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시를 열며
지금부터 꼭 150년 전인 1876년 2월 27일,
조선은 강화도에서 일본과 '조-일 수호조규'를 맺었습니다. 조선이 외국과 맺은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었습니다.
조선은 오랜 쇄국의 빗장을 풀고 '세계'라고 하는 망망대해에 뛰어들었습니다.
여러 가지 한계에도 불구하고 강화도조약에 담긴 '자주'와 '개방' 조항이 갖는 의미는 막중합니다.
강화도 조약은
우물 안에 있던 한민족에게 '근대'라고 하는 완전히 새로운 세상으로 가는 길을 연 사건이었습니다.
강화도조약 이후
한국인들은 숱한 고난과 좌절을 겪어야 했습니다. 남의 나라 전쟁(청-일, 러-일)터가 되기도 했고,
아예 국권을 침탈당하기도 했습니다.
광복 후의 역사도 순탄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시련을 딛고 오늘날 당당히 세계 일류국가
대열에 진입했습니다. 한때 세계에게 가장 가난하고 폐쇄적이었던 나라의 문화(K-컬쳐)에
전세계가 열광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150년 역사의 도전을 슬기롭게 극복해 온 것입니다.
인천은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현장이자 이 조약의 영향을 가장 직접적으로 받은 도시입니다.
강화도조약 이후 세계와 한국을 잇는 접점이 될 수밖에 없었고,
한국 근대사가 겪어야 했던 격량을 최전선에서 헤쳐오며 오늘의 글로벌 도시로 성장했습니다.
그 조약으로부터 150년이 지난 오늘의 시점에서 조약의 과정과
의미를 돌아보고,역사에서 '도전과 응전'의 자세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 The Corean Ports -
1908년 3월 경 프랑스인이 촬영한 영상으로, 당시의 제물포항 선착장 주변 모습을
생생히 보여주고 있다. 프랑스 시네마테크 프랑세즈(La Cinematheqe Francaise)에 보관되어 있던
질산염 필름을 한국영상자료원이 발굴하여 공개한 것이다.




-인천항 외국어학교 수업증 -1901년
1901년 5월 26일에 인천항외국어학교 3년 수업을 받았음을 증명하는 이성진의 수업증이다.

- 인천항외국어학교 졸업장 - 1903년
1903년 5월 23일에 인천항외국어학교 4개년 보통 교과를 졸업한 이성진이 졸업장이다.

1. 입체경 - 두 장의 사진을 겹쳐 보게 함으로써 평면의 이미지를 입체적으로 감상할 수 있게 고안된 장치
2. 제물포 입체사진 - 입체경을 통해 입체감을 느낄 수 있도록 제작된 사진이다.
20세기 초 제물포항과 그곳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이 담겨있다.
4. 일본우선회사 인천지점 상량문- 1888년 일본우선회사는 미쯔비시와 공동운수가 합병하여
1885년 설립된 거대 기선회사로, 1886년 인천에 있던 미쯔비시 출장소를
일본 우선회사 인천지점으로 승격시켰다. 당시 사옥을 신축할 때 올렸던 상량문이다.



'사대교린 : 조선이 주변 나라에 취한 외교정책으로 중국에는 조공을 보내고(事大)
그밖의 주변국과는 우호관계를 유지(交隣)하는 정책을 말한다.

- 난징조약 체결 모습- 1846년 - 브라운대학교도서관
1842년 8월 29일, 제1차 아편전쟁을 종결짓기 위해 영국 군함 콘월리스호에서 조약을 체결하는 모습이다.
이 조약으로 청나라는 홍콩을 할양하고 상하이 등 5개 항구를 개항하게 되었다.
동아시아 국가들이 서구 열강과 맺은 최초의 불평등 조약이자 근대적 개항의 시작을 상징하는 장면이다.

- 아시아 지도 - 1886년
영국에서 발행한 아시아지도로 범위는
북쪽 시베리아부터 남쪽 동남아까지, 동쪽 대서양부터 서쪽 터키까지의 영역을 표시했다.
각 나라별 다른 색으로 인쇄하였으며 우리나라 영토는 'COREA'로 표기하였다.

- 페리제독의 일본 원정기 -


- 대청도의 주민들과 한국 관리와 수행원들 - 1818년 -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출전 : 알세스트호의 항해기 Voyage of His Majesty's Ship Alceste, Along the Coast of Corea,
To the Island of Lewchew. 1818
1816년 영국군함 Alceste호를 타고 서해안에 도착한 군의관 맥레오드(McLeod)가 남긴
"알세스트호 항해기"에 수록된 삽화이다. 서양인이 본 조선인이 모습이 과장된 상투와 갓,
서양식 얼굴 등으로 표현되었다.

조선 서해안 및 류큐도 항해기
1818년의 재판본(再版本)
영국 해군 함장 바질 홀(Basil Hall)이 1816년 조선 서해안과 류큐 제도를 항해하며 기록한 탐사 보고서이다.
홀 일행이 인천의 섬에 상륙해 직접 관찰한 조선의 자연지형과 풍속에 대한 내용을 기록한
초기 자료로 본문에는 당시 조선인과의 만남을 묘사한 세밀한 판화들이 수록되어 있다.

19세기 중엽 서양인이 본 한국인의 모습
1880년 -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출전: "금단의 나라 조선 A Forbidden Land: Voyages to the Corea" 1880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세 차례의 조선 항해 기록을 정리하여 1880년에 발간한 저서에 수록된
인물 소묘이다. 조선인의 인종적 특징과 신분별 복식을 서구인의 시각에서 묘사하고 있다.


