그 중국본 도서를 정리해 ‘규장총목(奎章總目)’이라는 중국본 도서목록을 만들도록 지시했다.
정조는 젊은 관리가 규장각에서 재교육을 받는 제도인 초계문신(抄啓文臣)제도를 신설했다.
이미 과거를 거친 사람 가운데 37살 이하의 젊은 인재를 뽑아 3년 정도 특별 교육을 시키는 제도다.
이들은 매월 두 차례에 걸쳐 시험을 치르는 등 강도 높은 교육을 받으며 정조 개혁 정치의 방향을 학습했다.
초계문신제도는 1781년 시작돼 정조가 사망한 1800년까지 19년 동안 10여차례에 걸쳐 이뤄졌다.
이 제도는 정조의 친위세력을 양성하는 정치적 장치기도 했다.
초계문신은 정조 5년, 16명을 선발한 것을 시작으로 정조 말년인 24년까지 10회에 걸쳐 모두 138명이 선발됐다.
정약용, 서유구 등 대표적인 실학자들은 모두 초계문신을 거쳐 성장했고,
상당수 남인이나 북인계 인물까지 초계문신에 뽑혀 정조의 개혁 정책을 뒷받침했다.
‘정조실록’에는 초계문신에게 자주 친시(親試)를 보이고,
시험 후에는 시상을 했던 정조의 모습이 자주 기록돼 있다.
초계문신제도를 통한 관리 재교육 시스템은 정조의 정치와 학문 이념을 전파시키는 주요한 통로가 됐다.
‘죄인의 아들’이라는 큰 짐을 지고 왕위에 올랐지만,
복수의 정치 대신 ‘탕평’의 정치를 택한 정조.
학문 연구에 바탕을 두고 개혁 정치의 방향을 잡았기 때문에 정조 시대는 영조와 더불어 18세기
정치, 문화의 중흥 시대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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