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종이 최고 권력자인 장인(한명회)을 몰아낸 사연-4
화려했던 압구정(鴨鷗亭), 추락의 빌미로
한명회(韓明澮)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조선 전기 대표적인 '권모술수의 달인'이었다는 점이다.
한명회는 수양대군(세조)의 대표적인 참모이자 지략가로
1453년 계유정난(癸酉靖難·수양대군이 왕위를 빼앗기 위해 일으킨 사건)을 성공시킨 주역이다.
수양대군을 왕으로 만든 '킹메이커'였을 뿐 아니라 두 딸을 예종과 성종에게 시집보냄으로써 왕실의 장인으로 오래도록 굳건한
지위를 유지했다. 또 세조에서 성종에 걸쳐 행해진 다섯 번의 공신 책봉 과정에서 네 번이나 일등공신에 올랐다.
한명회가 세조의 총애를 바탕으로 성종대까지 권력을 꾸준히 유지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장면이 있다.
바로 13세의 사위 '잘산군', 즉 성종(成宗)을 왕위에 올리는 데 성공한 순간이다.
그러나 장인의 힘으로 왕위에 오른 성종은 그리 만만한 왕이 아니었다.
성종에게 있어서 장인 한명회는 최고의 정치 후원자였지만, 새 시대로 나가는 데 있어서는 최대의 걸림돌이 되는 존재기도 했다.
1469년 예종이 14개월의 짧은 왕위를 뒤로하고 승하했다.
예종에게는 안순왕후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4세의 아들 제안대군과 요절한 의경세자(세조의 장남, 후에 덕종으로 추존)의 맏아들
월산대군이 있었지만, 왕위는 의경세자의 차남인 13세의 잘산군으로 결정됐다.
왕이 죽은 그날 바로 다음 왕을 결정하는 파격적인 이 조처의 주인공은 당시 왕실의 최고 어른이었던 세조의 비 정희왕후 윤씨였다.
잘산군은 어떻게 이렇게 전격적으로 왕위에 오를 수 있었을까?
세조 사후 예종이 즉위하는 과정에서부터 왕실은 다음 왕위 계승과 관련해 복잡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
세조의 맏아들은 의경세자였다.
세조가 단종에게 왕위를 빼앗은 후 18세로 왕세자에 책봉됐으나, 2년간 병으로 앓다가 사망했다.
이를 두고 당시 사람들은 "세조가 어린 조카를 죽인 죗값을 받은 것"이라고 수군거렸다.
맏아들이 죽자 자연히 왕세자의 자리는 차남인 해양대군(예종)의 차지가 됐다.
1457년 형의 죽음으로 8세에 세자로 책봉된 예종은 세조 사후인 1468년 9월, 19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예종은 곧바로 왕권을 행사하지 못했다. 아직 20세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어머니인 정희왕후의 수렴청정을 받아야 했다.
여기에 더해 세조 때 막강한 권력을 형성한 신숙주, 한명회, 구치관 등 훈구대신들의 정치적 입김도 만만치 않았다.
예종은 14개월이라는 짧은 치세 동안 왕권 강화를 시도했지만
확고한 세력 기반을 갖춘 훈구대신들의 장벽 속에서 별다른 권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병으로 승하했다.
예종이 왕으로서 큰 역할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예종 사후 왕위 계승 결정권은 자연히 대비인 정희왕후와 훈구대신들에게 넘어갔다.
이 상황에서 한명회는 정희왕후를 움직여 자신의 사위 잘산군을 왕으로 올리는 데 성공했다.
당시 성종은 예종의 아들인 제안대군, 형님인 월산대군에 이어 넘버3였다.
그럼에도 대비인 정희왕후는
제안대군은 네 살로 너무 나이가 어리고 월산대군은 병약하다는 이유로 잘산군을 예종의 후계자로 지명했다.
정희왕후는 훈구대신으로 조정 분위기를 주도하는 한명회의 정치적 후원을 받음으로 왕실을 안정시킬 수 있다고 판단했을 터다.
예종이 왕세자 시절 딸(장순왕후)을 시집보냈지만,
예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딸이 요절하는 바람에 왕의 장인이라는 프리미엄을 마음껏 누려보지 못했던 한명회.
그러나 다시 한 번 사위 성종을 왕위에 올리는 정치력을 발휘함으로써
세조 때부터 승승장구한 그의 이력에는 왕의 장인이라는 영예가 더해졌다.
덕분에 그야말로 세조에서 성종에 이르기까지 '끝나지 않는' 한명회 시대를 연출할 수 있게 됐다.
실록 기록에 따르면
"모든 형벌과 상을 주는 것이 모두 그(한명회)의 손에 있었다(1461년 9월 26일)"는 내용이 나와 흥미를 끈다.
그만큼 한명회의 권력은 대단했던 모양이다.
