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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

중종이 가장 아꼈던 조광조에게 사약을 내린 연유 -7

 

중종이 가장 아꼈던 조광조에게 사약을 내린 연유

정치적 길이 달랐던 위험한 동반자

 

 

 

우리 역사 속에서 가장 개혁지향적인 인물을 꼽으라면 조광조(1482~1519년)가 세 손가락 안에 들 것이다.

성리학 이념을 바탕으로 왕도정치와 도덕정치의 실천을 추진했던 젊은 개혁자 조광조는

 결국 정치적 후원자이자 동반자였던 중종에 의해 사약을 받게 된다.

 

16세기 초반 화려하게 등장했다가

5년 만에 좌절된 그의 정치 행적은 당시에도 보수와 현실 정치의 벽이 얼마나 두터웠던가를 여실히 보여줬다.

 

중종과 조광조의 만남부터 실각까지의 과정은 어땠을까.

1506년 9월 중종반정이 일어났다.

독재정치의 모든 것을 보여줬던 연산군이 폐출되고 그의 이복동생인 진성대군이 중종으로 추대됐다.

 반정에 의해 왕위에 오른 중종은 처음엔 반정공신들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왕자 시절 혼인했던 단경왕후 신씨는 연산군 처남인 신수근의 딸이라는 이유로 남편이 왕이 된 순간 폐위됐다.

이후 신씨는 인왕산에 치마를 걸어 두고 남편을 그리워했다.

훗날 이 바위에는 ‘치마바위’라는 이름이 붙었다.

 

반정 초기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 등 반정공신의 위세는 대단했다.

왕과 신하가 함께하는 회의에서 반정공신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서면 그 뒤에 중종이 따라 일어날 정도였다.

공신들 득세 속에서 제자리를 찾지 못하던 중종은 재위 8년이 됐을 무렵, 반정 3인방이 모두 사망하면서 기회를 잡았다.

그리고 기존 훈구 세력을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정치 파트너를 구하기 시작했다.

그때 중종의 눈에 들어온 인물이 바로 사림(士林)파의 선두주자 조광조였다.

 

조광조는 서울 출생으로 전형적인 조선 관리인 조원강의 아들로 태어났다.

개국공신 조온(1347~1417년)의 5대손으로 훈구가문 출신이었지만 사림파의 길을 걷게 된 인물이다.

17세 되던 해에 어천찰방(어천은 평안북도 영변, 찰방은 역참을 관리하던 관리)이 된 아버지를 따라 어천에 간 조광조는

인근 지역인 희천에 귀양 와 있던 김굉필에게 학문 배울 기회를 얻었다.

김굉필은 김종직을 계승한 영남사림파의 핵심 인물로서 1498년 무오사화로 인해 유배를 와 있던 터였다.

 

두 사람은 각각 영남과 서울을 기반으로 했던 사람이었다.

전혀 이뤄지지 않을 것 같았던 만남이었지만, 무오사화로 말미암아 만남이 가능해졌다.

이 만남은 조광조가 사림파의 학통을 계승하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됐다.

 

조광조는 어려서부터 행실이 바르고 아이답지 않게 근엄하며 남의 실수를 용서하지 않는 엄격함을 보였다.

보통 사람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뜻을 높이 세우고 학문에 열중하는 그를 가리켜

사람들은 ‘광인(狂人)’이라거나 ‘화태(禍胎·화의 태반)’라고 할 정도였다.

조광조는 용모도 매우 빼어났던 것으로 보이는데, 조선 중기의 학자 유몽인이 쓴 ‘어우야담’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조광조는 얼굴이 뛰어나게 아름다웠는데,

그는 거울을 볼 때마다 매번 ‘이 얼굴이 어찌 남자의 길상(吉相)이겠는가?’라고 탄식했다.”

조광조는 1510년 과거 초시에 응시해 장원으로 합격한 후 성균관에 들어갔다.

