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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

어머니 그늘에 가려 존재감 없었던 명종 -8

 

어머니 그늘에 가려 존재감 없었던 명종

 

아들도,

남편도 외롭게 만든 문정왕후

 

 

 

 

조선의 13대왕 명종(1534~1567년) 하면 그다지 떠오르는 이미지가 별로 없다.

오히려 그의 어머니인 문정왕후(文定王后)가 훨씬 강한 인상으로 와 닿는다.

12세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후 명종은 문정왕후의 수렴청정(垂簾聽政·발을 드리우고 왕의 뒤에서 하는 정치)을 받게 된다.

이전에도 예종과 성종이 정희왕후의 수렴청정을 받은 적이 있지만 형식적인 선에서 그쳤다.

제대로 수렴청정을 받은 최초의 왕이 바로 명종이다.

 

명종 시대에는 문정왕후 이외에도 외삼촌 윤원형과 그의 정부 정난정, 문정왕후가 힘을 실어준 승려 보우(普雨)까지

막강한 인물들이 줄줄이 등장하면서 명종은 왕이면서도 늘 조연일 수밖에 없었다.

 

명종은 중종과 문정왕후의 아들로 1534년에 태어났다.

그가 태어났을 때 왕세자는 이복형님인 인종이었다.

중종반정 직후 중종의 첫 왕비인 단경왕후 신씨가 폐위되면서 중종의 계비가 된 장경왕후는 왕실의 기대 속에 인종을 낳았으나,

1515년 산후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당시 장경왕후를 간호했던 의녀가 바로 드라마로도 유명한 ‘장금(長今)’이다.

 

장경왕후가 사망하고 새로이 중종의 계비가 된 이가 바로 문정왕후 윤씨였지만,

1520년 인종이 6살의 나이로 세자에 책봉되면서 중종의 후계구도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는 듯 보였다.

그러나 1534년 문정왕후가 경원대군(후의 명종)을 낳으면서 중종의 후계구도는 복잡한 권력 투쟁의 양상을 띠게 된다.

특히 인종의 외삼촌 윤임과 명종의 외삼촌인 윤원형을 중심으로 한 외척 간 대립이 심해지고

훈구와 사림이라는 대결구도가 강화되면서 권력 투쟁은 보다 치열하게 전개됐다.

 

윤임을 지지한 유관·유인숙 등은 대윤(大尹)으로,

윤원형을 지지한 윤원로·윤개 등은 소윤(小尹)으로 지칭됐다.

중종 후반의 권력 투쟁은 대윤 세력에 대해 소윤 세력이 저항하는 방향으로 진행됐는데,

이 과정에서 명종의 생모 문정왕후의 존재는 큰 변수였다.

 

양측의 팽팽한 대립 속에서 1544년 11월 중종이 사망했다.

고명대신(顧命大臣)들의 주선으로 인종이 왕이 되고 대윤이 권력을 잡았다.

왕위에 오른 인종은

 이언적, 송인수, 김인후 등 사림파를 등용하고 기묘사화로 희생된 조광조, 김정 등을 복관시키는 조치를 취하면서

외척정치를 청산하려 했지만 재위기간이 고작 1년으로 너무 짧았다.

 

왕위는 1년 전 경원대군에 책봉됐던 인종의 동생 명종이 이어받았다.

당시 12살의 어린 나이였던 터라 관례에 따라 생모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됐다.

명종 즉위 후 정국은 급변했다.

문정왕후와 윤원형은 1545년 소윤 세력과 유관, 유인숙, 권벌 등 사림파를 숙청하는 을사사화를 일으키면서

공공연히 외척정치 시대가 열렸음을 알렸다.

 

약 15년 전, 중종과 명종 시대를 배경으로 한 사극 ‘여인천하’가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면서 관심을 끈 적이 있다.

이 드라마에서 여인들의 파워는 막강했다.

그중에서도 핵심은 바로 문정왕후였다.

 

중종대 후반부터 세자인 인종을 견제하면서 자기 소생인 명종의 즉위를 이끌어낸 문정왕후.

그녀는 아들을 대신해 수렴청정의 방식으로 국정의 최고 위치에 섰다. 그런데 우리 역사에는 별로 좋지 않은 결과를 이끌어냈다.

문정왕후는 윤원형, 정난정과 외척정치 전성시대를 연출한 동시에 반대파를 가혹하게 탄압했다.

1545년 을사사화에 이어 벌어진

1547년의 양재역 벽서(壁書) 사건으로 인해 사림파는 재기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1547년(명종 2년) 9월 18일의 ‘명종실록’에는 부제학 정언각이 선전관 이노와 함께 봉서(封書)를 올린 상황이 기록돼 있다.

“신의 딸이 남편을 따라 전라도로 시집을 가는데,

부모 자식 간의 정리에 한강을 건너 양재역까지 갔었습니다.

그런데 벽에 붉은 글씨가 있기에 봤더니 국가에 관계된 중대한 내용으로서 지극히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이어 보고한 내용은 ‘여주(女主)가 위에서 정권을 잡고 간신 이기(李芑) 등이 아래에서 권세를 농간하고 있으니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서서 기다릴 수 있게 됐다’는 충격적인 것이었다.

 

문정왕후를 ‘여주’라 조롱하고,

그 아래에서 이기 등이 권세를 농간하고 있다는 벽서의 파장은 컸다.

중종의 아들인 봉성군 등 3명이 역모 혐의로 처형되는 등 많은 사람이 희생됐다.

또 사림파의 중심 이언적, 백인걸, 노수신, 유희춘 등 20여명이 처형되거나 유배를 갔다.

