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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

왕권 강화의 대명사 '숙종' -19

 

왕권 강화의 대명사 '숙종'

3번의 환국(정치국면 전환) 일으켜 신권 철저히 눌러

 

 

 
조선의 왕 중 정통성 측면에서 가장 돋보이는 왕은 누구일까?

먼저 적장자로서 왕위를 계승한 왕을 들 수 있다.

조선 왕 27명 중 적장자로 왕위를 이어받은 왕은 문종, 단종, 연산군, 인종, 현종, 숙종, 순종 등 총 7명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상하리만큼 적장자 출신 왕은 단명하거나 제대로 왕권을 행사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적장자 출신 왕 중 가장 존재감이 있는 왕은 현종과 명성왕후 사이 외동아들로 태어난 숙종(1661~1720년)이다.

 

숙종이 조선 19대 왕으로 즉위했을 때 조선은 당쟁(黨爭)이 절정에 오른 시기였고,

그만큼 신하의 위상이 높았다. 숙종은 왕으로서 미약했던 단종이나 명종보다 불과 2살 많은 14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그럼에도 숙종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숙종 하면 장희빈이나 인현왕후가 먼저 떠오른다.

이 때문에 숙종에게 성숙한 왕의 이미지가 덧붙여졌으리라 사료된다.

 

숙종은 어렸지만 즉위 직후부터 서인 정권의 판세를 뒤엎고 남인을 정국에 등용했다.

14세의 어린 나이였지만 숙종은 결코 신권에 휘둘리지 않았다. 오히려 정통성을 바탕으로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는 모습을 보였다.

어린 나이가 무색할 만큼 탁월한 정치 역량을 발휘한 것이다.

숙종 시대를 대표하는 키워드는 서인과 남인의 당쟁에서 파생된 환국(換局·정치적 국면이 바뀜)이다.

이제까지 환국은 서인과 남인의 당쟁이란 관점에서 이해하는 경향이 컸다.

숙종대의 환국은 다소 다르다.

어린 시절부터 형성된 숙종의 강한 카리스마와 대담함을 고려하면 환국의 실질적인 주역은 숙종이란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숙종의 카리스마에는 현종의 적장자라는 정통성도 한몫을 했다.

모친 명성왕후 또한 청풍 김씨 명문가의 피를 이은 인물이었다.

이처럼 혈통상 하자도 없고 별다른 경쟁자 없이 왕세자 교육을 받으며 왕권 강화를 준비하고 있던 숙종 눈에 가장 큰 걸림돌은

당쟁이었다.

특히 부친 현종 재위 마지막 해에 일어난 1674년의 갑인예송은 숙종에게 당쟁의 문제점을 확실히 각인시켜 줬다.

 

숙종이 즉위 후 예송(禮訟·예의 해석을 둘러싸고 벌이는 논쟁)논쟁 최중심에 서 있었던 송시열의 잘못을 곧바로 지적한 것은

정통성이 있는 왕의 강한 이미지를 대내외에 인식시키기 위한 조처로 파악된다.

숙종대 정치사는 유독 당파 간 대립과 정치 세력의 교체, 정치적 거물의 희생 등이 난무했다.

그런데 그 중심에 당파가 아닌 숙종이 있었다.

 

숙종이 즉위한 1674년,

2차 예송으로 남인이 승리하면서 인조반정 이후 중심에서 벗어나 있던 남인이 서인을 대신해 정권의 중심에 섰다.

숙종 즉위 초 정권 실세는 남인의 윤휴, 허적 등이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집권하고 있던 서인의 움직임도 만만치 않았다.

서인들은 윤휴, 허적 등 남인의 전횡을 비판하면서 공작정치에 능했던 김석주를 중심으로 남인 정권 축출에 나섰고,

1680년 마침내 그 기회가 왔다.

 

남인의 영수였던 영의정 허적이 그의 조부 허잠이 시호 받은 것을 축하하는 잔치를 베풀었다.

허적은 당시 최고의 정치 실세였으므로 많은 사람이 그의 집안에 모여들었다.

그런데 그날 마침 비가 내렸다.

이 행사를 알고 있던 숙종은 특별히 대궐에서 쓰는 유악(기름을 먹인 장막)을 가져가 쓰게 하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이미 허적이 유악을 가져갔다는 보고를 들은 숙종은 권력을 믿고 왕까지 무시한 허적의 태도에 분노했다.

더구나 남인이 권력을 잡은 후 전횡을 일삼는다는 상소가 여러 차례 올라오고 있던 터였다.

숙종은 내시를 시켜 거지 모양으로 꾸미고 허적의 잔치를 염탐하게 했다. 잔치는 입이 벌어질 정도였다.

오늘날로 치면 여당 실세의 잔치가 대통령이 주관한 모임과 맞먹는 규모였다고나 할까?

 

남인의 권력 독주에 제동을 걸어야겠다고 결심한 숙종은

훈련대장을 남인인 유혁연에서 서인인 김만기로 교체하는 것을 시작으로 남인과 서인의 권력 교체를 단행했으니

이것이 경신환국이다.

숙종대에는 세 차례의 환국이 있었다. 그만큼 정치적 대립이 치열했음을 의미한다.

