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희빈의 아들'
경종의 안타까운 운명
세자만 30년에 어렵사리 왕위 올랐지만
그러나 ‘장희빈의 아들 경종’이라고 하면 많은 이가 관심을 가진다.
사약을 받은 장희빈의 아들이 어떻게 왕이 됐을까.
사실 경종은 자신의 이름보다 장희빈의 아들이라는 굴레가 심하게 씌었던 왕이다.
왕으로 즉위하는 과정에서 어머니의 그늘 때문에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고,
즉위 후엔 노론과 소론의 격심한 당쟁을 헤쳐 나가야 했다.
1688년(숙종 14년) 10월 숙종이 그토록 고대했던 왕자가 태어났다.
첫 번째 왕비 인경왕후가 1680년 천연두로 사망하자 1681년 인현왕후를 계비로 들였으나 왕자의 소식은 없었다.
불안해진 숙종은 장희빈을 후궁으로 맞이했고,
장희빈은 왕실의 기대대로 왕자를 출산했다.
숙종은 왕자가 태어난 지 3개월 만인 1689년 1월 왕자의 이름을 정하고자 했다.
비록 후궁 소생이라도 일단 이름을 정하면 원자(元子)가 되고,
그렇게 되면 왕비가 왕자를 출산하더라도 원자는 세자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후계자를 빨리 세워 왕실의 안정을 꾀하고자 한 조치였지만 노론의 반대가 심했다.
노론은 계비인 인현왕후가 아직 23세밖에 되지 않은 상태라 적자 출산이 가능하다는 점을 들어 원자 지정을 반대했다.
더구나 인현왕후는 서인의 핵심 민유중의 딸이었다.
노론의 영수 송시열은 원자 정호(定號·이름을 정함)의 부당함을 알리는 상소를 거듭 올렸고,
숙종은 송시열을 제주도에 위리안치(가시로 울타리를 만들어 그 안에 가둠)시켰다.
원자 정호 문제는 서인과 남인의 치열한 당쟁으로 비화됐고,
숙종은 서인을 숙청하고 남인을 정계에 등장시키는 기사환국을 단행했다.
장희빈의 아들 경종의 후계 입지를 굳건하게 해준 것이다.
그러나 1694년(숙종 20년) 갑술환국이 일어나 남인이 정권에서 완전히 몰락하고 서인이 주도권을 잡으면서
경종의 입지는 다시 불안해졌다.
특히 1694년 인현왕후가 복위되고 장희빈이 폐출되면서 경종을 지지했던 숙종의 태도에도 변화가 왔다.
세자가 조금이라도 왕의 뜻을 거스르면 “장희빈의 소생이라 별수 없구나”라며 크게 꾸짖기도 했다.
장희빈에 대한 증오심이 세자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진 것이다.
게다가 장희빈은 1701년(숙종 27년) 인현왕후의 저주 사건을 계기로 사약을 받고 숨을 거뒀다.
장희빈의 죽음은 세자 경종에게 커다란 그림자로 다가왔다.
장희빈의 죽음을 적극 찬성했던 노론은 경종을 대신할 새로운 카드로
숙종의 후궁 숙빈 최씨 소생의 왕자 연잉군(영조)을 내밀었다.
숙빈 최씨는 인현왕후에 대해 끝까지 의리를 지킨 인물로 노론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숙종 후반기 노론과 정치적으로 대등한 위치에 서게 된 소론 또한 만만치 않았다.
이들은 세자 보호를 강력히 주장했고 경종의 왕위 계승에 힘을 실었다.
숙종이 세자를 불신하는 상황을 간파한 노론은 세자 제거에 나섰다.
세자로 하여금 대리청정(代理聽政)을 하게 하고 여기서 트집을 잡아 세자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는 전략을 세웠다.
1717년(숙종 43년) 노론의 핵심 이이명은 숙종과 독대(獨對) 시간을 가졌다.
정치의 투명성을 강조하는 당시 상황에서 왕과의 독대는 있을 수 없는 일.
두 사람의 독대 이후
숙종은 노론 대신들을 불러들인 자리에서 “안질이 심해 정사를 볼 수 없다”는 이유로 세자의 대리청정을 지시했다.
세자의 낙마를 간파한 소론은 대리청정을 강력히 반대했다.
소론 윤지완은 82세의 노구를 이끌고 대리청정을 미룰 것을 건의했지만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대리청정을 맡은 세자 경종은 흠잡을 데 없이 정국을 운영했다.
이미 노론에 포위된 사실을 감지하고 신중하게 행동한 덕분이다. 결국 숙종 사후인 1720년 6월, 경종은 어렵게 왕위에 올랐다.
1690년 3세의 나이로 세자의 자리에 오른 이래 30년 동안 힘겨운 세자 생활을 하면서 ‘최장기 세자’의 기록을 세운 왕이
바로 경종이다.
왕위에 오른 경종에게 노론의 위세는 반드시 넘어야 할 벽이었다.
노론 민진원이 쓴 ‘단암만록’에는 노론이 얼마나 경종을 무시했는지 잘 나타나 있다.
