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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馬처럼 걷는 대구+경북 여행

(안동) 퇴계 이황의 유뮬과 종택 그리고 이육사 문학관

 

퇴계 이황의 종택과 유물 그리고 이육사 문학관

 

 

 

 

언제 : 2017년 12월 25일 월요일

어디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성탄절 이브

안동에는 눈비가 조금 내리는데,

2008년 4월, 처음 도산서원을 방문했을 때 기차를 이용하였기에 아련히 남은 추억을 살려보려고 

눈비가 내리는 안동역 앞을 걸어 보았다.

 

그땐 대중교통을 이용해 여행하니 시골에서는 버스를 놓치면

 다음 버스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이 보통 한 두시간이라 도산서원에서 퇴계 종택과 이육사 문학관은

가까움에도 걸어서 다니기엔 어려움이 있어 포기했었는데,

오늘은

도산서원을 둘러보고 퇴계종택과 이육사 문학관을 찾아간다.

 

낯선 곳을 찾아가는 기분은 황홀하다.

생전 처음 보는 풍경이며, 문화이며, 시선들이기 때문이다.

 

도산서원에서 승용차로 약 5~10분이면 퇴계 종택에 닿는다.

 

 

 

 

 

 

계상서당

퇴계의 첫 서당이며 이율곡이 삼일을 머물렀던 곳

 

도산서원에서 퇴계 종택 닿기 직전 왼편 개울 건너 3채의 가옥이 있다.

 

 

퇴계종택

경상북도 기념물 제42호

 

이 건물은 퇴계 이황(1501~1570)의 종택으로 원래 건물은 없어졌으나

1929년 선생의 13대 사손 하정공이 옛 종택의 규모를 참작하여 지금의 터에 새로 지었다. 종택의 오른쪽에는

추월한수정(秋月寒水亭)이라는 정자가 있다.

 

이 집은 정면 6칸, 측면 5칸의 'ㅁ' 자 형으로, 대문과 정자 그리고 사당 등 세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높은 석축 위에 둥근 기둥과 네모 기둥을 섞어서 지었다.

사대부집의 공간영역을 갖추고 있으며 솟을대문과 정자 등 품위와 규모를 갖춘 종가로 전통 생활도구도

비교적 잘 남아 있다.

 

 

퇴계종택 앞에 있는 바위에 새겨진 글

 

 

 

 

 

 

 


퇴계 이황의 종택(宗宅)은 경북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에 있으며 경북 기념물 제42호로 지정되었다.

지금의 종택 옆에 있었던 옛 종택은 일본군이 1907년 방화로 모두 타 버려 없어졌고,

현재의 종택은 퇴계 13대손 이충호가 1926-1929년에 지은 것이다. 비록 근대에 새로 지은 집이면서도

규모도 있고 품위도 있었다. 이 종택은 퇴계 선생의 정신이 가장 오롯하게 지킨 곳이 아닌가 한다.

 

종택 바로 옆에 추월한수정(秋月寒水亭)이라는 정자가 있다.

정자라고 보기보다는 일반 가옥과 같이 보인다.

이 정자는 봉화 닭실마을의 안동권씨 집안 권두경(1654-1725)이

1715년 퇴계문인 후예의 도움을 받아 지었으나 일제에 의해 1907년 불타 없어졌고,

1926년 상주 도남서원에서 도회(道會)를 열고 전국에서 400여 유림과 문중에 비용을 부담하여 새로 세운 것이다.

 

 솟을대문에 퇴계의 손자며니리 안동권씨의 정려가 있다.

 

정려각 대신 솟을대문에 정려를 걸어 놓은 곳은 이곳에서 처음 본다.

烈女通德郞行司醞署直長李安道妻恭人安東權氏之閭

열녀통덕랑행사온서직장이안도처공인안동권씨지려

 


 

 

 

 

 

 

 

 

 

 

 

 

 

 

 

 

 

사당

 

 

도산서원 옥진각의 전시품

 

 

퇴계 선생의 과거급제

퇴계 선생은 23세인 1523년 성균관에서 공부하였고, 24세부터 과거시험에 응시하였으나 세 번 낙방하였다.

27세인 1527년 경상도 향시에 응시하여

생원 2등으로 합격한 퇴계 선생은 이듬해에 진사시험에 2등으로 합격하였다.

 

32세인 1532년 과거시험에 문과 초시 2등으로 합격하였고, 34세인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당시 이웃에 살던 대학자 이현보(李賢輔) 선생이

퇴계 선생의 과거 급제 소식을 듣고 " 요즘 시절에 기대되는 사람으로 이 사람을 뛰어 넘을 이가 없으니

나라의 다행이며, 우리 고을의 경사이다."라고 하였다.

 

하지만 퇴계 선생의 어머니는 퇴계 선생의 뜻이 높고 깨끗하여

 세상에 어울리지 않는 것을 알고 일찍이, "너의 벼슬은 한 고을 현감직이 마땅하니 높은 관리가 되지 마라.

세상이 너를 용납하지 아니할까 두렵다."고 하였다.

퇴계 선생은 늙어서까지 어머니의 이 말을 잊지 않고 따르고자 하였다.

 

 

 

 

 

 

 

 

 

 

이 글씨는 퇴계 선생께서 쓰신 "관풍루(觀風樓)"라는 자필 글씨이다.
그런데

'관'자는 어디로 갔나?

 

 

 

 

 

 

 

 

 

 

사문수간(師門手簡)

제자 월천 조목이 평소 선생으로부터 받은 서간 106통, 시 16편, 잡서 7편을 손수 작첩한 것으로 모두 8권이다.

 

 

어제발문(御製跋文)

평소 퇴계 선생을 흠모하던 정조 임금이

1794년에 《사문수간》을 열람하고서 그 소감으로 발문을 지어 하사한 것이다.

선생의 천인합일(天人合一)의 경지를 칭송하는 내용이다.

 

 

 

 

 

 

 

 

 

 

 

 

 

 

 

 

 

 

 

 

 

 

 

 

 

 

 

 

안석(案席)

크기 : 길이 80cm, 넓이 : 25cm

가는 왕골로 짠 기대는 방석으로 선생께서 사용하시던 유품이다.

 

완석(莞席)

크기 : 길이 170cm, 넓이 : 90cm

왕골로 짠 자리 3개가 전해져 내려 온다. 그 중 한 개의 배면에는 '이첨지댁 퇴계(李僉知宅 退界)' 라는

자필 글씨가 있다.

 

 

 

 

퇴계 종택에서 승용차로 약 5~10분 이면 이육사 문학관에 닿는다.

 

 

이육사 문학기념관에서 본 앞 들

 

아래 사진 오른쪽 산을 돌아가면 도산서원이 있다.

 

 

 

 

 

 

 

 

이육사 문학관

 

 

 

 

 

 

2008년 4월에 도산서원을 방문했을 때

 퇴계종택과 이육사 문학관을 둘러보고 싶었는데, 교통편이 좋지 않아 발걸음을 돌렸는데, 10년이 지나도록

늘 가슴에 남아 체를 한 듯 걸렸는데,

마침 기회가 되어 도산서원과 퇴계 종택을 방문하였으나 정작 이육사 문학관은 휴관 일이라

사진만 찍고 돌아왔다.

 

그러나

봉화 청량산과 청송 주왕산에서 안동댐과 도산서원 그리고 퇴계종택과 이육사 문학관의 지도가 머리에 그려져

언젠가 다시 봉화 청량산이나 청송 주왕산행을 할 때

이육사 문학관을 둘러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