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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

영조의 청계천 준천 사업 -25

 

영조의 청계천 준천 사업

"100년 홍수 막겠다" 위민(爲民) 철학 담겨

 

 

2005년 많은 논란 끝에 복원된 청계천.

청계천은 조선시대 집권자의 통치력과도 그 궤를 같이한다.

 

태종은 1406년 처음으로 청계천 골격을 만들었으며 1760년 영조는 본격적인 청계천 준천 사업을 펼쳤다.

 영조는 왜 이 사업을 시작했을까.

청계천은 이제 서울 시민들에게 휴식과 안정을 주는 대표적인 공간이 됐다.

청계천은 조선이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후 도시 정비 과정에서 새롭게 준설한 인공하천이었다.

 

한양은 전통적으로 홍수에 취약한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북악산이나 인왕산, 남산 등에서 내려와 청계천에 모인 물이 남산에 막혀 바로 한강으로 빠져나가지 못했기 때문에

비가 많이 오면 한양 도심은 홍수 피해로 몸살을 앓았다.

 

1399년 정종대에 개성으로 잠시 도읍을 옮겼지만,

1400년 왕이 된 태종은 1405년 다시 한양으로 재천도하면서 한양을 관통하는 인공하천 준설을 지시했다.

태종은 1406년 1월 처음 공사를 실시해 1412년 공사가 끝났다.

 

사실 청계천이라는 용어는 ‘조선왕조실록’에는 등장하지 않는 개념이다.

태종대 ‘천거(川渠)를 수리해 열었다’는 뜻에서 ‘개천(開川)’이라 불렸고,

이후 ‘개천’이라는 말은 하천과 통용되는 보통명사가 됐다.

실록을 비롯해 ‘동국여지승람’이나 ‘준천사실’ ‘한경지략’ ‘동국여지비고’의 기록에는 모두 개천(開天)으로 표기돼 있다.

청계천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영조 때 본격적인 준천 사업이 이뤄져 ‘개천을 깨끗이 치웠다’는 뜻의 ‘청개천(淸開川)’이 되고,

다시 ‘청계천(淸溪川)’으로 바뀌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태종 뒤를 이은 세종 역시 청계천에 관심을 가졌지만, 이후 300여년이 지나도록 본격적인 준천 사업으로는 이어지지 않았다.

태종 뒤를 이어 청계천 준천 사업에 눈을 뜬 왕이 바로 영조였다.

영조가 준천 사업에 관심을 보인 데는 사회적인 변화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상업 발달에 따라 농촌 인구가 도시로 집중하면서

이들이 버린 오물이나 하수로 청계천은 점차 하수 배출의 기능을 잃어갔다.

인구 증가로 인해 성안의 벌채가 심해지면서 토사가 청계천을 메워 홍수 피해의 우려는 한층 심각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영조는 청계천 준천 사업을 통해 한양의 홍수 피해를 방지하는 한편 도시화가 진전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실업자에게 일자리를 만들어주고자 했다.

 

영조 시대 청계천 공사에 관해서는

‘영조실록’을 비롯해 ‘승정원일기’, 영조가 청계천 공사를 완료한 후에 쓴 ‘준천사실’ 등의 기록물에 자세히 정리돼 있다.

이 기록에는 청계천 공사의 추진 배경과 청계천 공사 찬반 논쟁,

공사의 구체적인 과정, 공사 이후의 보상 등 청계천 공사에 얽힌 다양한 내용이 정리돼 있다.

 

조선 후기 영조대에 이르러 청계천이 거의 평지와 같이 되는 상황이 초래되면서 본격적인 준천 사업이 요구됐다.

하지만 아무리 필요성이 인정돼도 국가 재정이나 사업 수행 능력이 선행되지 않으면 대규모 국책 공사 수행은 쉽지 않았다.

조선 후기 영조대는

정치, 경제, 사회 전 분야에서 새로운 경장(更張·해이해진 제도를 다시 한 번 개혁하는 것)의 필요성이 대두된 시대였다.

 

1760년 재위 36년이 되는 시점에

영조는 정치적 안정을 바탕으로 국가 역량을 총동원하는 준천 사업을 실행에 옮겼다.

영조는 준천 사업을 통해 당시 도시로 유입돼 실업자가 된 사람에게 일자리를 만들어주고, 청계천을 정비해 홍수에 대비하며

보다 쾌적한 도시를 만들고자 했다. 청계천 준천 사업에 역부(공사장에서 삯일을 하는 사람)를 동원함과 동시에

일당 노동자를 고용한 것도 실업자 대책과 관련이 깊다.

 

영조의 대표적 참모였던 홍계희가 영조의 뜻을 받아 기록한 ‘준천사실’ 서문에는

 “큰일과 중요한 일은 비록 거론할 수 없으나 그 가운데서 보수하고 보충해야 할 곳은 감히 게을리할 수 없다.

준천과 같은 일은 백성을 동원하지 않을 수 없고, 또한 백성을 돌아보지 않을 수도 없다”고 명시됐다.

청계천 준천이 국가의 최우선 사업임을 강조한 것이다.

 

아울러 영조는 “나는 백성들에게 혜택을 주지 못했으니 무슨 마음으로 백성을 괴롭히겠는가?”라고 하면서

준천 사업이 백성에게 얼마나 부담을 주는지에 대해서도 세심한 신경을 썼다.

