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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

북벌(北伐)만을 꿈꿨던 효종의 갑작스런 사망 -16

북벌(北伐)만을 꿈꿨던 효종의 갑작스런 사망

삼전도 굴욕안긴 淸에 '復讐雪恥' 꿈 무산

 

1645년 2월 귀국 후 두 달 만에 소현세자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 후 봉림대군은 뜻하지 않게 세자로 책봉됐다.

소현세자에게 세 아들이 있었지만, 인조는 기어코 봉림대군에게 왕위를 계승시켰다.

 

1649년 인조가 승하하고 왕위에 오른 효종(1619~1659년)은 자신이 왕이 된 이유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삼전도 굴욕을 안겨준 청에 대한 복수를 해야 한다는 것,

바로 복수설치(復讐雪恥·복수해 치욕을 씻음)가 그가 왕이 된 배경이다.

 

때문에 효종은 즉위 직후 북벌(北伐)을 표방하고 재위 기간 내내 북벌만 추진했다.

그 기저에 ‘숭명반청(崇明反淸)’의 이념이 자리 잡고 있었음은 물론이다.

사실 효종의 즉위는 조선 역사에서 중요한 전기를 갖는다.

청을 물리쳐야 한다는 ‘북벌’이 국시(국가 정책의 기본 방향)가 됐기 때문이다.

따라서 북벌은 효종 하면 늘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키워드가 됐다.

 

효종은 심양 생활에서 조선인 포로의 비참한 생활을 직접 목격했다.

또 청 황제를 따라 수렵에 나서면서 중국의 사정과 지형도 면밀히 관찰했다.

이런 경험과 부왕의 복수를 해야 한다는 신념은 효종이 북벌을 추진하는 근거로 작용했다.

하지만 당시 조선은 청과 공식적인 평화협정을 맺고 있었고,

조선 내 산성 구축 등 군사적 준비를 하려면 청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때문에 공식적으로 북벌을 준비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효종의 일대기를 기록한 ‘효종실록’에 의외로 북벌에 대한 논의가 거의 기록되지 않은 것도 이런 현실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실록의 행간이나 효종이 대화를 나눴던 주요 인물들의 기록을 따라가다 보면 효종의 북벌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아래 기록을 보자.

“상이 이르기를, ‘우리나라 군졸은 갑옷을 입지 않아 갑자기 적을 만나면 화살과 돌을 막기 어렵다.

나무 방패를 활용하면 좋을 것 같다’ 하자,

훈련대장 이완(李浣)이 ‘나무 방패는 갖고 다니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신은 군인들이 각기 하나의 큰 무명 자루를 소지했다가

급박할 때에 흙을 담아 쳐들어오는 형세를 방어한다면 나무 방패보다 못하지 않을 것으로 여깁니다’라고 했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일찍이 들으니 명나라 장수 장춘(張椿)의 군대가 무명 자루를 소지했다가

넓은 들판에서 오랑캐의 기마병을 만나면 흙을 자루에다 넣어 보루(堡壘·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구축물)를 만들었는데

오랑캐 군사가 감히 핍박하지 못했다고 한다’고 말했다.” (실록, 효종 7년 10월 4일)

 

위의 글에는 북벌에 대한 효종의 의지가 간접적으로 표현돼 있다.

효종은 즉위 후에 김자점 등 친청파를 제거하고 김상헌, 김집, 송시열, 송준길 등 반청 척화파를 등용했다.

특히 대군 시절 그의 스승이었던 송시열을 불러들여 북벌 이념을 널리 전파할 북벌 전도사로서의 사명을 맡겼다.

이와 동시에 효종은 중앙 상비군인 훈련도감을 강화하고 북벌 추진의 중심 기구로 어영청(御營廳)을 설치한 후

이완을 어영대장으로 삼았다.

 

효종과 코드를 맞추며 북벌을 추진한 유일한 인물은 이완이었다.

이완은 이후에도 관례적으로 공신이나 왕실의 친인척이 임명됐던 야전사령관인 훈련대장에 전격 발탁돼

현종 때까지 16년 동안 훈련대장을 역임했다.

효종은 병자호란 때 참전 경험이 있고 평안도, 함경도의 병마절도사를 지내면서 보여준 이완의 능력과 친명반청적인 그의 성향이

북벌 추진에 긴요하게 활용할 수 있다고 판단했고 이완은 이를 충실히 따랐다.

 

이완은 효종의 북벌 정책을 실천한 거의 유일한 장수였으며,

자신이 죽으면 효종의 무덤 인근에 자신을 묻어줄 것을 유언하는 등 철저한 효종의 사람이었다.

현재 이완의 무덤은 효종의 무덤이 있는 경기도 여주 영릉(寧陵) 인근에 조성돼 있다.

죽을 때까지 효종과 북벌의 뜻을 함께한 상징물인 셈이다.

 

 이외에 효종은 훈련도감과 남한산성의 수비대인 수어청에 대한 군비 증강 사업과, 군량미 확보 등을 통해

북벌을 구체적으로 실천해 나갔다.

그러나 송시열이나 송준길과 같이 효종이 기대를 걸었던 인물들은 북벌을 위한 준비 단계로서 내수(內修)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로 인해 북벌은 효종의 고독한 사업이 되고 말았다.

