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의 즉위와 탕평책
어찌해 같은당파 사람을 다 죽인단 말인가
조선 후기 정치, 문화의 중흥을 이룩한 군주라는 점이다.
영조는 1694년 아버지 숙종과 무수리(궁중에서 청소 일을 맡는 여자종) 출신 후궁인 어머니 숙빈 최씨 사이에서 출생했다.
늘 신분적 콤플렉스에 시달렸던 영조는 왕세제 시절부터 당쟁의 중심에 있었다.
숙종 후반은 노론과 소론, 남인 간의 치열한 당쟁이 전개됐던 만큼 영조가 왕위에 오르는 과정 역시 순탄하지 못했다.
장희빈 소생의 이복형인 경종이 소론의 지원에 의해 왕위에 오른 후,
영조는 노론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았지만 왕세제 위치는 살얼음판 같았다.
경종이 즉위한 후 신임옥사가 발생하고 노론 4인방이 희생되면서 영조에게도 정치적 위기가 왔다.
한순간만 방심하면 차기 후계자에서 ‘역모의 중심’으로 목숨까지 날아갈 수 있는 상황에 몰리기도 했다.
하지만 경종이 갑자기 서거하면서 영조는 1724년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영조는 즉위 과정에서 당쟁의 참상을 뼈저리게 느꼈고, 왕위에 오른 후 취임 일성으로 강조한 것이 바로 탕평(蕩平)이다.
탕평은 국정의 기본 방향을 모든 당파가 고르게 참여하는 정책을 가리킨다.
사실 탕평에 대한 논의는 영조 이전인 숙종대 후반에도 박세채 등에 의해 제기됐다.
당파 사이 대립으로 정국이 어수선해지면서 해결책으로 탕평론이 제시된 것.
하지만 숙종이 시도한 탕평책은 명목에만 그쳤고 노론 중심으로 정국이 운영되면서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게다가 숙종은
왕권 강화 차원에서 정국 상황에 따라 한 당파를 일거에 내몰고 반대당에 정권을 모두 위임하는 편당적인 조처를 취했다.
숙종 말년에는 외척에 의존하는 경향이 두드러지면서 노론 중심의 독주가 계속됐다.
경종 시절에도 소론 온건파인 조문명 등은 왕세제인 영조를 보좌하면서 탕평의 필요성을 얘기했지만,
경종이 강력한 왕권을 행사할 수 없었기에 탕평책은 빛을 잃었다.
두 대에 걸쳐 제대로 실현되지 못했던 탕평책은 영조가 즉위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된다.
영조는 즉위하자마자 탕평을 국시(國是)로 내세우고 이를 널리 선언했다.
탕평에 대한 영조의 강한 의지는 1727년(영조 3년) 7월 4일 내린 하교에 잘 나타나 있다.
“아! 모든 신민은 모두 내 가르침을 들으라.
붕당(朋黨)의 폐해가 ‘가례원류(조선 현종 때 유계가 가례에 대한 글을 분류·정리한 책)’가 나온 뒤부터 점점 더해졌다.
아! 마음 아프다.
지난 신축년(1721년)과 임인년(1722년)의 일은 그 가운데 반역할 마음을 품은 자가 있기는 하나 다만 그 사람을 죽여야 할 뿐이지,
어찌해 한편의 사람을 다 죽인 뒤에야 왕법을 펼 수 있겠는가?
옥석을 가리지 않고 경중을 가리지 않아 한쪽 사람들이 점점 불평하게 하는 것은 이 또한 당습(黨習)이다. (중략)
이미 반포하고 알렸어도 전만 못하면 조정의 명령을 따르지 않은 죄로 다스릴 것이다.”
영조는 당쟁의 폐단을 강력히 지적한 뒤
“마땅한 인재를 취해 쓸 것이니,
당습에 관계된 자를 내 앞에 천거하면 내치고 귀양을 보내 국도(國都)에 함께 있게 하지 않을 것”이라며
“나의 마음이 이런데도 따르지 않는다면 나의 신하가 아니다”라고 탕평에 적극 호응할 것을 독려했다.
탕평이란 용어는 원래 유교 경전인 ‘서경’의 홍범 황극설에 나온
‘무편무당 왕도탕탕(無偏無黨 王道蕩蕩) 무당무편 왕도평평(無黨無偏 王道平平)’에서 비롯됐다.
그 연원은 오래됐지만 우리 역사에서 본격적으로 이를 정책화한 왕은 영조였다.
영조는 탕평책을 효과적으로 실시하기 위한 방안으로 당파를 가리지 않고 온건하고 타협적인 인물을 등용했다.
노론 강경파 준로(峻老)와 소론 강경파 준소(峻少)를 권력에서 배제하고, 온건파인 완로(緩老)와 완소(緩少)를 중용했다.
한편으로는 자신과 호흡을 맞출 수 있는 신하, 즉 탕평파 대신을 양성해 정국의 중심에 나서게 했다.
송인명, 조문명, 조현명 등이 대표적인 탕평파 대신으로 이들은 영조가 추진하는 탕평책의 든든한 후원군이 됐다.
