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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

숙종의 '역사 바로 세우기' 작업 -20

 

숙종의 '역사 바로 세우기' 작업

노산군 단종으로 올리고 사육신 복권

 

 

 

 

숙종(1661~1720년) 46년간 재위하면서 역사 바로 세우기에 중점을 둔 왕이었다.

숙종 시대는 조선사회 지배 이념으로 자리를 잡은 성리학이 사회 곳곳에 뿌리내리는 시기였다.

정치와 사회의 모든 기준점은 성리학 의리와 명분에 의해 결정됐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해결하지 못한 과거사 정리가 있었다.

바로 세조에 의해 노산군으로 강등됐던 단종의 왕위를 회복하는 문제였다.

 

성리학 관점에서 왕의 명예를 회복하지 못한

단종과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사육신의 복권은 언젠가 반드시 해결해야 할 역사적 과제였다.

조선 왕실 입장에서도 단종은 연산군이나 광해군같이 정치적으로 축출된 왕과는 분명히 구분돼야 하는 존재였다.

사육신 또한 의리와 충절이라는 성리학 기준에서 보면 국가에서 적극 표창할 인물이었다.

 

이런 당위성에도 불구하고 숙종 이전 왕은 단종과 사육신의 명예를 회복시키지 못했는데,

이는 이들을 죄인으로 만든 세조의 처분 때문이었다.

단종의 묘호를 회복하고 사육신 충절을 국가적으로 공인하면, 세조의 왕위 자체에 큰 흠결이 생기기 때문이었다.

16세기 이래 재야 사림파 학자를 중심으로 사육신의 충절을 높이 평가하고 이들 정신을 따르려는 경향이 강했지만,

국가가 이를 인정하기엔 시간이 필요했다.

 

사육신 복권은 노산군이 단종으로 명예를 회복하는 길과 맞물려 있는 사안이기도 했다.

사육신을 국가적으로 포상해야 한다는 논의가 꾸준히 제기됐지만 그 어떤 왕도 사육신을 ‘국가의 충신’으로 공인하는 데는 주저했다.

그런데 230여년이 지난 후, 숙종이 스스로 총대를 멨다.

숙종은 1691년(숙종 17년) 사육신의 관작을 회복하고 국가에서 제사를 지내도록 하는 특단의 조치를 단행했다.

 

“나라에서 먼저 힘쓸 것은 본디 절의를 숭상하고 장려하는 것보다 큰 것이 없고,

신하가 가장 하기 어려운 것도 절의에 죽는 것보다 큰 것이 없다.

저 육신이 어찌 천명과 인심이 거스를 수 없는 것인 줄 몰랐겠는가마는, 그 마음이 섬기는 바에는 죽어도 뉘우침이 없었으니,

이것은 참으로 사람이 능히 하기 어려운 것이다.

 (중략) 당세에는 난신(亂臣)이나 후세에는 충신이라는 분부에 성의(聖意)가 있었으니,

오늘의 이 일은 실로 세조의 유의(遺意·고인이 생전에 다 이루지 못하고 남긴 뜻)를 잇고 큰 덕을 빛내는 것이다.”

 (‘숙종실록’ 17년 12월 6일)

 

숙종은 사육신에 대해 ‘당세에는 난신이나 후세에는 충신’이라는 논리를 내세웠다.

그래서 사육신의 복권 조치가 결코 선왕인 세조의 뜻과도 어긋나지 않는 것임을 강조했다.

사육신 복권과 함께 1698년(숙종 24년) 11월 6일 노산군에게는 단종이라는 묘호가 올려졌다.

단종이 역사 속에 다시 살아나는 순간이다.

 

1457년 세조에 의해 죽음을 당한 후 묘소조차 제대로 남기지 못했던 단종은 숙종에 의해 ‘단종’이라는 왕위를 회복했다.

무덤 역시 왕릉으로 인정받아 ‘장릉’이 됐다.

어린 단종과 생이별 후 쓸쓸하게 말년을 보냈던 단종의 부인 송씨도 이때 ‘정순왕후’로 왕비의 위상을 되찾았다.

그녀의 무덤 또한 ‘사릉’이라는 왕비릉의 이름을 찾았다.

숙종대인 1691년에 집행된 사육신의 복권과 1694년 단종의 왕위 회복은

성리학의 핵심인 충의(忠義) 이념을 왕실이 주체가 돼 회복시키려는 의지를 실천한 것이었다.

 

숙종의 ‘역사 바로 세우기’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1704년에는 창덕궁 후원 깊숙한 곳에 대보단(大報壇)을 세웠다.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준 명나라 은혜를 잊지 않고 우리가 명의 유교문화를 계승한 유일한 문명 국가임을 확인하기 위해

임진왜란 때 군대를 보내준 명나라 황제 신종을 제사 지내는 제단을 만든 것.

1704년에 설립한 것은 명나라가 멸망한 해가 1644년이므로,

멸망 60주년이 되는 해에 세워 그 의미를 크게 하고자 한 것이다.