반대파의 씨가 말려지자 윤원형은 독재 권력을 유감없이 휘둘렀다.

 ‘윤원형의 재산이 나라의 재산보다 많다’는 말이 회자됐는가 하면

왕후가 어린 왕을 꾸짖고 심지어 매를 들었다는 등 별의별 소문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상황이 계속 심해지다 보니

 1555년 조식은 상소문을 올려 명종을 고아, 문정왕후를 과부로 표현하면서 나라가 심각한 위기 상태임을 지적했다.

1559년부터 3년간 전국을 휩쓴

임꺽정 일당의 반란 또한 외척정치의 결과물로 농민 생활이 파탄에 이르러 일어난 사건이었다.

 

문정왕후는 민생을 외면했을 뿐더러 자신의 기호대로 정치를 했다.

불교 중흥 정책이 대표적이다.

1550년(명종 5년) 12월 문정왕후는 친서를 내려 선종과 교종 양종의 복립(復立)을 명하면서 봉은사를 선종의 본사로,

봉선사를 교종의 본사로 삼았다.

사찰이 일방적으로 빼앗겼던 토지를 반환하게 하고, 연산군 때 폐지된 승과 제도까지 부활시켰다.

 

조선이 취한 불교 탄압 정책을 정면으로 거스른 정책이었던 만큼 신하들의 반대는 물론이고 성균관 유생들까지 나서

동맹휴학으로 맞섰지만 문정왕후는 뚝심 있게 불교 중흥을 추진했다.

특히 봉은사 주지로 임명된 보우는 온갖 비난의 대상이 돼 보우를 죽이라는 장계가 75건이나 올라올 정도였다.

현재 서울 강남의 최대 중심지에 자리를 잡고 있는 봉은사는

 450년 전 문정왕후가 보우와 함께 불교 중흥의 마지막 꽃을 피워보려 했던 공간이었다.

 

당시 사관들은 그 상황을 이렇게 정리하면서 문정왕후의 불교 중흥 정책을 비판했다.

“이때 세자를 갓 잃자 요승 보우가 복을 기원해야 한다는 말을 떠벌려 무차대회(불교 법회의 한 종류) 베풀기를 청했는데,

문정왕후가 그 말에 혹해 그대로 따랐다. 승려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어 몇 천 명이나 되는지 모를 정도였으며,

조각 장식의 물건을 극도로 화려 사치하게 해 옛날에도 보지 못하던 정도였다.

(…)

또 배위(拜位)를 마련해 마치 왕이 부처에게 배례하게 하는 것처럼 했으니, 그 흉악함과 패악을 형언할 수 없었다.”

 

그러나 문정왕후도 세월의 벽은 넘지 못했다.

1565년 4월 창덕궁 소덕당에서 65세를 일기로 문정왕후가 사망하면서 외척정치는 종말을 고한다.

그녀가 죽었을 때 사관은 실록에

‘서경(書經)’을 인용해 “암탉이 새벽에 우는 것은 집안의 다함이다”라고 적었다.

날개를 잃은 윤원형과 그의 첩 정난정은 사림파의 탄핵을 받고 황해도 강음으로 유배된 후 최후를 맞았다.

보우는 유생들의 탄핵을 받아 제주도에 귀양을 갔다 그곳에서 목사 변협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외척이 최고의 권력을 휘두르면서 정상적인 정치 질서가 자리 잡지 못하고 민심이 이반하던 시대에,

문정왕후는 바로 그 중심에 있었다.

문정왕후는 사후 중종 곁에 묻히는 것이 소원이었다.

그러나 이미 중종의 무덤 옆은 인종의 생모인 제1계비 장경왕후가 지키고 있었다.

1542년 문정왕후는 보우와 의논해 현재의 고양시 서삼릉에 있던 중종 왕릉을 선릉(성종의 무덤) 부근으로 옮겼다.

중종의 무덤이 아버지인 성종 곁에 가야 한다는 것이 명분이었다.

 

그러나 새로 옮긴 중종의 무덤(정릉, 선릉과 함께 보통 선정릉으로 지칭된다)은 지대가 낮아 침수 피해가 잦았다.

홍수 때는 재실(齋室)까지 물이 차기도 했다.

결국 문정왕후 사후 아들 명종은 어머니의 무덤을 태릉(泰陵)으로 조성했다.

 

중종 곁에 묻히려던 그녀의 꿈을 아들이 지켜주지 못한 것이다.

그나마 명종의 무덤인 강릉(康陵)은 태릉 옆에 조성돼 명종은 사후에도 어머니의 그늘 곁에 있게 됐지만

1966년 태릉선수촌이 조성되면서 두 모자는 서로를 쉽게 보지 못하는 형국이 됐다.

‘태릉선수촌’ ‘태릉갈비’처럼 태릉을 떠올리게 하는 용어에는 익숙하지만

정작 이곳이 명종대 폭풍 정국을 이끈 문정왕후의 무덤이라는 사실은 모르는 이가 많다.

 

문정왕후가 억지로 무덤을 옮기는 바람에 중종 또한 피해자가 됐다.

자신과 함께했던 3명의 왕비 그 어느 누구와도 영원히 함께 묻히지 못하는 비극의 주인공이 됐다.

빌딩숲으로 둘러싸인 강남 한복판에 홀로 묻혀 있으되,

아버지 성종과 어머니 정현왕후 무덤이 근처에 있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스럽다고 할까?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신병주의 ‘왕으로 산다는 것’] 에서 모셔온 글입니다.

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 / 그래픽: 정윤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