한명회의 졸기(卒記·죽은 후 그 인물에 대한 기록)는 한명회의 위상을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권세가 매우 성해 따르는 자가 많았고 찾아오는 손님들이 문에 가득했으나, 응접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일시의 재상들이 그 문에서 많이 나왔으며 조관(朝官)으로서 채찍을 잡는 자까지 있기에 이르렀다."
성종이 왕으로 즉위한 후 한명회의 위세는 더욱 커졌다.
최고 권력을 구가하던 한명회는 1476년(성종 7년) 한강가에 '압구정(鴨鷗亭)'이란 정자를 지었다.
압구정이란 이름은 명나라 사신인 예겸이 지어준 것이다.
'압구'는 갈매기를 가까이한다는 뜻으로 갈매기를 벗하며 유유자적하게 말년을 보낸다는 뜻을 담고 있다.
갈매기를 벗 삼아 여생을 마무리 짓겠다는 의지로 지었지만 압구정은 권력의 정점에 있었던 한명회의 위상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공간이었다.
압구정이 완성되던 날,
성종은 이를 기려 직접 시를 지어 내릴 정도로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이듬해 한명회를 견제한 젊은 관료들의 반발로 현판에 걸린 성종의 시는 철거됐다.
사실 당시 한강 주변에는 왕실 소유 '희우정'이나 '제천정' 등만 있었다.
최고 조망을 가진 곳에 신하의 신분으로 정자를 건립한 것 자체만으로도 한명회의 위상이 어떠했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압구정은 한명회의 화려했던 정치 인생에 종지부를 찍는 부메랑으로 날아왔다.
1481년(성종 12년) 6월의 일이다.
압구정의 명성이 중국까지 알려지면서 조선을 방문한 사신이 성종을 통해 압구정 관람을 청했다.
이에 한명회는 장소가 좁다는 이유를 들어 거절의 뜻을 보였다.
성종은 아무리 장인이지만 왕의 뜻을 거역하는 한명회의 태도가 불쾌했다.
더구나 한명회가 왕실에서 사용하는 용봉(龍鳳)이 새겨진 천막을 사용하게 해준다면 잔치를 벌이겠다는 이야기를 하자
분노가 극에 달했다.
이에 성종은 제천정에서 잔치를 치르고, 희우정과 제천정을 제외한 정자는 모두 없애겠다는 강경한 선언을 했다.
'성종실록(1481년 6월 25일)' 기록을 보자.
"강가에 정자를 지은 자가 누구누구인지 모르겠다.
이제 중국 사신이 압구정에서 놀면 반드시 강을 따라 두루 돌아다니면서 놀고야 말 것이고,
뒤에 사신으로 오는 자도 다 이것을 본떠 유람할 것이니, 그 폐단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제천정의 풍경은 중국 사람이 예전부터 알고,
희우정은 세종께서 큰 가뭄 때 이 정자에 우연히 머물렀다가 마침 영우(靈雨)를 만났으므로 이름을 내리고 기문을 지었으니,
이 두 정자는 헐어버릴 수 없다.
그 나머지 새로 꾸민 정자는 일체 헐어 없애어 뒷날의 폐단을 막으라."
왕의 권위를 우습게 보는 한명회에게 확실하게 자신의 모습을 각인시키려는 강경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왕보다는 사위라는 인식이 강해서였을까?
한명회는 제천정에서 벌이는 잔치에 '아내가 아파서 나갈 수 없다'는 핑계를 댔는데 이게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한명회에 대한 성종의 의중을 알아차린 승지와 대간들은 연이어 한명회를 비난했다.
성종은 잘못을 꾸짖는 선에서 일을 매듭지으려고 했지만 반발이 계속되자 결국 한명회의 국문을 지시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명회는 추락했다.
즉위 직후 밀월관계였던 성종과 한명회 사이의 균열을 보여주는 사건은 이전에도 있었다.
1476년 성종의 나이 스무 살이 되자 대비인 정희왕후가 수렴청정을 거두고 성종에게 친정을 시키겠다는 언문교지를 내렸다.
이 조치에 대해 한명회는
"동방의 백성들을 버리는 것이며, 대궐에 나아가 한잔 술을 편히 마시지 못할 것"이라며 반대 의견을 표시하고
계속 수렴청정해줄 것을 건의했다.
한명회와 정희왕후 사이가 워낙 각별해서 나온 발언이긴 했지만,
성종 입장에서는 성년이 된 자신을 여전히 믿지 못하는 장인에 대해 불만을 가질 법도 했다.
최고의 권력이었지만, 추락도 한순간이었다.
그를 추락하게 한 주역이 자신이 왕으로 만들어준 성종이라는 사실은 한명회의 마음을 더욱 씁쓸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성종에게 있어 한명회는 이제 장인이자 자신의 후견인이라는 측면보다는 새로운 시대에 극복해야 할 훈구파의 중심이었다.
성종은 신숙주나 한명회와 같은 훈구파 빈자리에 김종직 등 사림파를 등용했고
그렇게 새 시대를 열었다.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신병주의 ‘왕으로 산다는 것’] 에서 모셔온 글입니다.
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 / 그래픽: 정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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