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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

임진왜란과 광해군의 부상 -10

 

임진왜란과 광해군의 부상

도망간 아버지(선조)와 왜군에 항전한 아들

 

 

 

 

선조 하면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것이 있다.

임진왜란 당시 의주로의 파천(播遷), 

즉 피난 행위다. 전시에 왕이 도성과 백성을 버리고 피난길에 나섰다는 것은 엄청난 치욕이었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직전 조선의 정세는 어떠했을까.

16세기의 일본은 전국시대 혼란기였다.

무로마치 막부의 권위가 실추되자 각지 호족들의 권력 쟁탈이 전개됐다.

오사카를 거점으로 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587년 규슈(九州) 정벌을 완료함으로써 전국시대 최후의 승리자가 됐다.

 

도요토미는 1587년 9월

일본 사신을 조선에 보내 조선 왕 선조의 입조(入朝·상국에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치는 것을 의미)를 기다린다고 전했다.

전통적으로 일본을 야만국으로 멸시했던 조선은

일본의 오만함에 분개하면서 사신 영접을 거부하려는 움직임까지 보였다.

결국 외교적 타협 끝에 1589년 11월 통신사 일행 명단이 작성됐다.

정사(正使) 황윤길, 부사(副使) 김성일, 서장관(書狀官) 허성 등으로 구성된 통신사 일행은 1590년 3월 6일 서울을 출발해

4월 29일 부산포에 도착하고 대마도를 거쳐 9월에 교토에 도착했다.

이때 도요토미는 특별한 이유도 없이 조선 사신의 접견을 미뤄 통신사 일행의 분노를 샀다.

 

도요토미의 접견은 11월에 가서야 조선 사신이 왕을 뵙는 의식으로 이뤄졌다.

통신사 일행은 ‘양국 우호를 두텁게 하자’는 간단한 내용의 국서를 올리는 의식을 갖췄다.

그런데 도요토미의 회답국서에는 “명나라를 칠 것이니 조선이 먼저 항복하고 입조하라”는

모욕적인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1591년 3월 귀국한 통신사 일행은 곧바로 사행 결과를 보고했다.

황윤길은 “도요토미는 담력이 있고 안광이 빛나 보인다”며 침략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했고, 허성도 이에 동조했다.

이에 반해 김성일은 “도요토미는 서목(鼠目·쥐새끼의 눈)으로 두려워할 존재가 아니다”라며 전혀 다른 내용을 보고했다.

통신사 일행이 상반된 보고를 한 후 선조를 비롯한 조정 대신들은 대체로 김성일의 의견에 동조했다.

1392년 건국 이후

200년간 평화 시대를 맞아 국방력이 해이해진 상태에서 전쟁 준비는 정치적으로도 큰 부담이 됐기 때문이다.

 

조정 예측과는 달리 1592년 4월 13일

도요토미는 규슈(九州) 나고야성에 결집시킨 총 20만 대군을 앞세워 조선을 침공했다.

선봉 부대는 4월 14일 부산진을 침공한 고니시 유키나가 부대였다.

부산진 첨사 정발이 항전하다 전사하고, 15일에는 동래부사 송상현이 동래성을 사수하다 전사했다.

 

실록은 그날의 혼란했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동래부가 함락되고 부사 송상현이 죽었으며, 그의 첩도 죽었다…

200년 동안 전쟁을 모르고 지낸 백성들이라 각 군현들이 풍문만 듣고도 놀라 무너졌다.” (선조실록, 1592년 4월 13일)

200년 가까이 큰 전쟁이 없는 시대가 지속되면서 ‘숭문천무(崇文賤武)’의 경향이 두드러졌다.

조선 초기 주요 진(鎭)을 중심으로 방어 체제를 구축하는 진관(鎭管) 체제 대신

1555년 을묘왜변을 계기로 채택한 제승방략(制勝方略) 체제는 방어에 큰 허점을 보였다.

 제승방략 체제는 유사시 필요한 방어 지역에 해당 지역 군사를 동원한 뒤, 중앙에서 파견된 장수가 지휘하는 방어체계다.

이는 한번 방어선이 무너지면 이후 적절한 대책을 세울 수 없다는 한계가 있었다.

 

일본군의 기습 침공에 조정은 우왕좌왕했다.

이일(李鎰)을 순변사로 삼고 신립(申砬)을 도순변사로 삼아 북상 중인 일본군을 막도록 했다.

그러나 4월 24일 이일이 상주에서 패배하고,

신립은 충주 탄금대의 넓은 들판에서 대패했다.

신립의 패전 소식이 들려오자 선조는 한양을 사수할 수 없다 판단하고 파천을 결정했다.

 4월 30일 선조는 평양으로 향하면서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했다.

 

왕이 한양을 버리고 피난 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백성들은 분노했다.

공노비, 사노비의 문서가 보관된 장례원(掌隷院)과 형조의 방화가 이어지고 궁궐에 대한 방화도 이어졌다.

 

한양을 떠난 이후에도 선조의 피난길은 시련의 연속이었다.

5월 1일 개성에 도착한 선조는 임진강 방어에 총력을 기울였다. 5월 3일 일본군이 한양에 입성하자 선조의 피난길도 빨라졌다.

