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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

직접 반정에 앞장선 인조 -13

 

직접 반정에 앞장선 인조

 

부친·동생 죽음 후 자신 안위도 흔들린 탓

 

 

 

 

우리 역사에는 조선시대에만 두 차례의 반정(反正)이 있었다.

 

1506년의 중종반정과 1623년의 인조반정이다.

두 번의 반정에는 큰 차이점이 있다.

중종반정에선 중종이 반정 세력에 의해 추대되기만 했다.

반면 인조는 직접 반정 세력을 규합하는가 하면, 반정 당일에는 직접 친병(親兵)을 거느리고 반정에 참여했다.

 

‘인조실록’과 ‘연려실기술’에는 인조가 반정에 참여한 상황이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상(上·인조)이 의병을 일으켜 왕대비를 받들어 복위시킨 다음 대비의 명으로 경운궁에서 즉위했다.

상이 윤리와 기강이 이미 무너져 종묘와 사직이 망해가는 것을 보고 개연히 난을 제거하고 반정할 뜻을 뒀다.

무인 이서와 신경진이 먼저 대계를 세웠으니, 경진과 구굉· 구인후는 모두 상의 가까운 친족이었다.”

(인조실록)

 

인조실록에서는 인조가 직접 의병을 일으킨 점을 강조했다.

또 신경진, 구굉, 구인후 등 인조의 외가 쪽 인척이 다수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인조는 반정 당일 친히 병력을 이끌고 장단부사 이서의 군사를 맞았다.

 

‘연려실기술’에 기록된 내용도 비슷하다.

“이기축이 선봉장이 됐는데,

군사 모이는 시간이 늦어졌기 때문에 인조가 몸소 앞으로 마중을 가서 연서역(延曙驛·조선시대 서울을 왕래하는 공무여행자에게

말(馬)과 숙식을 제공하던 역)에 이르러 서로 만났다.

기축이 말에서 내려 길 왼편에 엎드려서 장단 군사가 온다고 아뢰니, 인조가 자기의 도포를 벗어서 입혀줬다.”

 

반정군은 3월 12일 밤 2경(오후 9~11시)에 홍제원(弘濟院)에 모이기로 약속했으나, 대장으로 임명된 김류가

 바로 합류하지 않아 작전이 지연되고 있었다.

김류는 고변이 있었다는 말을 듣고 지체하며 출발하지 않고 있었는데,

심기원과 원두표 등이 김류의 집으로 달려가 합류를 촉구했다.

 

김류의 도착이 늦어지자 반정군들은 즉석에서 이괄을 대장으로 지명했으나 김류의 출현으로 이괄의 대장 임명은 없던 일이 됐다.

김류에서 이괄로,

다시 김류로 대장이 바뀌는 등 반정 초기 어수선했던 과정은,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는 원인이 된다.

 

인조가 반정에 직접 참여한 이유는 아버지와 동생이 광해군 정권에 희생을 당한 점이 크게 작용했다.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은 선조와 후궁인 인빈 김씨 사이에서 세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인빈 김씨는 정비인 의인왕후보다도 선조의 총애를 받은 인물이었다.

맏형인 의안군은 일찍 죽었고, 선조가 후계자로까지 신임했던 둘째 형 신성군 역시 임진왜란 와중에 병으로 사망했다.

 

정원군은 능성 구씨와 혼인해 능양군, 능원군, 능창군의 세 아들을 뒀는데, 장남인 능양군이 바로 인조다.

정통성에서 취약성을 보인 광해군은 즉위 초반 형인 임해군을 처형하고,

1613년에는 동생인 영창대군을 처형하는 등 왕실의 경쟁자들을 제거했다. 1615년에는 신경희 등이 능창군을 왕으로 추대한다는

고변이 일어난 후 능창군은 교동도로 유배됐는데 거기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정원군에 대한 견제도 심했다. 대표적인 것이 경희궁 조성이다.

“새 궁궐을 새문동(塞門洞)에다 건립하는 것에 대해 의논했다….

술인(術人) 김일룡이 이궁(離宮)을 새문동에다 건립하기를 청했는데, 바로 정원군의 옛집이다.

왕이 그곳에 왕기(王氣)가 있음을 듣고 드디어 그 집을 빼앗아 관가로 들였는데…” (‘광해군일기’ 1617년 6월 11일)

 

정원군이 거처한 새문동에 왕기가 있다는 풍문이 있자

광해군이 이를 억누르기 위해 그 터를 빼앗아 경희궁을 조성했다는 얘기다.

정원군 아들인 인조가 왕이 됐으니 예언은 어찌 됐건 적중한 셈이다.

 

광해군 정권에서 동생이 죽고,

부친까지 끊임없는 견제에 시달리고 자신도 언제든지 위해를 당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 인조가 반정에 적극 가담한 이유였다.

인조는 왕이 된 후 많은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부친 정원군을 원종(元宗)으로 추숭하고 능호를 장릉(章陵)이라 했다.

부친을 왕으로 올림으로써 자신의 정통성을 확립한 것이다.

 

다시 반정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홍제원에 집결한 반정 세력은 인근의 홍제천에서 칼을 씻으며 결의를 다졌다.

‘세검정(洗劍亭)’이라는 말은 여기에서 유래했다.