경종이 즉위한 1년 후인 1721년, 노론은 “경종의 건강 상태가 예측할 수 없고 더욱이 후사(後嗣)를 둘 희망이 끊어졌다”며
왕의 이복동생인 연잉군의 후계자 책봉을 주장하고 나섰다.
경종은 왕세자 시절인 1696년 9세에 단의왕후 심씨와 혼인하고
단의왕후의 사망 후인 1718년 31세의 나이로 선의왕후 어씨와 다시 혼인했지만 두 사람 사이에서 자녀를 한 명도 갖지 못했다.
그럼에도 1721년 당시 경종의 나이가 34세,
선의왕후가 17세였던 점을 고려하면 연잉군 세자 책봉은 경종 입장에서 매우 무례한 요구였다.
경종은 대신들을 불러 의견을 구했는데 공교롭게도 당시 모인 대신 모두가 노론이었다.
이들이 당연히 세자 책봉을 적극 찬성하자 경종도 어쩔 수 없이 이를 허락했다.
후계자 책봉이 결정되자 소론은 노론의 횡포에 반발하며 행동으로 나섰다.
소론의 영수 유봉휘는 “군부를 우롱하고 협박한 죄를 밝히지 않을 수 없다”고 상소했지만
오히려 노론의 탄핵을 받아 유배를 가야 했다.
노론은 연잉군이 후계자로 책봉되자
더욱 권력에 욕심을 내면서 왕세제(왕의 동생을 후계자로 삼는 경우)의 대리청정까지 요구했다.
경종은 소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세제의 대리청정을 허락했지만,
연잉군은 이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버텼다.
연잉군은 거듭 사양했고 10여일 사이에 대리청정 명령은 수차례 번복됐다.
후계자 문제를 둘러싼 노론과 소론의 힘겨루기가 그 어느 때보다 치열했음을 알 수 있다.
왕세제의 후계자 책봉과 대리청정 등으로 정치적 열세에 몰린 소론은 이후 서서히 반격의 고삐를 죄기 시작했다.
소론 강경파의 선두에 선 인물은 김일경이었다.
김일경은 노론의 핵심 대신 4인방인 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 등에 대해 경종에 대한 불경, 불충의 죄를 최대한 부각시키면서
공격했다. 경종도 조금씩 노론의 그늘에서 벗어나 강경한 입장으로 돌아섰다.
김일경의 상소가 기폭제가 돼 노론 4인방은 위리안치 등의 처벌을 받았다.
소론 핵심 인물들은 일시에 조정의 요직을 차지했다.
1722년 3월 목호룡이 노론 4인방을 비롯한 노론 명문 자제들이
이른바 삼급수(三急手·노론이 경종을 시해하기 위해 구상했다고 전해진 세 가지 방법)로 경종을 제거하려 했다는 고변서를 올리면서
노론은 완전히 세력을 잃는다.
삼급수 중 대급수는 자객을 궁중에 침투시켜 왕을 시해하는 것,
소급수는 궁녀와 내통해 음식에 독약을 타서 독살하는 것,
평지수는 전왕의 전교를 위조해 왕을 폐위하는 것을 말한다.
목호룡의 고변은 노론이 조직적으로 경종을 폐하려 했다는 증거로 활용됐고 이미 위리안치됐던 노론 4인방은 역적으로 몰려
사약을 받고 죽는다.
이 밖에도 60여명의 노론 인사가 처형되거나 유배길에 오르는 등 노론은 정권을 잡은 후 최대의 참화를 당했다.
경종 재위 기간인 신축년(1721년)과 임인년(1722년)에 노론의 핵심 인물이 대거 처형당한 이 사건을 신임옥사(辛壬獄事)라 부른다.
신임옥사는 한편으로 경종이 결코 허약한 왕이 아니었음을 확인시켜줬다.
하지만 신임옥사는 영조 즉위 후 노론이 소론에 ‘피의 복수’를 부르는 계기가 된다.
1724년 8월 경종은 창경궁 환취정에서 37세의 나이로 자식을 한 명도 두지 못하고 승하했다.
노론과 소론의 치열한 당쟁 과정에서 젊은 나이에 승하한 까닭에 경종 독살설의 의혹이 제기됐다.
왕세제인 영조가 보낸 간장과 생감을 먹고 경종 몸 상태가 급격히 나빠진 점과 어의(御醫) 말을 무시한 채
인삼과 부자를 처방한 것 등의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경종은 세자 시절부터 지병을 달고 살았다.
아버지 숙종의 시탕(侍湯·부모의 병환에 대해 약을 써서 시중을 드는 것)을 4~5년간 한 것도 몸이 나빠진 원인이었다.
게다가 왕에 즉위한 이후로도 경종은 항상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정신적, 육체적으로 편안한 시간을 갖지 못했다.
경종이 자식을 낳지 못한 것도 건강과 관련이 깊어 보인다.
경종실록을 쓴 사관은 이 같은 내용을 통해 불안한 세자 생활이 경종 건강에 악영향을 끼쳤다고 설명하고 있다.
“동궁에 있을 때부터 걱정과 두려움이 쌓여 형용하기 어려운 병이 많았고 해를 넘길수록 깊은 고질이 됐다.
더운 열기가 위로 올라와 때론 혼미한 증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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