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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

후대 평가 극명하게 엇갈리는 선조 -9

 

후대 평가 극명하게 엇갈리는 선조

 

학문 꽃피웠지만 당쟁의 발단 제공

 

 

 

목릉성세(穆陵盛世)

선조 시대 학문과 문화의 전성기를 뜻하는 말이다.

 

조선 14대 왕 선조(1552~1608년)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극과 극이다.

목릉성세란 표현에서 알 수 있듯 학문과 문화의 전성기를 이끈 군주라는 평도 있지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마자 도성을 버리고 자신의 안위에만 급급했던 군주였다는 분석도 다수다.

최근에는 드라마 ‘징비록’의 영향 때문인지

아들 광해군을 끊임없이 견제하고 전쟁 영웅 이순신의 공을 시기하는 편협한 군주로 인식되기도 한다.

 

선조 시대는 사림파들이 본격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면서 당쟁이 시작되던 때였다.

중심인물은 이황, 조식, 이이, 이준경, 유성룡, 정철, 윤두수, 이산해, 이원익, 이항복, 이덕형, 신흠, 이수광 등으로

그 뿌리는 사림파였다.

이처럼 쟁쟁한 학자들이 동시에 배출됐다는 점을 감안하면

선조 시대는 학문의 진흥과 사림파 학자들의 정치 참여 기반을 조성했다는 긍정적인 요소도 엿보인다.

그럼에도 전쟁이라는 위기에서 보여준 무능함,

거기에다 1575년 동서분당으로 전개된 당쟁의 시작,

1589년의 기축옥사와 같은 대형 정치 참극의 방관자 등 선조에 대한 평가는 부정적인 요소가 많다.

 

선조는 조선 왕실에서 방계(傍系) 출신으로는 최초로 왕이 된 인물이다.

선조 이전까지 왕자의 난이나 계유정난, 중종반정과 같은 숱한 정변이 있었지만, 어찌 됐든 왕실의 적통에서 왕위가 계승됐다.

그런데 이 관례를 깨고 선조는 적통이 아닌 방계 계통에서 왕위에 올랐다.

선조의 아버지 덕흥대원군이 중종의 후궁인 창빈 안씨 소생임을 고려하면 선조의 뿌리는 후궁 출신 할머니다.

그럼 왜 왕실의 방계에서 왕이 나올 수밖에 없었을까?

 

명종의 아들인 순회세자가 요절한 후 왕실 적통에 후계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적통은 정비나 계비 소생 왕자를 말한다.

태조가 6남, 태종이 4남, 세종이 8남을 둔 것에서 알 수 있듯 15세기 왕들은 많은 왕자를 낳았다.

이는 한편으론 왕위 계승을 둘러싼 정변의 원인이 되기도 했지만, 적통 왕자가 왕위에 오를 수 있는 중요 기반이 됐다.

 

연산군을 거쳐 중종 이후 불안한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왕실에서 적장자가 생산되는 상황이 현저히 줄어든 것이다.

중종 뒤를 이어 즉위한 인종과 명종은 각각 장경왕후와 문정왕후의 외아들이었다.

왕실에 자손이 번창하지 못한 것은 후계구도에 큰 문제가 됐으며 명종대에 현실화됐다.

명종은 인순왕후 심씨와의 사이에서 순회세자를 뒀으나, 1563년 외아들인 세자가 13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이후 명종은 계비를 맞지 않은 상태에서 1565년 승하했고,

조선 역사상 처음으로 왕실의 적통에서 후계자를 찾을 수 없는 상황이 초래됐다.

 

그나마 명종이 생전에 미리 후계자를 지목해 둔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중종과 창빈 안씨 소생인 덕흥군의 세 아들 중 하원군과 하릉군을 제치고 세 번째 하성군을 지명했다.

어차피 후궁 출신 왕자를 후계자로 한 만큼 서열보다는 왕자로서의 자질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연려실기술’에는 하성군의 총명함을 전해주는 일화가 수록돼 있다.

여러 왕손들을 궁중에서 가르칠 때 명종이 익선관(왕이 평시에 착용하는 관)을 쓰라고 하자 하성군이 나이가 제일 어렸는데도

“이것이 어찌 보통 사람이 쓰는 것입니까?”라고 말해 명종이 기특하다고 여겼다고 한다.

 

15세기 후반부터 사림파가 중앙 정계에 진출하면서 기존 정치세력인 훈구파와 대립하기 시작한다.

네 번에 걸친 사화(士禍)는 훈구파와 사림파의 정치적, 사상적 대립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네 번의 사화 속에서 사림파는 적지 않은 피해와 함께 중앙 정계에서 다수가 숙청을 당했다.

그러나 사림파들은 지방 사회를 중심으로 입지를 확산시켜 나갔고,

1565년 문정왕후 사망 후 외척정치가 종식되면서 본격적으로 정계에 진출했다.

 

명종의 뒤를 이어 왕의 자리에 오른 선조는 일찍부터 사림파들과 교감을 갖고 있었다.

선조 즉위 후 처음에는 명종의 왕비인 인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했으나 왕이 총명하다 해 곧 수렴청정을 거두고

선조의 친정이 시작됐다.

