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 제260호 - 서애(西厓)의 혼을 모신 병산서원(屛山書院)
언제 : 2017년 12월 25일 월요일
어디 :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병산리 30
하회마을과 병산서원 갈림길에서 병산서원 가는 고갯길은 아직 포장되지 않았고 한쪽은 절벽인데
안전장치도 허술하여 병산서원 가는 길의 첫인상은 편하지 않다.
고개를 내려오는데,
저만치 낙동강 건너 병풍처럼 펼쳐진 병산(屛山)이 눈길을 끈다.
마을 밖 주차장에 주차하고
낙동강과 병산의 특별한 지형을 바라보며 마을을 지나니 저만치 병산 맞은편 산허리에
웅장한 만대루 기와지붕이 우렁차다.
"그가 없었다면 이순신도 없었을 것이고, 조선의 명운도 달라졌을 것이다."
국보 제132호 징비록을 저술한 서애 류성룡을 모신 사당
병산서원이다.
성탄절 병산서원을 찾는데
하얀 눈발이라도 내리면 병산서원 셜경이 참 아름다울 것이란 느낌이 든다.
△
병산서원 가는 고개에서 바라본 낙동강과 학가산(870m)
병산서원을 처음 본 풍경
△
복례문
병산서원 정문(외삼문)
△
△
△
입교당
△
동재
△
서재
△
정료대
마당의 석조물인 하얀기둥으로 밤에 불 밝히던 곳
△
입교당에서 만대루와 병산을 바라보며
△
입교당 마루에서 본 만대루
△
내삼문
△
존덕사
△
전사청
떠나간 이를 그리워한다는 뜻을 담고 있어 선현을 모시는 서원에 안성맞춤인 나무가 배롱나무다.
서애 류성룡(西厓 柳成龍, 1542~1607)은
특히 배롱나무를 좋아했다고 한다. 류성룡과 함께 그의 셋째 아들 류진의
위패를 모신 곳이 병산서원이다.
배롱나무는 나목(裸木)으로 인식되어 여인이 머무는 안채 마당에는 심지 않았지만,
사내들에게는 속을 숨기지 않는 강직한 선비 정신을 의미했다. 이 나무는 무상한 세월 속에서도 제 모습을 잃지 않고
서원을 든든하게 지켜 온 병산과 함께 시류에 휩쓸리지 않던 결연한 선비의 모습을 보여 준다.
△
장판각
△
만대루
▽
△
고직사
관리인이 거주하는 공간
△
▽
여행을 하면서
1970년 전남 구례 지리산 마을 화장실 나무 판대기 아래 돼지가 있어 놀랐고,
수덕사 뒷 산 몰랑에 있는 정혜사 뒷간이 절벽처럼 아스라해 다리가 떨렸었는데,
달팽이 뒷간은 놀라거나 떨리지는 않지만 신기하고 신기했다.
△
병산과 낙동강
안동댐과 임하댐에서 흐른 강물은 병산서원을 지나 하회마을을 휘돌아, 예천 회령포에서 흐른 물과 합류하여
낙동강 주류를 형성한다.
△
ⓢoṃmaṇi padme hūṃ(옴마니반메훔)을 소리 나는 대로 적은 것이다.
관세음보살의 자비를 뜻하는 주문으로, 이것을 지극정성으로 읊으면
관세음보살의 자비에 의해 번뇌와 죄악이 소멸되고, 온갖 지혜와 공덕을 갖추게 된다고 한다.
"육도의 중생들을 제도하여 육도의 문를 닫게 한다"
불교의 천수경에 나오는 관세음보살의 진언이다. 밀교를 비롯하여 불교에서 사용되는 주문 가운데 하나이다.
돌아 나오는 길에 공예품을 파는 곳에서 다리도 쉴 겸 커피를 마셨다.
왜 병산서원 오는 길이 비포장도로이며, 주차장은 병산서원과 너무 멀고 화장실도 없던데
왜 이렇게 불편하게 만들었냐고 물으니
알아도 모르고, 몰라서 모르는지 하회탈처럼 도통 말이 없다.
류성룡(柳成龍, 1542년 11월 7일(음 10월 1일) ~ 1607년 5월 31일(음 5월 6일))은
조선 중기의 문신, 인문학자, 의학자, 저술가.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이현(而見), 호는 서애(西厓)이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경상도 의성의 외가에서 태어났으며, 간성군수 류공작(柳公綽)의 손자이며, 황해도 관찰사 류중영(柳仲郢)의 차남이다.
퇴계 이황의 문하에서 후에 1590년 통신사로 갔던 조목(趙穆)·김성일과 동문 수학하였으며 성리학에 정통하였다.
과거를 통해 관료로 등용되어 서인이 아닌 이산해와 같은 동인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정여립의 난과 기축옥사를 계기로 강경파인 아계 이산해, 정인홍 등과 결별하고 남인을 형성하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직전 군관인 이순신을 천거하여 선조로 하여금 전라좌수사로 임명하도록 하였으며
이순신으로 하여금 임진왜란 당시 열세였던 조선의 전세를 역전시키는 데 공을 세웠고, 임진왜란에 4도 도제찰사,
영의정으로 어려운 조선 조정을 총 지휘하였다.
노량해전과 같은 날인, 정인홍,이이첨 등의 북인의 상소로 인해 영의정에서 관직삭탈하게 된다.
안동으로 내려가 선조의 부름에도 올라가지 않고 임진왜란 때 겪은 후회와 교훈을 후세에 남기기 위해
부용대 옥연정사에서《징비록》을 저술하였다.
징비록은 대한민국의 국보 제132호이다.
죽을 때까지 청렴하고 정직한 삶을 살았던 청백리이면서 ‘조선의 5대 명재상(名宰相)’ 가운데 한 사람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이순신과는 어려서부터 같은 동네에서 함께 자란 절친한 사이로서 후견인 역할을 하였으며
이순신의 형 이요신과 친구사이기도 하다.
'牛馬처럼 걷는 대구+경북 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안동) 하회마을 부용대 화천서원과 겸암정사(謙菴精舍) (0) | 2018.01.28 |
---|---|
(안동) 국보 제132호 징비록의 산실 옥연정사(玉淵精舍) (0) | 2018.01.25 |
(안동) 퇴계 이황의 유뮬과 종택 그리고 이육사 문학관 (0) | 2018.01.20 |
(안동) 사적 제170호- 퇴계의 영혼이 깃든 도산서원(陶山書院) (0) | 2018.01.18 |
(안동) 국보 제16호 - 안동 법흥사지 칠층전탑(安東 法興寺址 七層塼塔) (0) | 2018.01.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