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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馬처럼 걷는 대구+경북 여행

(안동) 국보 제132호 징비록의 산실 옥연정사(玉淵精舍)


국보 제132호 징비록의 산실 옥연정사(玉淵精舍)


 

 

 

언제 : 2017년 12월 25일 월요일

어디 : 경북 안동시 풍천면 광덕리 20 (광덕솔밭길 86)

 

 

옥연정사는 서애 류성용선생께서 풍광이 수려하고 한적한 마을 북담 건너에

늙으면 조용히 거처할 목적으로 짓기 시작한지 10년만인 1586년에 완공하였다.

 

화천이 마을을 시계방향으로 휘감아 돌다가 반대방향으로 바뀌는 옥소(玉沼)의 남쪽에 있다고

소의 맑고 푸른 물빛을 따서 옥연정사라 부른다.

  

징비록 자서(懲毖錄 自序)

 임진왜란,“과거를 징계(懲界)하여 다시는 이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미리 조심하고  대비(對毖)하려 한다."

이것이 바로 내가 징비록을 저술한 까닭이다.

 


 





하회마을을 볼 수 있어 홈페이지에서 모셔온 사진



 


 

부용대에서 본 하회마을

▽ 

 

 

 


 


옥연정사를 방문하는 방법

1. 하회마을에서 배를 타고 건넌다.

2. 승용차로 부용대 화천서원에 주차한다.


 

 옥연정사입구 공터에 있는 서애선생의 시비

 






동남아시아 관광객도 옥연정사에 대해 알고 싶어 관리인에게 문의를 하고 있었다.


 



玉淵精舍(옥연정사)

 1576(선조9년) 집 짓기를 시작한지 10년만인 1586년 완공된다.
서애선생의 나이 45세 때이다.

집을 완공한 6년 뒤 임진왜란이 일어난다.

가난하여 집 지을 돈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을 때 탄홍(誕弘)이란 스님이 그 뜻을 알고 건축을 맡고

재력을 부담하겠다고 자원하여 완공되었다.


1605년(선조38년) 낙동강 대홍수로 하회의 살림집 삼칸초옥을 잃고 이곳에 은거하며 임진난을 회고하여

징비록(국보 132호)을 저술하였다.



마을을 휘감아 흐르는 강물이 이 곳에 이르러 깊어지는데,

깨끗하고 맑은 물빛이 옥과 같아서 정사의 이름도 "옥연(玉淵)"이라 하였다.

  





 

겸암정사로 통하는 출입문



옥연정사의 전경

 


 △

옥연정사에서 바라본 하회마을

낙동강은 유유히 흐르다 부용대 고고한 절벽에 부딪혀 허리를 틀고, 송림 우거진 하회마을에 석양이 물듦은

나그네 발길을 돌리라는 의미다.


 

하회에서 바라본 옥연정사사진


하회에서 바라본 옥연정사

하회에서 옥연정사로 가려면 나룻배를 타야한다.

서애 선생은 호를 서애(西厓:서쪽 벼랑)로 짓고 마을의 번잡함에서 벗어나

스스로 외로운 ‘고라니의 삶’을 살아가길 원했다.


- 사진은 옥연정사 홈페이지에서 모셔 옴 -


 

  

玉淵精舍(옥연정사)는 서애 선생이 거처하던 가옥이다.

玉淵精舍(옥연정사)는 대가족의 살림과 사당이 있는 종택(宗宅)과는 다른 서애 선생만의 학문과 만남의

독립 공간이다.

 

배를 타고 오지 않으면 접근할 수 없는 절벽 끝에 집을 지었다.

스스로 외로움을 즐길 수 있는 곳이랄까?


玉淵精舍(옥연정사)는 임진왜란을 어렵게 치룬 그의 삶과 모습, 생각과 인생, 분위기가 배어 있는 곳이다.

서애선생은

탄홍스님의 도움을 받아 옥연정사를 마련한 다음 이 집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옥연서당기」로 남겼다.


「옥연서당기」

 “중년에 망령되게도 벼슬길에 나아가 명예와 이욕을 다투는 마당에서 골몰하기를 20년이 되었다.

발을 들고 손을 놀릴 때마다 부딧칠 뿐이었으니, 당시에 크게 답답하고 슬퍼하면서 이곳의 무성한 숲,

 우거진 덤불의 즐거움을 생각하지 않을 때가 없었다” 라고 적고 있다.


또 스스로를

 “고라니의 성품은 산야에 알맞지 성시(城市)에 맞는 동물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임진왜란과, 권위적인 왕조, 권력싸움에서 심한 시달림을 겪은 한 학자의 모습이 진하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