병인양요 삽화 - 1867년
1867년 1월 26일 발행된 "L;Illustration, Journal Universel" 제1248호에 게재된 삽화이다.
하단 삽화는 1866년 천주교 박해를 구실로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침공했던 병인양요 당시의 전투
장면을 담고 있다. 서구 열강의 시각에서 기록된 초기 조선 원정의 모습과
당시 강화도 해안의 풍경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

병인양요 삽화 -1867년
1867년 1월 19일 발행된 프랑스 잡지 "L;Illustration, Journal Universel"
제1247호에 게재된 삽화이다. 병인양요 당시 함대에 승선했던 해군 사관 주베르(M.H.Zuber)의 스케치를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왼쪽부터 평민(Homme du peuple), 무장한 궁수(Archer),관리(Mandarin),
정규군 병사(Soldar de I'armee regullere)의 모습을 세밀하게 묘사하여
당시 조선의 다양한 신분별 복식을 서구 사회에 소개하였다.

미군이 작성한 강화도 공격 작전 지도 - 1871년
신미양요 주요 격전지인 초지진(Marine Redoubt/Fort Duconde), 덕진진(Fort Monocacy),
광성보(Fort McKee)로 이어지는 공격 경로를 보여준다.

덕진진을 점령한 미국군
1871년 - 미국 해군역사유산사령부
신미양요를 기록한 이탈리아계 영국인 사진작가 펠리체 베아토(Felice Beato)가 촬영한 사진이다.

양요기록(洋擾記錄)
19세기 후반 - 국립중앙도서관
역관 출신의 개혁 사상가 오경석(吳慶錫)이 병인양요를 전후한 국내외 정세를 기록하고
관련 문서를 수집하여 엮은 필사본 자료이다. 북경을 왕래하며 얻은 정보와 지식을 바탕으로
편찬하여 당시의 긴박한 대외 정세를 기록으로 남겼다.

신미양요 기사 -1871년
1871년 9월 9일과 9월 16일에 미국에서 발행된 주간 시사 화보신문이다.
당시 발생한 신미양요 관련 소식을 채색화보와 함께 상세히 전하고 있다.

해문방수비(海門防守碑)
1867년- 복제
병인양요 다음해인 1867년(고종 4) 흥선대원군의 명에 따라 강화 덕진진에 세워진 비석이다.
'바다의 관문을 지키고 있으니 외국 선박은 지나가지 말라'는 뜻의
"해문방수타국선신물과(海門防守他國船愼勿過)" 가 새겨져 있어 외세의 침입을 막고 바다의 관문을
철저히수비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준다.


최익현 초상
1925년 전라남도 문화유산자료 - 곡성 오강사
한말의 대표적인 위정척사 사상가이자 독립운동가인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의 전신 초상화이다.
근대기 대표 초상화가인 석지(石芝) 채용신(蔡龍臣)이 그렸다.












운요호 사건 : 기획된 도발
1875년 일본 군함 운요호가 강화도 앞바다에 나타나면서 조일 관계는 변곡점을 맞이하게 된다.
이 사건은 표면적으로 식수를 구하려던 일본 배에
조선 수비대가 먼저 포격을 가해 발생한 우발적 충돌처럼 보였으나
이면에는 일본의 치밀한 군사적. 외교적 계산이 있었다.
일본은 측량과 항로 조사라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조선을 압박하여
외교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도가 강했다. 미국의 페리 제독이 일본을 개항시킬 때 사용한
"포함 외교( 砲艦外交)"를 따라 했던 것이다.
운요호 사건이 기획된 도발이라는 것은 나가사키로 귀항한 운요호 함장 요시카가 작성한 두 개의
보고서가 완전히 달랐던 점을 통해 알 수 있다. 이노우에는 귀한 다음날인 9월 28일 사건의 전말을
기록한 보고서를 해군성에 제출했다.
여기에는 9월 20일 초지진에서의 최초 전투 이후 9월 22일 철수하면서
영종진을 함락시킨 뒤 나가사키로 복귀했다고 적혀있다.
그러나 10월 8일 해군성에는 이노우에의 또 다른 보고서가 제출되었다.
초지진 전투부터 영종진 함락까지 모든 사건이 9월 20일 하루동안 벌어진 것으로 기록한 문서였다.
그리고 일본 해군성은 10월 8일자 보고서를 운요호 사건의 공식 보고서로 공표했다.
운요호 사건의 진상이 알려질 경우 폭주할 국제사회의 비난을 면하고,
조선이 국제법에 무지한 나라라는 인식을 퍼뜨리기 위해서였다.

운양(요)호(雲揚號)
1875년 9월 초지진과 영종도 등을 공격하여 강화도 조약 체결의 결정적 계기를 만든 일본의 군함이다.
영국에서 제작된 목조 증기선으로 돛과 엔진을 함께 사용하는 근대적 무장 기선의 형태를 띠고 있다.

운요호 조선 강화도 교전도 -19세기
일본 군함 운요호가 강화도에 무단으로 접근하여 조선 수비대와 교전을 벌이는 장면을 담은
일본 판화이다. 중앙 상단에 "雲揚艦兵士朝鮮江華戰之圖(운양함병사조선강화전지도)" 라고 적혀 있다.





강화도 조약 체결 상상도

강화도 조약 협상 장소인 연무당과 서문
1876년 - 국립중앙박물관

강화도 조약 사진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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