 

경신환국 이후 김익훈, 신여철 등 서인이 요직을 차지했고

갑인예송의 패배로 철원으로 유배 가 있던 서인 김수항은 석방됨과 동시에 영의정에 올랐다.

그러나 경신환국은 남인 축출의 신호탄에 불과했다.

경신환국이 단행된 일주일 후 공작정치의 명수 김석주는 자신이 파견한 정탐조를 통해 허적의 서자인 허견 등이

남인과 가까운 복선군(福善君·인조의 3남인 인평대군의 아들)을 왕으로 삼으려 한다는 고변서를 올렸다.

결국 이에 연루돼 숙종 초반을 이끌어갔던 남인의 영수 허적과 윤휴는 사사(賜死)되고 말았다.

 

1680년 경신환국으로 다시 서인 정권 시대가 열렸지만,

숙종이 왕통을 계승할 아들을 낳지 못하면서 정국은 다시 혼미에 빠지게 된다.

숙종의 정비인 인경왕후가 왕자를 낳지 못하고 사망하자

숙종은 1681년 15세의 신부 인현왕후(1667~1701년)를 계비로 맞이했다.

그러나 인현왕후에게도 5년이 넘도록 후사가 없었다.

이때 숙종의 마음을 사로잡은 여인이 나인으로 뽑혀 처음 구중에 발을 들여놨으니,

그 유명한 장희빈이다.

 

장희빈은 그의 후견인 역할을 했던 오촌 숙부 역관 장현과 정권에서 밀려났던 남인의 적극적인 지원 속에

마침내 숙종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

1688년 그토록 원했던 왕자(후의 경종)를 낳음으로써, 일약 왕비의 지위에 오를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숙종으로서는 왕이 된 지 14년 만에 보는 첫아들이었다.

기쁨에 넘친 숙종은 새로 태어난 왕자를 원자(元子)로 하고 그 이름을 정할 것을 지시했다.

 

정국 실세였던 서인은 중전인 인현왕후의 춘추가 어린 점을 들어 원자 이름을 정하는 것이 신중하지 못한 처사임을 지적하고

아직 22세밖에 되지 않은 중전(인현왕후)의 왕자 생산을 좀 더 기다려 보자고 요청했다.

더구나 중전은 서인의 실세 민유중의 딸이기도 했다.

그러나 숙종이 워낙 강경하게 나오자 서인의 영수 송시열이 고령의 몸으로 총대를 멨다.

송시열은 거듭 상소문을 올려 원자 정호(定號)의 부당함을 지적하고 나섰지만, 그의 상소는 오히려 숙종을 자극했다.

 

서인이 정국에 포진해 있는 이상 왕권 강화를 달성할 수 없다고 판단한 숙종은

원자 정호 사건을 빌미로 1689년 기사환국을 단행했다.

서인을 물리치고 남인을 재등용한 것이다.

 조정은 권대운, 목내선, 김덕원 등 남인 차지가 되고 송시열의 상소문을 기화로 100여명 이상의 서인이 쫓겨났다.

 

특히 기사환국은 인조 때부터 조선 후기 사상사, 정치사의 중심인물로 활약한 송시열에게 죽음을 선사한다.

원자 정호를 반대하는 상소를 계속 올리다

제주도에 위리안치(죄인이 달아나지 못하도록 가시로 울타리를 만들고 그 안에 가둠)된 송시열은 마침내 왕명을 받아 서울로 오던 중

숙종이 내린 사약을 받고 숨을 거뒀다.

인조대부터 4대에 걸쳐 신권의 상징이었던 인물 송시열이었지만 강심장의 소유자 숙종을 당해낼 수는 없었던 것이다.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몰락하고 정국은 다시 남인 세상이 됐다.

장희빈이 정식 왕비가 되고 희빈의 오빠인 장희재 등 장씨 일가가 득세했다.

인현왕후는 폐위된 후 안국동 사가로 돌아갔다.

 

그런데 이 무렵 무수리 출신의 한 궁녀가 숙종 눈에 띄었다.

후에 영조를 낳는 숙빈 최씨다.

숙빈 최씨는 인현왕후를 시종했던 궁녀 출신으로,

인현왕후가 폐위된 이후에도 그녀에 대한 의리를 끝까지 지키는 모습을 보여 숙종을 감동시켰다.

 

1694년 4월 숙종은 남인 우의정 민암 등이 서인을 제거할 목적으로 고변 사건을 일으키자

오히려 민암에 대해 ‘군부를 우롱하고 신하들을 도륙하려 했다’고 질책하면서 권력에 포진해 있던 남인을 대거 숙청한다.

갑술환국이다.

갑술환국으로 권력은 다시 남인에서 서인으로 교체됐고,

남인의 지원을 받던 장희빈도 폐출됐다.

게다가 갑술환국으로 남인은 더 이상 정치적으로 재기할 수 없을 정도가 되고 말았다.

 

1680년의 경신환국,

1689년의 기사환국,

1694년 갑술환국은 서인과 남인의 당쟁이 치열하게 전개됐던 정치적 상황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들이다.

하지만 환국의 진정한 승리자는 왕 숙종이었다.

어느 한 당파의 정치적 독주를 허용하지 않으면서 왕권을 강화한 숙종의 정치 역량은

영조대 탕평책을 추진하는 데도 상당한 기반을 제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