“지금 씻기 어려운 수치심이 있는데도 모든 신하들이 이를 생각하지 않고 매양 나에게 수신(修身)만을 권하고 있으니

이 치욕을 씻지 못하면 수신만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효종이 즉위 5년경에 발표한 교서에서 토로한 내용이다.

 

그만큼 북벌을 뒷받침해주는 정치 세력이 부재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무엇보다 전쟁에 지친 백성들이 북벌에 회의적이었던 점도 북벌 정책의 큰 걸림돌이었다.

임진왜란과 두 차례의 호란을 경험하면서 전쟁의 참상과 기근에 시달리던 백성들은 북벌 준비를 위한 정부의 군비 증강과

재정 부담에 크게 동의하지 않았다.

특히 훈련도감군은 모두가 월급을 받는 급료병으로 막대한 예산이 소요됐고 그 부담은 백성들에게 고스란히 전가됐다.

 

이미 멸망한 명나라를 위한 복수는 하루 생활이 급급한 백성들에게는 명분에서도 큰 호소력을 갖지 못했다.

중국은 이미 명나라 잔존 세력이 거의 사라지고 청나라가 확고하게 중원의 지배자로 자리 잡고 있었다.

청나라의 감시도 북벌 준비의 장애 요소로 다가왔다.

청나라는 수시로 조선을 시찰하면서 군사력 증대를 억제했고, 산성 수축 등 군비 증강 사업을 어김없이 감시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북벌에 대한 효종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1659년 3월 효종은 승지와 사관을 모두 물리치고 송시열과 단독으로 면담했다. 북벌을 어떻게든 실천하기 위함이었다.

당시 실록에서는 독대한 상황만 기록했지 구체적인 내용은 언급돼 있지 않지만

송시열은 이날 북벌에 대한 긴밀한 논의가 이뤄졌음을 자신의 문집 ‘악대설화(幄對說話)’에서 증언하고 있다.

효종은 “저 오랑캐들은 이미 망할 형세에 있다.

10년을 기한으로 군사 훈련과 군장비, 군량을 비축해 조선과 국민들이 일치단결하고 군사 10만명을 양성한 뒤,

틈을 타 명과 내통해 기습하고자 한다”고 했지만,

송시열은 “북벌을 위해서는 내수가 필요하고

내수를 위해서는 학문에 전념해야 한다는 원론적인 말 이외에 더 이상 나설 수 없었다”고 적혀 있다.

효종이 그토록 믿었던 송시열이지만, 북벌 정책에 관한 한 효종의 기대를 충족시켜주는 후원자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효종은 즉위 명분인 북벌의 실천을 위해 각고의 노력을 했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재위 10년 만인 1659년

창덕궁 대조전에서 승하했다.

청나라의 계속적인 군사력 축소 압박과 내수에 치중해야 한다는 송시열 등의 의견, 전쟁의 공포에 휩싸인 사대부와

 백성들의 소극적인 입장 등이 맞물리면서 북벌은 현실에서 구체화되지 못한 채 꿈에 그치고 말았다.

 

효종의 사인은 종기였다. 종기의 독이 계속 오르자 의관이 침을 놨는데 이것이 혈맥을 찔러 버렸다.

북벌을 야심 차게 준비한 왕의 마지막 모습은 너무나 허망한 죽음이었다.

실록은 효종의 죽음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상이 침을 맞고 나서 침구멍으로 피가 나오니 상이 이르기를, ‘신가귀(효종의 어의)가 아니었더라면 병이 위태로울 뻔했다’고 했다.

그러나 피가 계속 그치지 않고 솟아 나왔는데 이는 침이 혈락(血絡·피부에 있는 동맥과 정맥, 모세혈관)을 범했기 때문이었다.

제조 이하에게 물러나가라고 명하고 나서 빨리 피를 멈추게 하는 약을 바르게 했는데도 피가 그치지 않으니,

제조와 의관들이 어찌할 바를 몰랐다.

상의 증상이 점점 위급한 상황으로 치달으니, 약방에서 청심원(淸心元)과 독삼탕(獨參湯)을 올렸다.

백관들은 놀라서 황급하게 모두 합문(閤門) 밖에 모였는데, 이윽고 상이 삼공과 송시열과 송준길, 약방제조를 부르라고 명했다.

승지·사관과 여러 신하들도 뒤따라 들어갔지만, 상은 이미 승하했다.”

(실록, 효종 10년 5월 4일)

 

효종이 죽었지만 그의 승하 이후에도 북벌의 사상적 이념은 조선 사회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조선 사대부들은 청나라 연호를 사용하지 않고 멸망한 명나라의 마지막 연호인 숭정(崇禎)을 사용했다.

또한 북벌의 논리는 중화 문화의 중심이 조선에 있다는 ‘소중화사상’, 나아가 ‘조선중화사상’으로 발전했다.

북벌은 우리 문화에 대한 자부심과 함께 민족의 자존심을 지켜주는 논리로 발전했지만,

긴 시간 동안 이념과 명분이 조선 사회를 지배하면서 정치, 경제, 사회 발전에 걸림돌이 되기도 했다.

이후 북벌의 이념에서 해방돼 북학(北學) 사상이 만개하기까지는 꼬박 100여년의 시간을 더 기다려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