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 이야기

정조가 화성(華城)을 지은 이유 -30

 

정조가 화성(華城)을 지은 이유

사도세자 추모와 신도시 건설 '一石二鳥'

 

 

건물로 꼽힌다.

 

 

화성을 구성하는 각각의 건축물은 저마다 특징을 지니면서 화성의 가치를 높여준다.

화성은 1997년 12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될 정도로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정조 개혁정치의 상징으로 평가받는 수원 화성. 정조가 화성 건설을 통해 보이고자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정조는 즉위 후 탕평책을 통해 죄인의 아들이라는 명분상 약점을 극복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데 힘썼다.

아울러 사도세자의 복권 작업을 적극 추진했다.

즉위 직후 사도세자의 위호를 장헌세자로 바꿨으며,

창경궁 바로 옆에 사도세자를 모신 사당인 경모궁(景慕宮)을 조성했다.

 

경모궁의 연혁과 제사 절차를 기록한 ‘경모궁의궤’를 편찬한 것도 아버지에 대한 효를 다하기 위함이었다.

사도세자 추숭(죽은 사람을 기리며 숭상함)의 핵심 사업은 화성 건설이었다.

1789년 7월 정조는 박명원의 제안에 따라 사도세자의 무덤을 수원 읍치로 옮길 것을 결정했다.

아버지 무덤을 옮기는 대신 기존에 거주하던 주민은 신도시 화성으로 이주시켰다.

화성 건설은 아버지 추숭을 넘어 화성을 군사도시, 농업과 상업의 중심 도시로 만들고자 하는 정조의 의지가 담긴 계획이었다.

더불어 부친의 무덤을 옮기는 일로 백성에게 피해가 없도록 애쓴 정조의 모습이 드러난다.

 

사도세자의 무덤은 양주 배봉산 일대(현재의 서울시립대)에 있었다.

원래 이름은 수은묘(垂恩廟)였지만, 정조 즉위 후 묘 대신에 원(園)의 칭호를 써서 영우원(永祐園)이라 했다.

다시 영우원을 수원으로 옮긴 뒤 정조는 새 무덤의 이름을 현륭원이라 했다.

 

1793년 6월 정조는 그와 채제공(조선 후기 문신)만이 알고 있던 비밀서류인 ‘금등(金縢)’을 공개했다.

원래 금등의 금은 쇠의 뜻이며, 등은 끈 또는 봉한다는 뜻이다.

금등은 ‘진심이 담겨 있는 비밀서류’를 뜻하는 용어.

당시 금등엔 영조가 사도세자의 처벌을 후회한다는 내용의 문서가 보관돼 있었다.

정조가 금등을 공개한 이유는 다름 아니다.

영조와 사도세자 두 사람 관계에 허물이 없었음을 만천하에 알리기 위함이었다.

금등의 공개는 사도세자의 복권 사업과 깊은 연관이 있었다.

 

1794년, 정조는 수도권 남쪽 요충지인 수원에 화성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정조는 사도세자가 비극적인 죽음을 당한 까닭에 무덤도 제대로 조성되지 않고 그 터가 좋지 않은 것을 늘 불편해했다.

 재위 15년이 지난 시점에서야 천하의 명당이라는 화산(花山) 아래로 무덤 옮기는 작업을 펼쳤다.

1793년(정조 17년)에 정조는 수원이란 이름을 ‘화성’으로 고치고, 이곳에 유수부(留守府)를 설치했다.

 

유수부란 지방 도시에 중앙의 고관을 파견해 다스리게 한 것으로 오늘날의 직할시 개념이다.

조선 시대에는 화성 이외에 개성, 강화, 광주에 유수부가 설치됐다.

서울을 중심에 두고 4개 도시로 둘러싸인 형국이다.

 

1793년 1월 12일 정조가 수원을 유수부로 승격한 날

정조실록에는 ‘수원이 정조가 사도세자를 위해 조성한 도시’임이 분명히 나타나 있다.

“수원부는 현륭원 자리를 마련한 뒤로부터 더욱 중요해졌다.

아름다운 이 자연의 요해처에 달마다 꺼내 볼 사도세자의 의관(衣冠)을 길이 봉안하리라.

미리 행궁을 세워 먼저 우러르고 의지하는 생각을 붙였고, 영정을 그려 걸어서 모든 정성을 대신하니,

어린애처럼 어버이 사모하는 마음이 가슴에 북받쳐 올라 절제할 줄을 모르겠다.

매년 300일 동안을 하루도 빠짐없이 손꼽아 기다리고 바라던 것이 오로지 예를 행하는 하루 동안에 있었기에,

이미 배알을 마치고 환궁하는 길에 수원부의 경계가 다하는 고갯마루에 거가를 멈추고 우러러 바라보며 머뭇거리노라면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더디어지곤 했다.”

 

위의 기록에서 정조가 부친을 그리워해 발걸음을 멈춘 고개는 ‘지지대(遲遲臺)’ 고개로 명명됐다.

1794년의 화성 축성은 화성의 유수부 설치 이후 나온 조치다.

정조의 안정된 왕권과 절정에 이른 조선 왕조의 역량을 모두 쏟아부은 대공사였다.

화성 건설 공사에 투입된 인원은 연 70여만명, 공사비는 80만냥에 이른다.

