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감 약한 왕 '현종'
15년 재위기간 내내 예법싸움만
조선의 왕 중 존재감이 없는 경우는 대개 재위 기간이 매우 짧을 때가 많다.
2대 왕 정종, 12대 왕 인종, 18대 왕 현종이 대표적이다. 재위 기간이 1~2년밖에 되지 않아, 큰 업적을 낼 형편이 아니었다.
현종은 재위 기간이 짧지도 않았다. 15년이나 왕의 자리에 있었다.
세조나 연산군, 효종보다도 재위 기간이 길다.
그럼에도 현종이 별다른 업적을 남기지 못한 것은 건강이 매우 좋지 않았고,
유례없는 자연재해와 대기근으로 제대로 정사를 펼칠 수 없었으며, 당쟁이 워낙 치열해 이를 수습하기 급급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현종 즉위년에 전개된
1659년 기해예송(己亥禮訟)과 재위 마지막 해 있었던 갑인예송 덕분에 현종이란 왕을 기억할 수 있게 됐다.
현종 시대는 서인과 남인 간의 ‘예송 논쟁(禮訟論爭)’이 가장 치열하게 전개된 기간이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집권 세력이 된 서인과 야당 위치에 있었던 남인은 예에 대한 해석을 둘러싸고 의견 차이를 보이기 시작했다.
효종 승하를 계기로 서인과 남인은 본격적으로 예에 대한 각종 이론을 동원해 논쟁을 벌인다.
이것을 역사 용어로 ‘예송 논쟁’이라고 한다.
1659년 효종 승하 후 현종이 즉위하자마자 첫 번째 예송인 기해예송이 발생했다.
인조의 계비(장렬왕후, 1624~1688년)로 들어온 조 대비의 상복(喪服) 입는 기간이 논쟁의 초점이었다.
조 대비는 15세던 1638년 당시 44세던 인조의 계비로 들어와 아들인 효종보다 나이가 어렸다.
효종의 국상에 조 대비가 입을 상복을 두고 송시열과 송준길 등 서인 측은 1년 복을 주장했다.
효종이 차남이고, 장남인 소현세자가 사망했을 때 조 대비가 이미 장자(長子)에 해당하는 상복인 3년 복을 입었으므로,
1년 복이 타당하다는 논리였다.
이에 허목, 윤휴 등의 남인은 반박 논리를 폈다.
효종이 왕인 점을 강조하면서 이번 상황은 특수한 사례임을 들었다. 효종이 비록 차남이지만 왕위를 계승한 인물이므로,
조 대비는 왕이 사망했을 때 적용하는 3년 복을 입는 것이 옳다고 맞섰다.
서인 주장은 신권 강화 배경이 깔려 있고, 남인 주장에는 신권보다는 왕권을 강화하는 입장이 내재돼 있었다.
당연히 예송 논쟁은 정치적 대결의 양상을 띠게 된다.
결국 현종은 서인의 손을 들어줬다.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는 상황에서 서인 논리를 무시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큰 부담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기해예송은 1년 복을 입는 것으로 결정됐고, 서인의 정치적 입지는 더욱 강화됐다.
하지만
서인 측이 주장한 신권 강화의 논리는 효종을 왕이 아닌 차남으로 인정하는 모순을 지니고 있던 만큼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다.
1674년 1월 효종의 왕비인 인선왕후(1618~1674년)가 사망하면서 상복 문제로 또 한 번 정국이 들끓었다.
이번에도 상복의 주인공은 조 대비였다.
인선왕후보다 어렸던 조 대비는 이때도 생존해 왕실의 최고 어른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서인은 왕의 예법이 사대부의 예법과 동일함을 들어 차남의 며느리가 사망한 경우에 입는 9개월 상복을 주장했다.
남인은 이에 맞서 왕비의 국상임을 주지시키면서 조 대비가 1년 복을 입는 것이 타당함을 역설했다.
양 정파의 의견이 팽팽히 대립하는 가운데 현종은 이번에는 남인의 손을 들어줬다.
어느 정도 왕으로 있으면서 시국의 흐름을 간파한 현종은 더 이상 서인에 끌려갈 수 없다고 판단했고,
예법에서도 왕권 강화를 강조하는 남인 입장에 동조했다.
1674년의 이 예송을 2차 예송 또는 갑인예송이라 한다.
이로써 현종은 1659년 기해예송 때 서인의 압력으로 달성하지 못한 자신과 부모의 정통성을 확립할 수 있었다.
또 갑인예송을 계기로 서인이 실각하고 남인이 정권의 실세로 자리를 잡는 정국의 변화가 일어났다.
공교롭게도 현종은 예송 논쟁이 마무리된 시점인 1674년 8월 18일 창덕궁에서 승하하고 만다.
정치적 논쟁 못지않게 현종을 괴롭히던 것이 있었으니, 바로 건강 문제였다.
현종은 재임 기간 내내 종기와 피부병에 시달렸다.
이 때문에 현종은 조선 왕 중 온천이 있는 온양행궁을 가장 많이 찾은 왕으로 기록된다.
‘현종실록’에는 온천욕의 뛰어난 효능을 인정한 현종의 입장이 잘 나타난다.