선조는 성리학 이념에 충실했던 사림을 가까이하고

공신과 왕실의 외척들을 배척해 나가면서 사림파들이 정계의 주역으로 자리 잡도록 했다.

 

그러나 사림파가 집권자 위치에 서면서 그들 내부 간에 정치적 분열이 일어났다.

외척정치를 비판할 때는 사림파가 한목소리를 냈지만,

본인들이 정치 주도 세력이 되면서는 학파 성향이나 지역적 기반에 따라 서로 다른 정치적 색깔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

사림파 내부 분열의 조짐은

이황과 조식의 학통을 이은 영남학파와 이이와 성혼의 학통을 이은 기호학파를 중심으로 나타났다.

 

1572년 노련했던 정치인 이준경은 죽기 직전 조정에 붕당이 일어날 것을 경고했다. 그 예언은 적중했다.

1575년(선조 8년) 이조에서 인사권을 갖고 있는 전랑직을 둘러싸고

김효원과 심의겸이 대립하면서 당을 달리하는 분당(分黨)이 이뤄진 것. 사건의 전말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572년 영남학파 오건은 자신의 후임으로 김효원을 추천했다.

김효원은 이황과 조식의 문하에 출입한 학자로 1565년 문과에 장원급제한 인재였다.

그러나 인순왕후의 아우였던 심의겸은 오건의 추천을 거부했다.

심의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574년 김효원이 이조정랑에 임명된 후 상황은 역전됐다.

김효원의 후임자로 심의겸의 아우 심충겸이 거론된 것이다.

김효원은 심의겸이 외척인 점을 들어 이조전랑과 같은 요직을 맡길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결국 이것이 발단이 돼 김효원을 지지하는 세력과 심의겸을 지지하는 세력으로 당이 갈리게 됐다.

심의겸을 지지하는 세력은 주로 서울과 경기 지역에 기반을 둔 기호학파의 학자들이었으며,

김효원을 지지하는 세력은 이황과 조식의 학문을 이은 영남학파들이었다.

당시 김효원의 집이 서울 동쪽인 건천동(지금의 동대문시장 근처)에 있었고,

심의겸의 집이 서울의 서쪽의 정릉(지금의 정동)에 있다 해 동인과 서인으로 부르게 됐다.

1575년 동인과 서인의 분당 이후

본격화된 당쟁은 1589년의 정여립 역모 사건을 계기로 더욱 치열한 양상을 띠게 된다.

1589년 정여립에 대한 역모 고변으로, 정여립을 비롯한 관련자에 대한 체포령이 떨어졌다.

정여립의 자살로 역모는 마감되는 듯했지만 그와 연루된 인물들이 대거 체포되면서 본격적인 수사가 시작됐다.

 

선조가 서인의 강경파 정철을 위관(委官), 즉 수사 책임자로 임명한 이후 사건 규모는 더욱 커졌다.

11월 8일 정철은 동인 정언신을 대신해 위관이 됐는데 강경한 수사로 많은 연루자를 잡아들였다.

그런데 당시 역모 혐의로 이름이 오르내렸던 인물은 대부분 동인이었다. 서인은 이 사건을 정국 전환의 호재로 인식했다.

선조 입장에서도 ‘천하는 공물(公物)’과 같은 과격한 주장을 하는 동인 강경파의 척결이 급선무였던 만큼 서인에게 힘을 실어줬다.

동인은 특히 화담학파와 남명학파 학자들의 피해가 컸던 반면 같은 동인인 퇴계학파는 별다른 피해가 없었다.

 

기축옥사의 파장은 결국 동인 내 분열로 이어졌다.

동인이라는 한 배를 타고 있던 퇴계학파의 중심인 유성룡이 기축옥사의 대공세에 미온적인 태도로 일관하자

남명학파와 화담학파 문인들이 주축이 된 세력은 퇴계학파에 분노했다.

기축옥사를 계기로 정인홍은 같은 동인인 유성룡과 완전히 선을 그으면서 당을 달리하게 된다.

결국 이 사건을 계기로 동인의 한 축을 이뤘던 남명과 화담학파는 북인으로, 퇴계학파는 남인으로 갈라섰다.

선조 후반의 당쟁은 서인과 남인, 북인의 대립으로 이어졌다.

 

선조 즉위 후 사림정치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렸지만,

사림파 간의 정치적 다툼은 조선 중기 이후 정치적으로 당쟁의 시대로 나아가는 단서를 제공했다.

선조대에는 동서분당에 이어,

동인 내에서 남인과 북인의 분열까지 이루어지면서 정파 간 대립이 치열하게 전개됐다.

 

정파는 학파를 모집단으로 한 만큼 당파 간 학문적인 경쟁과 우위도 심해졌다.

 이 과정에서 성리학이 이론적으로 강화되고 이황, 조식, 이이, 성혼 같은 학자들이 배출되는 빛도 있었으나

조선사회가 전체적으로 문을 숭상하고 무를 천시하면서 국방이 약화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선조의 즉위 이후 전개된

학파 간의 경쟁과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조선왕조 앞에는 최대의 국난이라는 폭풍이 다가오고 있었다.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신병주의 ‘왕으로 산다는 것’] 에서 모셔온 글입니다.

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 / 그래픽: 정윤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