 당초 공사 기간은 5년으로 예상됐지만 실제로는 절반 수준으로 대폭 단축됐다. 공사에 참여한 장인에게 품삯을 준 덕분이다.

 

화성 공사가 끝난 1796년, ‘화성성역의궤’라는 공사 보고서가 활자로 간행됐다.

오늘날 화성을 완벽히 복원할 수 있었던 데는 화성 건축의 시말을 완벽하게 정리한 화성성역의궤가 있었기 때문이다.

화성성역의궤는 정조가 화성 성곽을 축조한 뒤 그 공사에 관한 일체의 내용을 기록한 책이다.

대부분의 의궤가 필사본으로 작성된 것과는 달리 이 의궤는 활자본으로 제작됐다.

국가의 주요 사업에 대한 정조의 국정 홍보 의지를 읽어볼 수 있는 대목이다.

 

화성성역의궤는 80만냥이란 거금을 투입한 대공사의 종합 보고서였으므로, 다른 의궤에 비해 분량이 많은 편이다.

또한 조선왕조의 문예부흥기인 정조대,

그중에서도 가장 전성기에 속하는 1790년대에 만들어진 책이므로 내용이 상세하고 치밀하다.

 

화성성역의궤는 권수(卷首) 1권, 본문 6권, 부록 3권을 합해 총 10권 9책으로 구성돼 있다.

권수에는 화성성역의궤의 체제를 설명한 범례, 화성을 건설하고 의궤를 편찬하며 인쇄하는 데 참여한 인원 명단 등이 기록돼 있다.

화성의 전체 모습을 그린 화성전도(華城全圖),

정조가 수원 행차 때 머물렀던 행궁, 장안문, 팔달문, 창룡문, 화서문 등 화성의 4대문, 비밀통로인 암문(暗門),

횃불을 올려 신호를 주고받았던 봉돈(烽墩) 등 성벽에 설치된 모든 시설물의 그림도 함께 담겼다.

 

1975년에 정부가 화성 성곽의 복원 공사를 시작해

불과 3년 만에 원형에 가깝게 복원할 수 있었던 것도 이 그림과 기록에 힘입은 바가 컸다.

 

화성의 역사에는 벽돌을 적극적으로 사용했다.

박지원, 박제가 등은 청나라의 발달된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자는 북학론(北學論)을 주장한 학자다.

이들이 청나라에서 도입하자는 문물 중엔 벽돌이 포함돼 있었다.

벽돌은 견고해 오래 견딜 뿐 아니라 규격이 일정하기 때문에 작업하기 수월하다는 이유에서였다.

화성의 4대문을 비롯한 주요 건축물은 벽돌을 사용했으며 성벽의 몸체는 종래와 같이 화강암을 사용했다.

 

화성 건설에는 또한 과학적 원리를 이용한 새로운 기계도 큰 몫을 했다.

정약용이 ‘기기도설’을 활용해 제작한 거중기는 도르래 원리를 이용해 성곽 공사에 필요한 무거운 돌을 효율적으로 운반했다.

유형차라는 수레도 긴요하게 활용됐다.

화성 건설은 18세기 후반 이후 새롭게 수용된 과학 사상을 수용하는 시험장과 같은 역할을 했다.

 

이외에도 화성성역의궤 본문에는 행사와 관련된 국왕의 명령과 대화 내용,

성을 쌓는 데 참여한 관리와 장인에게 준 상품, 각종 의식의 절차, 장인 명단이나 공문서 등이 자세히 수록돼 있다.

본문에서 보이는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철저한 기록이다.

장인 명단에는 공사에 참여한 1800여명의 기술자 명단이 직종별로 정리돼 있다.

 최무응술(崔無應述), 안돌이(安乭伊), 유돌쇠(柳乭金), 강아지(姜岳只) 등과 같이 일반 평민 이름도 많이 보인다.

큰 놈, 돌쇠처럼 지금도 친근한 우리식 이름이 조선 시대에도 사용됐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름 밑에는 근무한 일수를 계산해 임금을 지급한 내용도 나타난다.

국가의 공식 기록에 천인 이름까지 기록한 것은 인부들에게 국가적 사업에 책임감과 사명감을 갖게끔 유도한

정조의 전략적 결정이었다.

일반 백성에게 최대한 동기를 부여해 그 성과를 함께 나눴다는 사례로도 주목받는다.

 

정조의 화성 건설은 사도세자에 대한 명예 회복이란 뜻이 간절히 담겼다.

할아버지에 의해 비명에 죽은 아버지.

아버지의 죽음 때문에 왕위 즉위 과정에서 숨을 졸였던 정조는

 아버지의 무덤을 자신이 계획도시로 건설하고 싶어 했던 수원에 조성했다.

화성에는 새로운 공법이 적용되는 도시, 군사와 농업·상업이 발전한 도시로 만들고자 한 정조의 꿈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현재 수원은 정조를 기억하지 않고는 성립할 수 없는 역사와 문화의 도시가 됐다.

올해는 마침 정조의 화성 축성 220주년이 되는 해.

수원시는 올해를 ‘수원 화성 방문의 해’로 삼고 대대적인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날도 좋은 요즘, 수원 화성을 찾아 아버지를 끔찍이 생각했던 정조의 숨결을 느껴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