그리고 1515년 중종이 성균관을 방문해 치룬 알성시에 2등으로 급제하면서 국왕인 중종의 주목을 받았다.

당시 중종은 성균관을 찾아 새로운 인재를 구하려 했다.

중종은 “오늘날과 같이 어려운 시대에서 옛 성인의 이상적인 정치를 다시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라는

책문(策問)을 던졌고, 조광조는 “성실하게 도를 밝히고(明道) 항상 삼가는 태도(謹獨)로 나라를 다스리는 마음의 요체로 삼을 것”을

핵심 요지로 하는 답안을 냈다.

 

이 책문을 계기로 가능성만 있었던 학자 조광조는 중종의 파격적인 신임을 얻게 된다.

1515년 조지서 사지(司紙)를 시작으로 성균관 전적, 사헌부 감찰, 사건원 정언 등 언관직을 두루 거치는 등 승진을 거듭했다.

1518년 중종은 조광조를 오늘날 검찰총장에 해당하는 사헌부 대사헌에 임명하고 개혁정책을 진두지휘하게 했다.

중종의 절대적인 신임 속에 조광조는 신진 세력의 선두에 서서

그가 구상하던 성리학적인 이상사회를 정치 현실에 구현하기 위한 다양한 개혁정책을 시도했다.

 

조광조는 개혁의 선결 조건은 왕이 먼저 모범적으로 왕도정치를 수행하는 것이라 믿었다.

왕과 신하가 정치 현실과 학문을 토론하는 장인 경연(經筵)을 활성화하면서, 중종을 이상적인 군주로 만들려 했다.

또 성리학 이념에 입각한 교화가 백성들에게 두루 미치는 사회의 실현을 추구했다.

 

도교의 제천행사를 주관하던 관청인 소격서를 폐지하고,

성리학적인 이념을 전파할 수 있는 ‘소학(小學)’과 향약(鄕約)의 보급에 힘을 쏟았다. 지방 구석구석까지 성리학의 이념을 담은 책인

‘소학’을 보급해 지방의 사림들이 주도하는 향촌의 자치규약 향약을 실시하게 했다.

민생을 위한 개혁에도 착수했다.

당시 농민을 가장 괴롭힌 공물(貢物·지방 특산물을 바치는 세금)의 폐단을 시정했으며 균전제를 실시해 토지의 집중을 완화하고

토지 소유의 상한선을 정해 부유층의 재산 확대를 막으려 했다.

추천제 시험인 현량과(賢良科)를 실시해 개혁 세력 확보에도 힘을 기울였다.

그 결과 조광조와 뜻을 같이하는 김식(金湜), 김정(金淨), 박상(朴祥), 김구(金銶), 기준(奇遵) 등 개혁 성향의 젊은 사림이

대거 정계에 등장해 조광조의 지원군이 됐다.

 

조광조 일파의 개혁정책은 백성들의 상당한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그의 인기가 올라갈수록 그에게 큰 부담을 느꼈던 훈구파는 보다 조직적으로 반발하기 시작했다.

세종대 이후 기득권 세력으로 특권을 누렸던 훈구파는 조광조의 개혁정책으로 자신들 입지가 좁아지자 위기감을 느꼈다.

특히 조광조 일파가 반정공신의 ‘위훈삭제(僞勳削除)’까지 들고나오자 이들의 불만은 최고조에 달했다.

 

위훈삭제란

중종반정 때 공을 세운 공신에게 준 훈작(勳爵) 중 가짜로 받은 것을 색출해 이를 박탈하자는 것이다.

공신의 친인척이나 연줄을 이용해 훈작을 받은 사람의 토지나 관직을 몰수함으로써 구(舊)세력을 제거하고

신진 세력 중심으로 정치판을 재편하려 한 조치였다.

