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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

북벌 대신 러시아 정벌 나선 효종 -17

 

북벌 대신 러시아 정벌 나선 효종 | 북벌은 생각만

현실은 淸 원군 요청 승낙

 

 

효종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북벌이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효종대에 네덜란드인 하멜이 표류해 들어오고 두 차례에 걸쳐 나선(러시아) 정벌이 이뤄지기도 했다.

 

1653년 7월 하멜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 무역선 스페르웨르호를 타고 64명의 일행과 함께 자바섬과 대만을 거쳐 일본 나가사키로 향했다.

불행하게도 하멜 일행은 8월 15일 풍랑을 만나 제주도 산방산 근처 해안에 상륙했다.

이들을 발견한 백성은 즉시 제주 목사에게 사실을 고했고,

생존자 38명은 제주 관원에 의해 체포됐다.

제주 목사 이원진(李元鎭)은 그들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한 뒤, 왕에게 편지를 띄웠다.

 ‘효종실록’에는 당시 상황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

 

“배 한 척이 고을 남쪽에서 깨져 해안에 닿았기에 대정 현감 권극중과 판관 노정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보게 했더니,

어느 나라 사람인지 모르겠으나 배가 바다 가운데에서 뒤집혀 살아남은 자는 38인이며 말이 통하지 않고 문자도 다릅니다.

배 안에는 약재·녹비(鹿皮·사슴가죽) 따위 물건이 많이 실려 있었습니다.

이들의 생김새는 파란 눈에 코가 높고 노란 머리에 수염이 짧았는데, 혹 구레나룻은 깎고 콧수염을 남긴 자도 있었습니다.

그 옷은 길어서 넓적다리까지 내려오고 옷자락이 넷으로 갈라졌으며 옷깃 옆과 소매 밑에 다 이어 묶는 끈이 있었으며

바지는 주름이 잡혀 치마 같았습니다.

왜어(倭語)를 아는 자를 시켜 묻기를 ‘너희는 서양의 크리스천[吉利是段]인가?’ 하니, 다들 ‘야야(耶耶)’라고 답했습니다.

우리나라를 가리켜 물으니 고려(高麗)라 하고,

본도(本島)를 가리켜 물으니 오질도(吾叱島)라 하고, 중원(中原)을 가리켜 물으니 대명(大明)이라고 했습니다.

이어서 가려는 곳을 물으니 낭가삭기(郞可朔其·나가사키)라 했습니다.”

 

위 기록을 통해 하멜 일행은 조선을 고려로,

청나라를 명나라로 잘못 알고 있었다는 점과 최종 목적지는 일본의 나가사키였음을 알 수 있다.

 

‘하멜표류기’에도

 “70세가량 된 목사가 선량하고 이해심이 많은 사람이며 서울 출신으로 조정에서도 상당한 신망을 받고 있었다”고 기록돼 있다.

이원진 목사가 이들에게 우호적으로 대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10월 29일엔 네덜란드 출신으로 1627년 제주도에 표류한 뒤,

조선으로 귀화한 벨테브레(Weltevree, 박연)가 한양에서 내려와 하멜 일행의 통역을 맡게 됐다.

하멜은 “57~58세로 보이는 벨테브레가 모국어를 거의 잊고 있었다.

처음에는 떠듬떠듬 말하는 것을 거의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한 달 정도 같이 지내다 보니 그가 다시 모국어를 기억해냈다”고 기록했다.

 

벨테브레는 다음과 같은 효종의 지시를 전했다.

“우리는 외국인을 나라 밖으로 보내지 않는다.

그대들을 보호해주겠으며 적당한 식량과 의복을 제공해 줄 테니 이 나라에서 여생을 마치라.”

이렇게 하멜 일행은 억류 생활에 들어가게 됐다.

효종이 하멜을 돌려보내지 않은 이유는 다름 아니다.

한창 북벌 준비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 조선 내부 사정을 외부에 알리는 것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하멜 일행은 지속적으로 탈출 계획을 세웠다.

1655년(효종 6년) 3월엔 일행 중 2명이 조선을 방문한 청나라 칙사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로 했다.

청나라 칙사가 귀국하는 길목에 숨어 있던 2명은 조선 옷 대신 네덜란드 복장을 하고 갑자기 나타나 자신들의 억울함을 토로했다.

이 탈출 사건은 효종이 칙사에게 뇌물을 주면서 없던 일이 됐고,

탈출을 시도한 2명은 수감됐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이 사건 이후 조정 대신들은 하멜 일행의 처리 문제에 대한 토론을 벌였고,

결국 전라도 병영(兵營)에 분산 수용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1659년 효종이 사망한 후에도 하멜 일행의 처리 문제는 조정의 골칫거리였다.

1662년(현종 3년) 현종은 생존해 있던 22명을 여수에 12명, 순천에 5명, 남원에 5명씩 나눠 보냈다.

하멜은 여수로 보내져서 훈련장에 나가 화살을 줍고 매일 새끼를 꼬는 등 힘든 생활을 하는 와중에 틈틈이 탈출하려고 노력했다.

억류 생활에도 희망을 잃지 않은 이들의 노력은 마침내 탈출로 이어졌다.