 

3월 12일 밤 12시경 무렵 최명길, 김자점, 심기원 등이 군사를 이끌고 창의문(彰義門·서울의 북소문)에 이르렀다.

빗장을 부수고 들어간 반정군은 그들을 체포하러 온 금부도사와 선전관을 육조 앞길에서 베었다.

곧바로 창덕궁에 이른 반정군은 돈화문을 도끼로 찍었다.

이미 반정군과 내통하고 있었던 훈련대장 이흥립의 명에 의해 금호문은 쉽게 열렸다.

창덕궁 전각들에 불을 지르며 반정군은 광해군 침소를 급습했다. 반정군은 창덕궁 안 함춘원 나무 풀숲에 불을 지르는 것을

반정 성공의 신호로 삼았다. 만약 불길이 치솟지 않으면 가족들에게 자결을 요구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반정의 주도 세력은 서인인 이이와 이항복의 문하생인 김류, 이귀, 김자점, 신경진, 이괄 등이었다.

광해군 시절 정권은 북인들에 의해 장악되고 있었다.

권력에 소외됐던 서인과 남인들은 광해군과 북인 타도를 명분으로 세력을 규합했고

이 과정에서 왕통을 이을 수 있는 인조의 합류는 큰 힘이 됐다.

 

반정 세력은 신하 이윤이 중국 은(殷)나라 왕 태갑을 친 것을 거사 명분으로 삼았고,

인조가 선조의 친손으로서 총명하고 무용(武勇)이 뛰어나다는 점도 고려했다.

갑작스러운 반정군의 공격에 놀란 광해군은 잠을 자다 황급하게 일어나 내시에게 업혀서 궁궐 담을 넘었다.

이후 의관 안국신의 집에 피신해 있었으나, 의관 정남신의 고변으로 곧 끌려 나왔다.

그리고 “폐주(廢主)를 폐하고 새로운 왕을 세운다”는 반정군의 목소리를 들었다.

조선 역사상 두 번째 반정이 일어난 것이었다.

 

당시 광해군은 황급히 달아나면서 내시에게 종묘에 불이 난 것인지 물었다.

종묘에 불이 났다면 역성혁명이고, 그렇지 않다면 자신을 폐위시키는 사건임을 직감한 것이다.

그런데 종묘와 가까운 함춘원 근처에 불이 일어나면서 내시는 종묘에 불이 난 것 같다고 보고했고,

광해군은 자포자기 상태로 있다가 체포돼 끌려온 것이었다.

 

반정이 성공한 다음 날부터 광해군 세력에 대한 숙청이 시작됐다.

광해군을 보좌한 북인 중에서도 정권 실세들은 대부분 자결하거나 처형됐다. 광해군은 폐위된 직후 부인 유씨,

폐세자가 된 아들 부부와 함께 강화도로 유배됐다.

겨우 목숨은 부지했지만 강화로 옮긴 지 얼마 안 돼 아들 부부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폐세자는 연금된 집 안마당에 땅굴을 파고 탈출을 시도하다 발각됐다.

이에 인조는 폐세자에게 자살을 명했고 폐세자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폐세자빈 역시 이에 충격을 받고 자살했다.

1623년 10월 왕비 유씨가 세상을 떠나자 광해군은 혼자가 됐다.

그러나 타고난 체력 덕분인지 1636년 강화도 교동, 1637년 제주도 등 유배지를 옮겨 다니면서 그 모진 세월을 잘도 견디다가

1641년 7월 1일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했다.

젊은 시절 전장을 누빈 튼튼한 체력 때문에 유배 생활도 잘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연산군이 강화도에 유배된 직후 바로 죽은 것과 비교하면 광해군의 정신력과 체력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짐작할 수가 있다.

광해군 정권의 정신적 지주였던 정인홍도 고향인 합천에서 서울로 압송돼 왔다.

북인 세력으로서 겨우 처형을 면한 사람들은 대부분 투옥되거나 유배되면서 북인파는 거의 전멸됐다.

 

인조반정은 ‘폐모살제’와 광해군의 중립외교에 대한 비판이 주원인이었다.

이후 광해군대의 잘못된 정책을 만회하기 위해 재성청(裁省廳) 등의 기구가 만들어졌지만 개혁은 지지부진했다.

권세가들에게 뺏은 토지는 반정공신에게 다시 불하되는 등 공신들의 배를 불리는 문제점을 초래했다.

 

1624년 1월에 일어난 ‘이괄의 난’ 역시 반정의 명분에 큰 오점을 안겨준 사건이었다.

이괄은 반정 후 일등공신이 아닌 이등공신에 임명됐는데,

김류 등은 이괄이 논공행상(論功行賞)에 불만을 품고 있다 파악하고 그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그의 아들 이전이 반역 혐의로 체포되는 상황이 발생했고 이에 격분한 이괄은 평소의 울분까지 더해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의 기세에 인조는 서울을 버리고 공주로 피난하는 수모를 겪었다.

그러나 이것은 인조의 ‘수도 버리기’ 예행연습에 불과했다.

이후에도 인조는 두 번이나 더 수도를 버리면서 우리 역사상 가장 많이 수도를 버린 왕으로 기억되기도 한다.

그에게는 대내외적으로 너무나 큰 시련들이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