중종반정 때 박원종 등의 추천으로 확정된 공신은 무려 126명으로 이 숫자는

조선의 개국공신(45명)이나 이후 발생한 인조반정 때 공신(53명) 숫자를 훨씬 뛰어넘는다.

후에 중종도 공신에 대한 재조사를 명했는데 그 숫자만 70명이 넘었다.

조광조 일파는 가짜로 훈작을 받은 자들을 조사해

이들에게 준 관직, 토지, 노비와 저택 등을 몰수해 정치 세력의 전면적인 물갈이를 추진하려 한 것이다.

 

중종과 조광조의 관계는 매우 긴밀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한편으로는 서로가 견제하고 갈등하는 위치에 있었다.

반정으로 즉위한 이래 불안정한 그의 왕위를 위협하는 사건이 계속 이어지던 시절,

중종은 성리학적 이념으로 무장한 조광조를 발탁해 상당한 정치적 이익을 얻었다.

폐비 신씨의 복위 문제나 정몽주와 김굉필의 문묘종사 문제에서 중종을 위협하던 반정 세력들은 성리학의 원칙에 충실한

조광조의 등장과 함께 정치적으로나 이념적으로 상당히 위축됐다.

 

그러나 반정에 의해 추대된 왕이긴 했지만, 중종 역시 ‘왕권 추구’라는 왕의 본능을 포기한 왕은 아니었다.

‘개혁’에는 동의했지만,

왕권을 점차 제한하려는 조광조의 신권 강화 입장은 점차 중종과 조광조의 사이를 멀어지게 했다.

한때는 개혁의 동반자였지만 중종은 왕권을 포기할 수 없었고,

조광조는 개혁정치의 완성을 위해서는 신권을 포기하지 않는 소신의 정치인이었다.

 

서로 추구하는 정치적 길이 달랐기에 두 사람은 어떤 계기가 생기면 철저히 대립할 수도 있는 ‘위험한 동반자’였다.

절대적인 신임을 받는 신하라 해도 국왕의 입장과 신하의 입장이 다를 수밖에 없었던 것은

정도전과 이방원의 대립이나 세조의 왕위 찬탈과 사육신사건에서 이미 증명된 바 있다.

 

조광조는 신하가 왕에게 충성해야 하지만,

왕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시대 조선 사회가 추구해야 하는 성리학 이념이라고 판단했다.

조광조는 세조나 연산군대 정치는 결국 왕이 성리학의 이념 위에 군림했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 것으로 인식했고

중종과 같은 왕도 얼마든지 그런 전철을 밟을 수 있으리라 여겼다.

따라서 중종이 자신만의 정치적 역량을 가진 군주로 성장해 독재권을 행사하기 전에

성리학 이념이라는 견제장치로 중종을 압박하려 했다.

 

그러나 즉위 14년 차가 된 중종 또한 이제는 더 이상 조광조에게 휘둘릴 나약한 왕이 되기를 원치 않았다.

1519년(중종 14년) 11월 훈구 세력들은 밤에 경복궁 북문인

 신무문(神武門)을 통해 왕궁에 잠입해 중종을 만나 조광조 일파가 당파를 만들어 조정을 문란하게 한다고 비방했다.

 

중종은 드디어 조광조를 비롯해 그와 함께 개혁정책을 추진하던 신진 세력들에 대한 대대적인 체포령을 내렸다.

기묘사화의 시작이었다.

 

조광조는 처음 사사(賜死)의 명을 받았으나 영의정으로 있던 정광필의 적극적인 비호로 목숨을 건지고 전라도 능주에 유배됐다.

그러나 훈구파들이 정국의 실세가 된 후,

유배지에서 사약을 받고 38세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중종과 조광조의 위험한 동거는 비극으로 끝을 맺었지만,

조광조는 오늘날까지 개혁의 아이콘으로 우리에게 기억되고 있다.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신병주의 ‘왕으로 산다는 것’] 에서 모셔온 글입니다.

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 / 그래픽: 정윤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