영조의 탕평책은 1727년 탕평교서를 반포하고,
1742년 성균관에 탕평비를 건립하는 것으로 구체화됐다.
성균관에 탕평비를 세운 것은 앞으로 관료가 될 성균관 유생부터 당습에 물들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현재 성균관대 교정에 남아 있는 탕평비에는
‘주이불비 내군자지공심(周而不比 乃君子之公心) 비이불주 식소인지사의(比而不周 寔小人之私意)’라 해
‘편당을 짓지 않고 두루 화합함은 군자의 공평한 마음이요,
두루 화합하지 아니하고 편당을 하는 것은 소인의 사심이다’라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군자와 소인의 구분을 탕평과 편당에 두면서 ‘탕평’이 공(公)이자 바른 것임을 선언한 영조의 의지가 엿보인다.
영조 초반 의욕적으로 추진됐던 탕평책은
영조 4년인 1728년 이인좌, 정희량, 박필몽 등 소론과 남인 급진파 등이 일으킨 무신란으로 위기를 맞았다.
반란의 주도층은 선왕 경종의 억울한 죽음을 천명하면서 ‘의거(義擧·정의를 위해 큰일을 일으키다)’임을 선전했다.
탕평책을 추진했지만
여전히 노론 중심 정국 운영에 불만을 품은 정치 세력과 일부 백성이 동조하면서 반란군 규모는 커졌다.
반군 지도자 이인좌는 한때 청주성을 점령하면서 위세를 떨쳤으나 소론 출신 오명항이 이끄는 정부 토벌군에 의해 진압됐다.
무신란은 소론과 남인 급진파가 주도해 일으켰기에 영조는 반란 토벌 후 노론 중심의 정치체제를 끌고 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영조는 반란의 원인을 ‘조정에서 붕당만을 일삼아 재능 있는 자를 등용하지 않은 데 있다’고 파악하고
무신란을 탕평책을 더욱 공고히 추진할 계기로 삼았다. 아래의 기록은 영조의 이런 입장을 잘 보여준다.
“내가 덕이 부족한 탓으로
국가가 판탕(板蕩·국가가 어지러움)한 때를 당해 안으로는 조정의 모습을 평화롭게 하지 못하고,
밖으로는 우리 백성들을 구제하지 못해 간신이 흉악한 뜻을 함부로 행해 호남과 경기에서 창궐하게 만들었으니,
통탄함을 금할 수 없다. (중략) 그 하나는 조정에서 오직 붕당만을 일삼아 재능 있는 자의 등용을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색목(色目)만을 추중하고 권장하는 데 있다.
(중략) 또 하나는 해마다 연달아 기근이 들어 백성들은 죽을 지경에 처해 있는데도 구제해 살릴 생각을 하지 않고
오직 당벌(黨伐)만을 일삼는 것으로 불쌍한 우리 백성들이 조정이 있음을 모른 지 오래됐다.
백성이 적도(賊徒)에게 합류한 것은 그들의 죄가 아니요, 실로 조정의 허물이니 이 역시 당의(黨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이른바 하나도 붕당이요, 둘도 붕당이라는 것이다.”
영조는 백성들이 반란 세력에 합류한 일차적인 원인을 당쟁으로 판단하고
앞으로는 당(黨)과 사(私)를 옹호하는 마음 대신, 모두가 한마음으로 협력해 중흥의 기틀을 삼자고 호소했다.
무신란을 당파를 없애는 계기로 삼고자 하는 영조의 정치적 승부수가 보이는 장면이다.
무신란 이듬해인 1729년 영조는 기유처분(己酉處分·당파 간 의리를 가리지 않고 인재를 쓰겠다)을 통한 탕평을 반포했다.
“오늘의 역변은 당론에서 비롯된 것이니, 지금 당론을 말하는 자는 누구든 역적으로 처단하겠다”고
강경한 선언을 한 것 역시 탕평에 대한 영조의 확고한 의지를 잘 보여준다.
영조는 당쟁의 뿌리를 제거하기 위해 사림(士林) 등 유학자 집단의 정치 관여를 계속 견제했다.
은둔한 산림(山林)의 공론(公論)을 인정하지 않았고, 사림 세력의 본거지인 서원을 대폭 정리했다.
1741년 4월 8일 영조는 하교를 내려 팔도의 서원과 사묘(祠廟) 가운데 사사로이 건립한 것을 모두 없애고 이를 어길 경우
수령과 유생에게 엄한 처벌을 가하도록 했다.
52년 재위기간 동안 영조의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이 바로 ‘탕평’이다.
‘조선왕조실록’에서 ‘탕평’이란 용어가 총 477회 검색이 되는데,
이 중 영조대에만 343회 등장하는 것은 이 시대 대표 이념이 ‘탕평’이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영조가 탕평책을 적극 실천한 것은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각 분야에서 시대가 요구하는 다양한 정책을 수행하기 위함이었다.
영조 시대는 각 분야에서 이전 시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여러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게 가능했던 것은 정치적 안정을 추구한 탕평책이 밑바탕이 된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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