“상이 의관을 시켜 약방에 말을 전하기를, ‘요즈음 부스럼이 온몸에 나 고통을 견디기 어려운데,
온천에서 목욕하는 것이 효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민폐가 염려돼 할 생각을 못했다.
지금 눈병과 부스럼이 한꺼번에 발해 약을 오래 복용했으나 효험이 없고 침은 겨우 당장 위급한 것만 치료할 뿐이다.
일찍이 듣건대, 온천이 습열(濕熱)을 배설시키고 또 눈병에 효험이 있다고 하니, 지금 기회에 가서 목욕했으면 한다.”
(현종실록 6년 3월 14일)
현종은 자신의 병에 침과 약이 효과가 없자 온천욕을 대안으로 찾았고 자주 온양을 방문했다.
왕의 행차였던 만큼 그 규모도 대단했다.
“왕이 온양온천에 거둥했다. 인시에 왕은 군복을 입고 칼과 활, 화살통을 차고서 작은 수레를 타고 나가 인정문 밖에 도착했다.
영의정 정태화, 우의정 허적, 병조판서 홍중보, 호조판서 정치화…침의(鍼醫) 윤후익 등 4인,
약의(藥醫) 이동형 등 4인이 따라갔으며, 영풍군 이식 등 형제 4인도 자원해 어가를 수행했다.
무예별감 30명, 어영군 1200명, 기병 50명, 군뢰(軍牢)와 잡색(雜色)이 합해 400명이었는데,
대장 유혁연과 중군(中軍) 유정이 이끌고,
금군 500명은 별장 이지원이 이끌고, 마병 470명과 포수 800명은 별장 유비연과 한여윤이 이끌었다.”
(현종실록 6년 4월 17일)
현종의 온양 행차에는 수많은 대신과 어의, 대규모 병력이 수행했다.
이런 행차는 자연스럽게 국정에 큰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현종의 잦은 온천행은 왕으로서의 역량을 발휘하는 데는 큰 장애가 됐다고 볼 수 있다.
현종이 왕으로서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다른 요인으로는 극심한 자연재해가 꼽힌다.
재위 기간 내내 백성은 가뭄과 전염병, 추위로 힘들어 했다.
1670년과 1671년에는 특히 기근이 심했다. 이 시기를 1670년의 경술년과 1671년 신해년의 앞 글자를 따서
‘경신대기근(庚辛大饑饉)’이라 칭한다.
‘현종실록’에는 자연재해로 백성이 고통받았던 상황을 자주 접할 수가 있다. 현종의 즉위 직후인 6월 2일에는
“그해 봄에 기근이 들어 상평청이 3월부터 죽을 쒀 기민(饑民·굶주린 백성)을 먹이다가 6월에 와서야 정지했다”는 기록이 있다.
9월 4일에는 비변사에서 “함경도 전역이 다른 도에 비해 기근이 갑절이나 더하고 북도는 더욱 심하다”고 보고했다.
1670년 홍문관에서 한재와 수재로 인한 기근의 참상을 말하며 조세와 경비의 절감 등의 대책을 건의했다.
그해 10월 24일 현종은 “큰 기근 뒤에 추운 절기를 만났으니, 얼어 죽는 자가 틀림없이 많을 것이다.
그중 의지할 데가 없는 자에게는 동옷을 주거나 옷감을 지급하게 하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1671년 1월 11일 전라도 관찰사 오시수가 올린 보고서에는 당시의 참상이 잘 나타나 있다.
“기근의 참혹이 올해보다 더 심한 때가 없었고 남방의 추위도 올겨울보다 더 심한 때가 없었습니다.
굶주림과 추위가 몸에 절박하므로 서로 모여 도둑질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집에 조금이라도 양식이 있는 자나 몸에 베옷 한 벌이라도 걸친 자는 강도의 화를 당하고 있으며,
심지어 무덤을 파서 관을 깨고 고장(藁葬·시체를 짚이나 거적에 싸서 지내는 장사)을 파내 염의(殮衣)를 훔치기도 합니다….
또 돌림병이 치열해 죽은 자가 이미 670여인이나 됐습니다.”
효종대인 1653년 표류해서 현종대까지 조선에 살았던 하멜의 기록에도
“조선의 겨울은 굉장히 많은 눈이 내린다. 1662년 어느 절에 머물렀을 때는 집과 나무가 눈으로 덮여 있어서 다른 집에 가려면
눈 속으로 통하는 굴을 파야 했다”고 적고 있다.
이례적인 추위와 한재, 기근에 전염병까지.
이런 자연재해는 예송 논쟁으로 시달리고, 건강도 좋지 않았던 현종을 더욱 궁지로 몰아갔을 것이다.
현종은 건강 때문인지 조선 왕 중 거의 유일하게 후궁을 두지 않은 왕이기도 했다.
그나마 현종의 공헌이라면 왕비 명성왕후와의 사이에서 적장자 숙종을 낳고 그에게 왕위를 물려줌으로써
문종과 단종에 이어 조선 역사상 두 번째로 적장자가 연이어 왕위를 계승하는 전통을 만들었고,
아들 숙종이 이 같은 정통성을 바탕으로 강력한 존재감을 발휘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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