5월 4일 평산, 5월 5일 봉산을 거쳐 5월 7일 평양에 도착했다.

임진강 방어선이 무너지고 전세가 악화되자 선조는 6월 10일 평양을 버리고 다시 의주로 향했다.

좀 더 위급한 상황이 발생하면 명나라로 가려는 뜻에서였다.

 

선조가 평양성을 떠난다는 소문이 돌자 평양행궁 앞은 온갖 무기를 든 난민들로 가득 찼다.

당시 유성룡은 남인, 윤두수는 서인의 영수였지만 당색을 초월하면서까지 선조의 평양성 포기를 반대했다.

유성룡은 “평양은 앞에는 강이 가로막고 있고 백성들도 굳은 다짐을 하고 있으며,

명나라와 가까워 며칠만 버티면 반드시 명의 구원군이 도착할 것”이라며 “(선조가 의주로 향한다면) 의지할 만한 터전이 없어지고

이는 곧 나라의 멸망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눈물로 호소했다.

 

윤두수는 의주 피난을 찬성했던 정철을 겨냥해 “내가 칼을 빌려 아첨하는 신하를 베고 싶어라”라는 시를 읊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일본군 북상에 위기를 느낀 선조의 마음을 돌릴 수는 없었다.

6월 11일 선조는 영변을 향해 길을 떠났고,

평양성은 이원익과 김명원 등의 항전에도 불구하고 일본군 수중에 떨어졌다.

 

일본군 공격에 평양성마저 함락되자 선조의 위기의식은 극히 높아졌다.

자신이 화를 당하면 왕조가 끊길 수도 있다는 인식에 이르자 아들 광해군의 왕세자 책봉을 서둘렀다.

그리고 혹시라도 있을 변고에 대비해 1592년 6월 14일 임시조정인 ‘분조(分朝)’를 구성했다.

 

선조가 의주에서 안전하게 피난 생활을 하는 동안 분조를 지휘한 광해군은 근왕병 모집을 위해 평안도, 황해도, 강원도 등 전국을 누볐다.

광해군의 이런 참전 경험은 이후 그가 왕으로 즉위했을 때 국제 정세를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선조는 광해군에게 강계로 향할 것을 명하면서

영의정 최흥원, 형조판서 이헌국, 우찬성 정탁, 부제학 심충겸 등 15명의 대신들로 하여금 광해군을 수행하게 했다.

광해군의 분조는 6월 14일 영변을 떠나 맹산, 양덕, 곡산 등을 거쳐 7월 9일 강원도 이천(伊川)에 도착해 이곳에서 20일간 머물렀다.

여름철이어서 자주 비가 내렸고 광해군 일행은 민가에서 자거나 노숙을 했다.

자신의 안위를 위해 여차하면 중국의 요동 지역으로 가려는 선조의 모습과 대조적으로,

광해군은 일본군이 둘러싸고 있는 전장(戰場)에서 분조를 지휘했다.

 

분조가 자리를 잡자 피난 갔던 관리들이 모여들고, 의병을 규합해 분조에 합류하는 사람도 생겨났다.

7월 17일의 ‘피난행록’에는

“평양을 지키지 못한 이후부터 온 나라 백성들이 대가(大駕)가 있는 곳을 알지 못해 크게 우러러 전하를 사모하고 슬퍼하고 있다가,

동궁께서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인심이 기뻐하며 마치 다시 살아난 것 같았습니다.

도망쳤던 수령들도 점차 관직으로 돌아오고 호령 역시 행해져 회복의 기회가 조금씩 가망이 있습니다”라고 기재돼 있다.

 

7월 27일 기록에도

 “경기도 의병들이 곳곳에서 봉기해 서로 앞을 다퉈 적을 잡아 적세가 조금 꺾이고 있습니다”라고 해

분조가 의병 봉기의 컨트롤타워가 됐음을 보여준다.

분조가 적극적인 항전 활동을 하는 시기 드디어 명나라 원병이 조선에 도착했다.

1593년 1월 8일 마침내 조명 연합군이 평양성을 수복했다.

평양성이 수복되자 더 이상 분조가 필요하지 않다고 판단한 선조는 광해군에게 대조(大朝)와 합할 것을 명했다.

비록 7개월간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7년간의 임진왜란 기간 중 가장 격전이 벌어진 시기가 1592년 4월부터 1593년 4월의 1년여임을 감안하면

분조는 가장 중요한 시기에 활약했음을 알 수 있다.

 

최소한 조정은 지켜야 한다는 의지에서 선조가 만든 분조는 결과적으로 왕세자였던 광해군이 급부상하는 계기가 됐다.

피난에만 급급했던 아버지와 달리 풍찬노숙 생활 속에서도 끝까지 의병을 독려했던 광해군의 모습은

백성들에게 새로운 희망으로 다가왔다.

선조가 죽기 직전까지도

아들 광해군에 대한 견제를 그치지 않았던 것은 임진왜란 때 보여준 자신의 처신에 대한 부담이 너무나 컸기 때문은 아닐까?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신병주의 ‘왕으로 산다는 것’] 에서 모셔온 글입니다.

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 / 그래픽: 정윤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