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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馬처럼 걷는 서울 여행

( 용산) 전쟁기념관(6.25 전쟁과 인천상륙작전)

 

북한의 기습공격으로 전쟁이 일어나다

 

1950. 6. 22 북한군 남침 명령 하달

6.25 38선 전역에서 기습 남침

6. 28 북한군 서울 점령

7. 3 국군 한강 방어선 철수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은 38선 전체에서 대대적인 무력 남침을 시작했다.

국군은 최선을 다해 맞섰지만,

최신형 T-34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의 맹렬한 공격으로 수도 서울은 3일 만에 점령당하고 말았다.

국군은 한강 남쪽으로 철수해 방어선을 구축하고 유엔군이 도착할 때까지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하였다.

 

 

 

 

 

 

 

 

 

 

 

 

 

 

 

열악한 국군의 무기

 

 

 

 

 

 

 

 

 

 

 

 

 

 

 

 

 

 

 

이름 없는 별들 -학도의용군

 

 

 

 

* 학도의용군 임명장

1951년 3월 10일 국방부 정훈국장이

청주 상과대학생 김진영을 학도호국 의용 충청북도대장으로 임명한 임명장이다.

 

* 학도의용대 정훈공작훈련 수료증

1950년 8월 국방부 정훈국학도의용대 제2기생의 정훈공작훈련 수료증이다.

 

 

 

 

 

 

 

 

태극단동지회 기증품

태극단(太極團)은 북한의 남침 후 고양 . 파주 지역 경의선 열차 통학생을 중심으로 200여 명의 청년들이

결성한 반공 지하결사대이다. 

이들은 적 보급로 차단, 통신선 절단, 강재의용군 해산 등의 후방 교란에 힘쓰다 체포되어 서울 수복을 앞둔 

9월 26일 45인이 학살당했다. 

고양시 일산서구덕이동에 있는 태극당반공유적지에는 당시 희생된 45인의 유격전에서 전사한 

9인을 모시고 있다.

 

 

 

 

 

 

 

 

 

반대를 무릅쓰고 감행한 인천상륙작전

맥아더 장군은 6월 29일 한강 방어선을 시찰하면서 인천상륙작전을 구상하였다.

인천항은 서울에 인접해 있어 그 중요성이 매우 컸으나, 수로가 좁고 조수간만의 차가 심하여 

대규모 함대의 이동이 어려운 조건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를 들어 미 합동참모본부와 극동 해군은 작전을 반대했으나, 맥아더 장군은 전략적, 심리적,

정치적인 이유로 서울을 단시일 내 탈환하기 위해서 인천에 상륙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합동참모본부는 8월 28일 인천상륙작전인 "크로마이트 Chromite 적전계획"을 승인하였다.

9월 12일부터 적을 교란하고 고립시키기 위해 인천과 주요 항궁에 폭격이 가해지는 가운데, 

7만 5천명의 상륙병력을 탑승시킨 261척의 함정이 부산항 및 일본을 출발하였다. 

9월 14일 밤 모든 함대가 인천 외항에 집결하였고, 9월 15일 새벽 2시 팔미도 등대가 밝혀지면서 

드디어 상륙작전이 결행되었다.

 

맥아더 장군이 사용한 담배 파이프

1950년 6월 29일 맥아더장군이 한국전선 시찰 중 사용한 담배 파이프로 

맥아더장군의 C-54 전용기(Bataan) 조종사였던 에드워드 할핀 미 공군 (예) 대령이 1984년 

여의도 안보전시장을 방문하여 기증하였다. 이후 유엔한국전참전협회 지갑종 회장이 보관해 오다

2015년 5월 전쟁기념관에 기증하였다.

 

 

맥아더장군 전용기에서 사용된 항공지도

1950년 6월 29일 맥아더장군의 한국전선 시찰 중 c-54 전용기에서 사용된 항공지도이다.

 

 

맥아더장군 감사서신

인천상륙작전에 참여한 최규봉 전 KLO부대 유격대장으로부터 성조기를 기증받은 맥아더 장군이

1957년 11월 8일 감사의 표시로 보낸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