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통성 시비에 발목 잡힌 광해군
걸림돌(영창대군) 없앤다는 게 오히려 화근으로
임진왜란 초기 관군의 방어선이 뚫리자 선조는 한양과 평양성마저 버리며 피난길을 재촉했고,
이것은 백성들에게 큰 실망감을 안겨줬다.
이에 비해 광해군은 18세 나이에 왕세자로 임명돼 분조(分朝)를 이끌며 의병 참전을 독려하는 등 위기에 큰 활약을 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명망은 광해군에게 쏠렸고 그의 왕위 계승은 무난한 것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광해군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광해군은 선조의 후궁인 공빈김씨 소생이었다. 때문에 정통성 부분에서 취약했다.
선조는 할머니가 중종의 후궁 출신인 창빈안씨였기 때문에 가능한 한 적자를 후계자로 삼고 싶어 했다.
그러나 선조의 정비 의인왕후 박씨는 왕자를 낳지 못하고 1600년 사망했다.
광해군에 대한 선조의 믿음이 확실하지 못한 상황에서
1602년 인목왕후가 선조의 계비로 들어오며 왕실에는 미묘한 긴장감이 조성됐다.
선조의 기대대로 인목왕후는 1604년 정명공주 출산에 이어, 1606년 마침내 영창대군을 낳았다.
55세라는 늦은 나이에 적장자를 본 선조의 기쁨은 누구보다 컸다.
이런 분위기는 바로 감지됐고 적자인 영창대군을 후계자로 책봉하려는 세력이 생겨났다.
왕의 마음을 읽고 줄 서는 모습은 현재와 별반 다르지가 않았다.
임진왜란 후 정국은 북인(北人)이 주도했는데,
영창대군 탄생을 계기로 북인은 다시 두 개의 당파로 나뉘었다.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大北)과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小北)의 대립이다.
대북의 중심에는 정인홍이, 소북의 중심에는 유영경이 있었다.
선조 후반 왕의 신임을 받은 유영경이 영의정이 되면서 소북이 정권을 잡았고,
광해군의 왕위 계승은 불투명해졌다. 오히려 영창대군의 왕위 계승 가능성이 높아졌다.
광해군을 끝까지 지지하면서 유영경을 탄핵한 정인홍은 유배길에 올랐다.
그러나 1608년 선조의 병세가 깊어지면서 정국은 다시 요동을 친다.
이제 3세밖에 안 된 영창대군을 왕위에 올리는 것이 무리라고 인식한 선조는 마지막 유언에서 광해군의 후계자 계승을 지시했다.
광해군은 즉위 후 자신의 후원 세력이었던 대북 중심으로 정국을 운영했다.
정인홍의 유배는 곧 훈장이 됐고,
정인홍은 이후 광해군 정권을 지탱하는 중심인물이 됐다.
정인홍은 1623년 인조반정으로 처형당할 때까지 ‘광해군의 남자’로 활약하게 된다.
광해군과 대북 정권이 출범했지만 광해군은 즉위 직후 바로 정통성 시비에 휘말린다.
우선 형인 임해군이 살아 있었다.
무엇보다 적자인 영창대군의 존재는 광해군 정권에 항상 걸림돌이 됐다.
광해군은 즉위한 다음 날 이호민을 명나라에 파견해 선조의 죽음과 광해군의 즉위 사실을 알렸다.
명나라에서는 장자인 임해군이 있는데도 차자인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이유를 캐물었다.
광해군은 즉위 후 보름 만에 임해군이 역모를 꾀한다는 명목으로 강화도에 유배를 보낼 정도로 정치적인 견제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명나라까지 왕통에 대한 문제 제기를 하자 정치적으로 큰 부담을 느꼈다.
결국 광해군은 1609년 4월 강화도 교동도에 유배돼 있던 임해군을 처형했다.
임해군보다 광해군을 힘들게 한 인물은 동생 영창대군이었다.
영창대군의 최대 후원자였던 유영경은 선조 사후 한 달이 못 돼 처형됐고,
광해군 초반 각종 역모 사건이 일어나는 과정에서 소북 세력은 대거 정계에서 축출당했지만
살아 있는 적통의 존재는 여전히 부담스러웠다.
이런 상황에서 1613년 4월 25일 조령(鳥嶺·문경새재)에서 은상(銀商·은을 팔고 사는 장사꾼) 살해사건이 일어났다.
살해의 주범은 서인(西人)의 거물 정치인이었던 박순의 서자 박응서를 비롯해
서양갑, 심우영, 박치인, 박치의, 이경준, 허홍인 등 7명의 서얼들로 밝혀졌다.
이들은 여주, 춘천 등지에 모여 ‘강변칠우(江邊七友)’로 자청하면서 무기와 양식을 준비했다.
서얼이 차별받지 않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자금 확보를 목적으로 은상을 살해한 것이었다.
그런데 심문 도중 대북파 이이첨의 사주를 받은 박응서가 놀라운 진술을 했다.
“자금을 확보해 김제남(영창대군의 외조부)을 중심으로, 왕(광해군)과 세자(광해군의 아들)를 죽이고 영창대군을 추대하려 했다.”
이 발언의 파장은 확산됐고 정국은 초긴장 상태에 접어들었다.
결국 김제남이 처형되고 영창대군은 서인(庶人)으로 강등되면서 강화도로 유배됐다.
