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현세자는 왜 귀국한 지 두 달 만에 죽었을까.
북학과 북벌을 둘러싼 부자간 갈등
1637년 삼전도의 굴욕 이후, 인질로 끌려갔던 소현세자.
부왕 인조 뒤를 이어 왕위 계승을 눈앞에 두고 있던 세자가 8년 만의 인질 생활을 끝내고 귀국한 지 두 달 만에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국가 공식 기록인 실록의 기록에서조차 독살을 의심할 정도였고,
세자 사후에 인조가 취한 조처들을 보면 그의 죽음에 얽힌 비밀들은 무척 많아 보였다.
소현세자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이다.
정묘호란 때 분조 활동을 하고, 병자호란 때 부왕을 대신해 적진에 가기를 자청했던 기백 있는 모습과 달리
심양(청나라 수도)에서의 생활은 이전과 확연히 달랐다.
이에 대해 실록에는 이렇게 표현돼 있다.
“학문을 강론하는 일은 전혀 하지 않고
오직 화리(貨利·사고팔아 이익을 남김)만을 일삼았기 때문에 적국으로부터 비난을 받고 크게 인망을 잃었다.”
세자 사후 두 달 후에 행해진 졸곡제(卒哭祭)에 대한 기록은 이런 비판적인 내용과 밀접한 관련성을 보인다.
“소현세자의 졸곡제를 행했다.
전날 세자가 심양에 있을 때 집을 지어 단확(丹雘·고운 빛깔의 빨간 흙)을 발라서 단장하고,
또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을 모집해 땅을 경작해서 곡식을 쌓아 두고는 그것으로 진기한 물품과 무역을 하느라
관소(館所)의 문이 마치 시장과 같았으므로, 왕(인조)이 그 사실을 듣고 불만스러워 했다.
(…) 세자는 본국으로 돌아온 지 얼마 안 돼 병을 얻었고 병이 난 지 수일 만에 죽었는데,
온몸이 전부 검은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붉은 피가 나오므로 검은 천으로 그 얼굴 반쪽만 덮어 놨으나,
곁에 있는 사람도 얼굴빛을 분별할 수 없어서 마치 약물에 중독돼 죽은 사람과 같았다.”
(실록, 인조 23년 6월 27일)
위 기록에서는 소현세자가 심양에 있을 당시 청나라 사람들과 무역한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는 내용과
귀국 후 곧바로 죽은 사실을 기록함으로써 세자의 죽음에 인조가 상당한 관여를 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실록에서조차 약물 중독을 언급할 정도로 독살설에 대한 강한 의혹이 제기됐다.
세자 죽음 후 인조는 서둘러 장례를 마쳤고,
가장 중요한 후계 문제에 있어서도 특별한 결정을 내린다.
당시 소현세자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지만 인조는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세손에게 왕위를 물려줄 수 없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인조의 둘째 아들이자 소현세자 동생인 봉림대군(후의 효종)을 후계자로 지목했다.
정상적인 왕위 계승 원칙에 어긋나는 방식으로서,
인조가 소현세자를 극도로 불신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아들 사도세자를 죽인 영조조차 왕위는 세자의 아들이자 손자였던 정조에게 물려줬다.
소현세자는 왜 의문의 죽음을 당한 것일까?
비밀의 열쇠는 소현세자가 보낸 심양에서의 8년간 생활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삼전도의 굴욕 이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인질로서 심양으로 끌려갔다.
1637년 4월 10일 소현세자는 심양에 도착해 조선 사신을 접대하는 객관(客館)인 동관에 머물렀다.
5월 7일엔 청나라 황제가 세자를 위해 새로 지은 관소인 신관(新館), 즉 심양관으로 옮겼고 세자는 이곳에서 8년을 머물렀다.
심양관에는 세자와 봉림대군 부부를 비롯해
배종신(陪從臣·수행 신하), 수행 원역(員役), 부속된 종인(從人)들까지 포함해 상주 인원이 500명을 넘었다.
세자는 이곳에서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을 모집해 땅을 경작했고 무역 활동도 했다.
부인인 강씨도 세자를 적극적으로 도왔다.
하지만 이에 대해 ‘인조실록’에는 “관소의 문이 마치 시장과 같았으므로, 왕(인조)이 그 사실을 듣고 불만스러워 했다”고 기록돼 있다.
인조가 세자의 심양 생활을 못마땅해한 것이다.
어찌 됐건 부왕의 치욕적인 항복 의식을 목격했던 소현세자는 인질 생활 초기에는 반청 감정이 강했다.
하지만 심양 생활을 통해 소현세자는 청나라의 놀라운 발전에 큰 자극을 받고 생각이 바뀌었다.
그는 청나라가 중국 대륙을 통일한 군사강국이란 측면 못지않게 문화대국으로 성장하고 있음을 읽었다.
당시 청나라는 아담샬과 같은 선교사를 통해 천주교뿐 아니라 화포,
망원경 같은 서양의 근대 과학기술을 적극 수용했다.