1666년 일행 중 13명이 여수를 탈출해 나가사키를 거쳐 1668년 고국인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도착했다.

 

고향으로 돌아간 하멜은 조선에서의 억류 생활을 생생하게 정리한 ‘하멜표류기’를 썼다.

하멜표류기는 조선을 서양에 최초로 소개한 책자로,

17세기 조선 사회의 모습과 함께 효종과 현종이 표착 서양인에 대해 취한 정책을 이해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된다.

 

하멜의 표류 외에도 효종대에는 중요한 사건이 있었다.

재위 기간 오로지 북벌만 준비했던 효종은 중간에 자신이 원치 않는 상황을 맞이한다. 청나라가 러시아 정벌에 나서면서

조선군의 파견을 요청한 것. 17세기 중반 이후 청과 러시아는 국경 지역에서 몇 차례 충돌했다.

청나라는 러시아군을 제압하는 데 조총으로 무장한 조선군 포수들이 제격임을 파악하고 조선에 지원 병력 파병을 요청했다.

 

1636년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와 군신관계에 있었던 만큼 조선 입장에선 청나라 요구를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효종은 고심 끝에 파병을 결정하고 수백 명의 조총 부대를 1654년과 1658년 두 차례에 걸쳐 길림 근처에 보냈다.

청나라군과 합세한 조선군은 러시아 공격에 나섰다. 이른바 ‘나선(羅禪) 정벌’이다.

내심 청나라에 복수심을 지니고 북벌을 추진하는 상황에서,

현실적으로는 청의 요구에 응할 수밖에 없는 모순된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청을 주적(主敵)으로 삼고 북벌을 준비했던 효종이 도리어 청의 출병 요구에 의해 조선군을 파병한 것은

그만큼 효종의 북벌이 구호로만 그쳤음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나선 정벌은 1654년 2월 청나라에 파견됐던 사신 한거원이 서울에 들어와 효종에게 청나라의 요구 사항을

보고한 것에서 시작한다.

“조선에서 조총을 잘 쏘는 사람 100명을 선발해 청나라 관리의 통솔을 받아 나선을 정벌하되,

3월 10일에 영고탑(寧古塔·중국 흑룡강성 닝안현)에 도착하라.”

당시만 해도 효종은 나선, 즉 러시아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던 듯하다.

효종은 나선이 어떤 나라인지를 물었고, 한거원은 “영고탑 옆에 별종(別種)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나선입니다”라고 답했다.

 

결국 효종은 변급을 대장으로 삼고 조선군을 청나라로 파병했다.

조선군은 흑룡강성 의란시 전투 등에서 청나라군과 연합해 승리를 거두고 1654년 7월 영고탑으로 귀환했는데,

이를 1차 나선 정벌이라 한다.

 

효종실록에는 “변급이 청나라 군사와 함께 나선을 격파해 군사를 거느리고 영고탑으로 귀환했다”며

이날의 승전을 간략하게 기록했다.

1658년 청나라는 러시아와 다시 국경 분쟁에 시달리자 조선군의 파병을 재차 요청했다.

이에 효종은 함경도 북병영의 부사령관 격인 신유에게

조총군 200명과 초관(哨官·조선시대 한 초를 거느리던 종9품 무관벼슬) 60여명을 거느리고 러시아 정벌에 나서게 했다.

 

신유가 기록한 ‘북정록(北征錄)’에 의하면,

신유는 1658년 4월 6일 회령에서 군사를 검열하고 4월부터 8월까지 약 4개월간 영고탑에서 사이호달이 이끄는

청나라 군대와 합류해 흑룡강으로 출전했다.

 5월 9일 청군과 합류했을 때 신유가 이끈 200명의 조선군은 청나라 장수 8명에게 24명씩 배속됐다.

도착하자마자 조선군에 대한 지휘권을 청나라 장수가 행사하는 수모를 겪은 것이다.

6월 10일 조청 연합군은 흑룡강과 송화강이 만나는 지점에서 스테파노프가 지휘하는 러시아 군사와 접전을 벌였다.

당시 러시아군의 모습에 대해서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적은 신장(身長)이 10척(尺)이나 되며 눈은 길고 깊으며 털은 붉고 수염은 헝클어져 마치 해초가 어깨에 늘어진 것 같다.”

조선군은 10여척의 배를 앞세우고 공격해오는 러시아군에 총과 화전(火箭)으로 용감히 맞서 싸워 대승을 거뒀다.

이 전투에서 스테파노프를 포함해 러시아군 270여명이 전사한 데 비해 조선군 희생자는 단 8명에 불과했다.

신유 장군이 중심이 된 이 전투가 2차 나선 정벌이다.

 

효종은 북벌을 준비하면서 조선군의 장점인 조총병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하지만 효종의 야심작 조총병은 청나라를 공격하는 데 쓰이지 못하고 청나라를 도와 러시아를 정벌하는 데 활용됐다.

아이러니한 결과다.

북벌을 국시(國是)로 삼고 야심 차게 군비 증강에 나섰던 효종 시대의 나선 정벌은 승리를 승리라고 부를 수 없는

묘한 상황을 만들어줬다.

특히 북벌의 왕 효종에겐 약소국의 비애를 더욱 절감하게 한 전투로 기억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