 

임진왜란의 영웅 이순신 장군의 사당 현충사를 처음 세운 왕도 숙종이었다.

숙종은 “절개에 죽는다는 말은 예부터 있거니와 제 몸 죽여 나라를 살려냄은 이 사람에게 처음 본다”는 제문을 적어

이순신의 구국정신을 강조했다.

 

이런 조치는 충(忠)의 이념을 확산시켜 위기의 시기에 신하와 백성들의 충절을 이끌어내려는 의도가 컸다.

왕이 성리학 이념 실천을 주도하는 시대 분위기 속에서 전국에 서원과 사당이 세워졌다.

숙종대를 전후로 전국 166곳에 서원이 설치됐고 이 중 105곳은 국가에서 지원을 받았다.

서원에는 면세와 면역(병역이나 부역 의무를 면함)의 특권이 부여돼

국가 경제를 어지럽히고 당쟁 온상이 되는 등 그 폐단도 적지 않았다. 이에 숙종은 1714년 이후부터 서원 건립을 금했지만,

조선시대 서원과 사우가 가장 전성기를 맞은 것은 숙종 시대였다.

 

숙종은 성리학 이념 강화와 실천에도 주력했지만, 실물경제에도 깊은 감각을 지닌 왕이었다.

1678년(숙종 4년) 숙종은 대신과 비변사 여러 신하들이 모인 자리에서 화폐 주조에 대한 의견을 주고받았다.

 허적, 권대운 등은 변화하는 사회상에 대응하기 위한 방안으로 화폐 시행을 적극 건의했고,

숙종은 군신의 의견을 재차 구했다.

 참석한 신하 대부분이 화폐 유통의 필요성에 공감하자 숙종은 호조, 상평청, 훈련도감 등 각종 기관에 명해

상평통보를 주조하게 했다.

돈 400문(文)을 은 한 냥의 값으로 정해 시중(市中)에 유통하게 했다.

 

따라서 400문이 은 한 냥의 가치를 갖게 했으니 은 한 냥은 동전(상평통보) 4배의 가치를 갖게 되는 셈이었다.

조선시대 화폐 단위인 1문은 1푼이라고도 했으며,

10푼이 1전, 10전이 1냥이 됐다. 10냥은 1관으로서 관이 최고 화폐 단위였다.

 

오늘날에는 한국조폐공사에서만 화폐를 만들지만 조선 시대에는 여러 관청에서 화폐를 주조했다.

상평통보는 나무처럼 생긴 주전 틀에서 동전을 만들어 떼어내는 방식을 취했는데, 요즈음도 흔히 쓰이는

‘엽전’이라는 용어 역시 동전이 주전 틀에 나뭇잎처럼 달려 있었던 것에서 유래했다.

상평통보가 주조됨으로써 조선사회는 본격적인 화폐 유통 시대를 맞이하게 됐다.

 

상평통보 도입 초기 백성들은 조그만 동전으로 과연 쌀이나 옷을 살 수 있을 지를 두려워해 유통에 소극적이었다.

이에 정부에서는 동전을 가져오는 자에게 직접 명목가치에 해당하는 현물을 바꿔주는가 하면,

중앙 관리를 각 지방에 파견해 동전 사용을 독려했다.

또한 정부가 직영하는 시범 주점과 음식점을 설치해 화폐 유통의 편리함을 널리 홍보했으며, 세금을 화폐로 받기도 했다.

한성부, 의금부 등에서는 죄인의 보석금도 현물 대신에 동전으로 받으면서 화폐 유통을 촉진시켜 나갔다.

 

숙종 시대에 상평통보가 전국적으로 유통된 배경에는

국왕의 화폐 유통에 대한 의지와 함께 조선 후기 농업 사회가 서서히 상공업 사회로 전환하는 시대적 상황이 자리 잡고 있었다.

세금과 소작료도 동전으로 대납할 수 있게 하는 조세 금납제(金納制)의 시행도 화폐 유통을 촉진하는 데 한몫했다.

국가 입장에서도 국가 재정을 위한 재원 확보 정책으로 상업과 수공업의 중요성이 대두됐고,

화폐 유통은 동전의 재료가 되는 광산 개발과 상업의 발달을 촉진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17세기 왜란과 호란을 거치면서

정치, 사회, 이념적으로 힘든 상황을 겪었던 조선은 숙종이 등장하면서 비교적 안정적인 발전을 할 수 있었다.

숙종은 우선 이념적 안정을 위해 주도적으로 조선시대판 역사 바로 세우기 사업을 지휘해 나갔다.

 

그 결과 이념적으로 조선은 성리학 국가의 면모를 확고하게 갖춰 나갔고,

충신과 열녀에 대한 포상 작업이 적극 추진됐다.

또 상업과 수공업의 발전이라는 시대적 흐름을 잘 읽어 나갔고, 화폐를 유통시킨 것 또한 숙종의 또 다른 업적이었다.

 

하지만

 대보단 건립이나 멸망한 명나라 연호를 그대로 사용하는 등 지나치게 대명의리론(大明義理論)을 고수했다는 점은

아쉽다는 평가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