영조는 준천 사업의 필요성과 백성의 부담 증가를 적절히 해소하기 위해

조정의 관리와 재야 선비, 백성을 자주 만나면서 소통했다. 1752년에는 친히 광통교에 행차해 주민들에게 준천에 대한 의견을

 직접 물어봤다. 1758년 5월 2일에는 준천의 찬반 여부를 신하들에게 물으면서 구체적인 방안을 추진할 계획을 세웠다.

왕과 신하, 백성 간의 소통은 백성들의 적극적인 협조를 이끌어내는 계기가 됐다.

 

영조는 청계천 준천을 역대 중국의 주요 치수 사업과도 비교했다.

주나라 문왕의 영대(靈臺·임금이 올라가서 사방을 바라보던 대)나 하나라 우왕의 치수 사업을 가장 모범적인 사례로 제시하는 한편

백성을 착취한 은나라 주왕과 수양제의 사업은 결코 답습하지 않기를 다짐했다.

 

1759년 10월 6일 준천 공사 진행이 결정됐다.

준천을 담당할 임시 관청인 준천소(濬川所)가 설치됐고 홍봉한, 홍계희 등이 준천소 당상으로 임명됐다.

 한성부좌윤 구선복이 직접 현장에 가서 준천도(濬川圖)를 그려오면서 구체적인 사업이 시작됐다.

본격적인 준천 사업은 1760년 2월 18일에 시작돼 4월 15일 끝났다. 57일간의 공사 기간 동안에

21만5000여명의 백성이 동원됐는데, 도성의 백성을 비롯해 각 시전상인과 지방의 자원자, 승려 등 다양한 계층의 사람이 참여했다.

실업 상태의 백성 6만3000여명은 품삯을 받기도 했는데, 대략 공사 기간 동안 3만5000냥의 돈과 쌀 2300여석의 물자가 소요됐다.

 

영조의 준천 사업에 대한 의지는 1760년 2월 23일 ‘승정원일기’의 기록에 자세히 나타나 있다.

영조는 “나의 마음은 오로지 준천 사업에 있다”고 하면서 자신의 최대 역점 사업을 청계천 공사에 두고 있음을 신하들에게 알렸다.

이에 호조판서가 된 홍봉한은 “현재 금위영, 어영청 소속 군사들이 동원돼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고 보고했다.

영조는 가장 어려운 공사인 오간수문(五間水門) 공사를 6일 만에 끝낸 사실을 매우 흡족해했다.

홍봉한은 당시 맹인들도 부역에 참여하기를 희망한다는 보고를 했고, 영조는 모든 백성의 적극적인 협조를 치하했다.

영조의 준천 사업은 국가 사업으로 모든 백성이 적극 협력하는 과정에서 이뤄졌던 것이다.

 

마침내 공사가 완성되고 공사의 전말을 기록한 ‘준천사실’이 편찬됐다. 책 제목도 영조가 직접 정했다.

영조는 공사 책임자인 홍봉한에게 “준천한 뒤에 몇 년이나 지탱할 수 있겠는가”라 물었고

홍봉한은 “그 효과가 100년은 갈 것이다”라고 답해 공사에 대한 자신감을 표현했다. 이어 구선행 등이 굴착이 끝난 후

각 다리에 표석을 만들 것을 건의했고, 영조는 표석에 ‘1760년 지평’이란 뜻의 ‘경진지평(庚辰地平)’ 네 글자를 새기게 했다.

 

1760년에 공사가 완성됐음을 표시함과 함께 항상 이 네 글자가 보일 수 있게 했다.

더 이상 청계천에 토사가 쌓이지 않도록 하고,

만약 한 글자라도 파묻히면 후대의 왕에게도 계속 준천할 것을 당부하겠다는 의지였다.

 

공사 기간 동안 영조는 친히 동대문에서 공사를 독려했으며,

공사 완성을 기념해 모화관에서 시재(試才·재주를 시험해봄)를 베풀어 경사를 자축했다. 또한 일을 감독한 사람들을 인솔해

연융대에서 연회를 베풀어주면서 이들의 노고를 치하했다.

 

당시 영조가 친히 공사 참여자들을 격려한 모습은 ‘준천계첩(濬川契帖)’에 담긴 그림으로 남아 있다.

‘준천계첩’에 그려진 네 폭의 그림에는 오간수문 아래에서 소와 쟁기를 동원해 흙을 파는 인부들의 모습 등

준천 사업의 현장 모습이 정밀하게 묘사돼 있다.

 

영조는 청계천 준천 사업은 균역법과 함께 “자신의 재위 기간 동안 이룩한 가장 중요한 사업”이라고 평가할 만큼 자부심을 보였다.

청계천 준천 사업을 추진해 영조는 도성 내의 백성들이 일상에서 겪는 홍수의 위협을 해소시키고

일부 도시 실업자를 구제할 수 있었다.

 

영조의 준천 사업은

1930년대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이 추진한 뉴딜정책보다 무려 170년 전에 추진된 사업이라는 점에서도 무척 큰 의미가 있다.

지금도 도시 중심부를 지나며 ‘서울’이란 도시의 상징으로 자리 잡은 청계천.

청계천에는 250년 전 위민(爲民)의 정치철학을 준천 사업으로 실천한 영조의 리더십과 왕에 적극 호응한 신하,

백성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