예수회 선교사 신부로서 해박한 과학지식을 바탕으로 명나라 조정에서 인정받았던 아담샬은 청나라가 북경을 점령한 후
청나라 과학기술 발전에 공헌한 인물이다.
세자는 북경 남문 남천주당에 머물고 있던 아담샬과 자주 만나면서 새로운 서양 문명과 천주교를 접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이를 통해 조선은 더욱더 변해야 한다는 생각을 굳혀 갔다.
소현세자가 귀국하면서 화포와 천리경 등을 가져온 것도 이런 의식을 실천하고자 하는 의지였다.
1644년 명나라를 멸망시키면서 중원을 완전히 장악한 청나라는 그때서야 소현세자의 귀국을 허락했다.
1645년 소현세자가 8년 만의 인질 생활을 끝내고 조선에 돌아왔을 때 그의 귀국을 달갑게 여기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소현세자와 인조의 갈등이 감지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달 만에 소현세자는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야사의 기록에는 이런 식의 표현도 있다.
“소현세자가 청나라의 물건을 가져와 인조에게 내놓자 인조가 벼루를 던져 세자가 죽었다.”
소현세자와 청나라 간 신뢰 관계는 인조를 비롯한 조정 대신들에게는 결코 만족스럽지 않았다.
장성한 세자는 차기 국왕 후보였고
세자가 왕이 되면 인조와 서인 정권은 그들이 추진한 숭명반청(崇明反淸) 이념이 퇴색될 것을 우려했다.
당시 조선 조정은 청나라를 현실의 군사대국,
문화대국으로 보기보다는 여전히 오랑캐로 인식하는 분위기였다.
따라서 청의 과학기술 수용에 적극적이었던 세자는 경계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인조는 청이 자신을 물러나게 하면서 소현세자를 왕으로 삼으려는 움직임을 경계했다.
정통으로 왕위에 오르지 않고 ‘쿠데타’로 왕이 된 인조는 본능적으로 청의 후원을 입은 아들을 정적으로 본 것은 아닐까?
아직도 독살에 대한 심증은 확실하지만 물증은 없다.
독살이건, 병이건 간에 인조가 세자의 죽음을 호재로 활용한 것만은 분명하다.
세자의 세 아들을 제쳐두고 서둘러 봉림대군을 후계자로 지명하며,
세자의 부인이자 며느리인 강씨에게 사약을 내린 것도 이런 점을 명확히 보여준다.
귀국 후 남편이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그녀의 아들이 왕이 되지 못하자, 강씨는 인조에게 격렬히 저항했다.
죽음을 각오한 강씨는 머리를 풀어헤치고 인조의 침실로 달려가 하소연을 늘어놓으며 통곡하는가 하면,
맏며느리로서 왕에게 올리는 조석 문안도 한때 중지해 버렸다.
분노한 인조는 강씨를 유폐시켰고 갈등의 끝은 결국 왕세자빈의 죽음으로 이어졌다.
갈등의 골이 깊게 패었던 어느 날
인조의 수라상에 오른 전복에 독이 든 사실이 발견됐는데 이것을 강씨가 사주했다는 혐의를 받으면서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인조실록은 강씨의 죽음을 기록하면서,
그녀의 강한 기질이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강씨는 성격이 거셌는데, 끝내 불순한 행실로 주상의 뜻을 거슬러 오다가 드디어 사사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 죄악이 아직 밝게 드러나지 않았는데 단지 추측만을 갖고서 법을 집행했기 때문에 안팎의 민심이 수긍하지 않고
모두 조숙의(趙淑儀·인조의 후궁 중 한 명)에게 죄를 돌렸다.”
(실록, 인조 24년 3월 15일)
강씨의 죽음 이후 소현세자의 아들들도 크게 화를 당했다.
세 아들 석철, 석린, 석견은 모두 제주도로 유배를 갔는데 당시 석철은 12세, 석린은 8세, 석견은 4세였다.
석철과 석린은 제주도에서 풍토병으로 사망했고,
석견(경안군)은 효종 즉위 후 역모의 불씨가 된다는 우려로 인해 제주에서 남해, 다시 강화로 유배지를 전전하다가
1665년(현종 6년) 9월에 사망했다.
소현세자에 이어 부인 강씨와 아들에 이르기까지 소현세자의 가족사는, 이렇게 철저히 비극으로 마무리됐다.
1637년 1월 삼전도의 굴욕 이후 청나라 심양에서 인질 생활을 한 소현세자.
청의 신문물을 보며 북학(北學)의 기운을 조선에 심으려 했던 소현세자의 생각은 부왕인 인조와 정면 충돌했고,
이는 결국 의문의 죽음으로 마무리됐다.
왕위는 세자의 동생인 봉림대군(효종)으로 이어졌고 이제 조선의 국시는 북벌(北伐)이 됐다.
소현세자의 죽음 후 북학이 시대 이념으로 자리를 잡기까지에는
다시 100여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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