1614년 봄 역시 이이첨의 사주를 받은 강화부사 정항(鄭沆)은
영창대군을 작은 골방에 가두고 아궁이에 불을 지펴 증살(蒸殺·뜨거운 증기로 쪄서 죽임)시켰다.
영창대군은 불과 8세의 어린 나이로 정치적 희생양이 된 것이다.
영창대군의 죽음에 가장 충격을 받은 인물은 생모 인목대비였다.
법적으로 모자 사이였지만 인목대비와 광해군의 관계는 원수나 다름없었다. 부자연스러운 관계가 어색하게 지속됐던
1615년 추운 겨울 어느 날,
광해군은 인목대비를 서궁(경운궁·지금의 덕수궁)에 모셔놓고 혼자만 창덕궁으로 돌아왔다.
1623년 인조반정에서 광해군의 죄상 중 가장 큰 부분을 차지했던 ‘인목대비의 서궁 유폐’가 시작된 것이다.
1615년 광해군은 교서를 반포해 흉측한 글을 유포시킨 인목대비의 죄상을 알리고 이에 연루된 나인들을 처형하는 조치를 취했다.
인목대비에 대한 광해군의 감정이 이러했으니,
서궁에서의 비참한 생활은 짐작하고도 남음이다.
광해군은 왕통에 가장 걸림돌이 됐던 영창대군을 제거하고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시키면서 정통성 시비를 없앤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 사건은 오히려 광해군을 반대하는 정치세력을 결집시키는 빌미를 제공했다.
권력에서 소외됐던 서인과 남인들이 비밀회합을 하면서 정권 타도에 나섰고,
마침내 1623년 3월 13일 인조반정을 단행하기에 이른다.
‘바른 것으로 되돌린다’는 의미의 반정(反正)은
광해군의 패륜 행위를 최대한 부각시키면서 성리학적 질서를 회복한다는 뜻이 담겨져 있었다.
서궁에서 분노로 점철된 삶을 살았던 인목대비에게 인조반정은 가뭄 끝의 단비였다.
‘인조실록’의 다음 기록은 광해군에 대한 인목대비의 분노가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한 하늘 아래 같이 살 수 없는 원수다.
참아온 지 이미 오랜 터라 내가 친히 그들의 목을 잘라 망령(亡靈)에 제사 지내고 싶다.
10여년 동안 유폐돼 살면서 지금까지 죽지 않은 것은 오직 오늘날을 기다린 것이다. 쾌히 원수를 갚고 싶다.”
(‘인조실록’ 인조 3년 3월 13일)
인조반정으로 인목대비는 아들 영창대군을 죽인 광해군에 대한 복수를 했고,
인조의 즉위 이후 대비로서의 지위를 완전히 회복했다.
광해군은 강화도 교동도로 유배됐지만 모진 삶을 이어갔고, 1641년 옮겨진 유배지 제주도에서 67세로 생을 마감했다.
반정으로 폐위된 왕이라는 ‘원죄’ 때문에 실록 등에 기록된 광해군에 대한 평가는 매우 부정적이다.
하지만 광해군 입장에서 연산군과 같은 위치의 폭군으로 취급되는 점은 억울할 수 있다.
특히 조선시대 잣대로 아직도 ‘군’의 지위에 머무르고 있는 점은 분명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런 인식 때문인지 최근에는 전문 연구서에서 광해군에 대한 다양한 평가가 이뤄지고 있다.
광해군이 왕통 강화를 위해 무리수를 둔 점은 분명하지만,
내정 개혁이나 외교 부분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긴 사실도 주목해야 한다.
영창대군 출생 후
힘겨운 왕위 계승의 소용돌이 속에서 어렵게 왕위에 즉위한 광해군에게 놓인 가장 큰 현안은 전란의 상처 회복이었다.
광해군은 먼저 전쟁 중에 피폐해진 토지의 회복과 민생 부담을 덜어주는 데 공을 들였다.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토지를 전쟁 전 상태로 회복하는 데 주력하는가 하면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해 백성들 부담을 줄였다.
16세기 이후 사회적으로 가장 큰 문제였던 공납제(貢納制·특산물을 세금으로 바치는 제도)를 개혁한 대동법은
기존에 가호별로 부과하던 세금을 토지에 부과한 제도다.
대동법이 본격적으로 실시되면서 땅이 많은 양반 지주의 부담은 증가한 반면 일반 서민들 부담은 크게 줄어들었다.
지주였던 양반 관료들의 저항이 거셌지만 광해군은 대동법 실시를 강행했다.
반대 세력에 대한 정치적 숙청과 ‘폐모살제’라는 그림자도 있지만
광해군은 전쟁의 상처 회복과 대동법 실시, ‘동의보감’ 간행 등 업적도 분명한 왕이다.
여기에 탁월한 외교 감각은 광해군을 이 시대에 더욱 불러오고 싶게 하는 근거가 된다.
광해군의 빛과 그림자를 보다 균형 있게 평가하는 시각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신병주의 ‘왕으로 산다는 것’] 에서 모셔온 글입니다.
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 / 그래픽: 정윤정
'역사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직접 반정에 앞장선 인조 -13 (0) | 2017.02.25 |
---|---|
명나라와 후금 사이 줄타기 외교 광해군 -12 (0) | 2017.02.21 |
임진왜란과 광해군의 부상 -10 (0) | 2017.02.14 |
후대 평가 극명하게 엇갈리는 선조 -9 (0) | 2017.02.11 |
어머니 그늘에 가려 존재감 없었던 명종 -8 (0) | 2017.02.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