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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馬처럼 걷는 경기 여행

(남양주) 봉선사에서 광릉 가는 길

 

 

대중교통을 이용한 여행길은

다음에 다시 찾아오기 쉽지 않으니 한꺼번에 많은 곳을 보려 하고 또 차 시간에 맞춰야 하므로

늘 서두는 편이라 여행 후 아쉬움도 많다.

 

그러나

이번 봉선사와 광릉 여행길은 멀지 않은 곳으로 교통편도 나쁘지 않아 여유롭게 봉선사에 머물고

봉선사에서 광릉까지 도보로 왕복할 수 있었다.

더구나 봉선사에서 광릉 가는 길은 데크로 놓여 있고 찾기를 벗어난 숲길을 걸으니

햇볕도 가리워 시원하며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까지 들으며

기분 좋게 힐링할 수 있었다.

 

 

봉선사를 떠나면서

내 어렸을 적 시골 울타리 가 혹은 우물가에 피었던 노란 난초꽃을 담아 보았다.

 

 

연꽃과 불상

 

 

불두화(佛頭花)

 

 

 

더운 날이지만,

봉선사에서 광릉까지 왕복 5km 광릉숲길을 오랜만에 아무 생각 없이 걸으며 힐링할 수 있었다.

 

 

광릉 가는 도중 국립수목원에서 흘러내리는 시냇물

 

 

 

 

세계유산 조선왕릉

조선왕릉은 조선(1392~1897)의 왕과 왕비 그리고 대한제국(1897~1910)의 황제와 황후 

73명의 무덤을 통틀어 가리키는 말이다.

능은 모두 42기가 있으며, 500년 넘게 이어 온 왕조의 모든 왕과 왕비의 능이 온전히 남아 있어 ,

북한에 있는 2기를 제외한 40기가 200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왕조는 왕릉 조성과 관리에 효와 예를 갖추어 정성을 다했으며, 풍수 사상에

따라 최고 명당에 왕릉 자리를 정항고 주변 지형과 경관을 그대로 살려 능을 만들었다.

왕릉을 짓고 관리하는 일을 상세하게 적은 기록이 풍부하게 남았으며, 지금도 각 왕릉에서는

해마다 제향을 지내며 전통을 잇고 있어 살아 있는 문화유산으로 인정받고 있다.

 

광릉(光陵)

조선 7대 왕 세조와 정희왕후 윤씨의 능으로,

1468년 세조가 세상을 떠나 이곳에 광릉을 만들었고, 1483(성종 14) 정희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세조 능의 동쪽 언덕에 정희왕후의 능을 만들었다.

이때 두 능 사이로 정자각을 옮겨 짓고 한 곳에서 제향을 지내고 능의 이름도 함께 쓰도록 했다.

이로써 광릉은 하나의 능이지만 왕과 왕비의 능을 서로 다른 언덕에 각각 만든 

최초의 사례가 되었다.

 

 

광릉 조성 이야기

세조는 생전에 말하길 '죽으면 속히 썩어야 하니 석실과 석곽을 사용하지 말 것이며,

병풍석을 세우지 말라'라고 했다.

1468년 세조가 세상을 떠나자 아들인 예종은 이 말을 따라 관이 들어갈 자리에 돌방(석실)을 만들지 않고

삼물회를 사용하여 회격(관을 구덩이 안에 놓고 사이를 석회로 메워서 다짐)으로 방을 만들고, 

봉분에 병풍석도 두르지 않았다.

 

삼물회는 황토와 고운 모래, 석회를 가르키는데 세 가지 재료를 잘 섞은 뒤 다지고 굳히면

돌처럼 단단해져 돌방 대신 반듯하고 단단한 회격 방을 만들 수 있다.

병풍석은 봉분의 흙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방지하는 역할을 했는데, 산에서 큰 돌을 옮겨와 다듬고

문양을 새겨 넣어야 했으므로 인력과 비용이 많이 들었는데,

광릉은 석실과 병풍석을 만들지 않으니 경비가 많이 줄었다.

 

이후

정희왕후를 광릉에 모실 때도 세조의 능과 같게 회격 방을 만들기로 하면서 이후왕릉에는 석실을 만들지

않게 되었다.

이로써 광릉은 같은 능역에 있지만 왕과 왕비를 다른 언덕에 따로 모신 최초의 조선왕릉이 되었고,

이후 왕과 왕비의 능을 서로 다른 언덕에 세우는 선례가 되었다.

 

 

- 광릉의 능침 공간 -

 

 

- 세조의 능 -

 

- 정희왕후의 능 -

 

 

하마비(下馬碑)

광릉에는 조선왕릉 중 유일하게 하마비(下馬碑)가 남아있다.

 

 

광릉 재실(光陵 齋室)

재실은 왕릉을 지키고 관리하는 참봉(參奉)이 상주하던 곳으로 

제향을 지낼 때는 제관들이 머물면서 제사에 관련된 일을 준비하기도 했다.

재실은 참봉의 집무실인 재실, 향과 축문을 보관하는 안향청, 제기(祭器)를 보관하는 제기 고와 그 외 

부속 공간인 행랑 등으로 구성되었다.

광릉 재실은 현재 재실과 일부 행랑만 남아 있는데, 

조선 후기의 문헌인 "춘관통고(春官通考)"에는 전사청 6칸, 제기고 3칸, 안향청, 재실 6칸으로 구성되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광릉 가는 길

 

 

세조

 조선의 제7대 국왕

조선 왕조에서 최초로 왕세자를 거치지 않고 즉위한 임금이자, 최초로 반정을 일으켜 즉위한 군주로,

세종과 소헌왕후 사이에서 1417년(태종 17) 9월 29일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1445년(세종 27)에 수양대군으로 봉해졌으며

타고난 자질이 영특하고 명민하여 학문이 높았을 뿐만 아니라 무예에도 뛰어났다고 전한다.

 

대군 시절,

세종의 명을 받아 불교 서적 번역을 관장하고, 향악의 악보 정리에도 힘을 쏟았으며,

1452년(문종 2) 관습도감 도제조에 임명되어 국가의 실무를 맡아보기도 했다.

 

세종이 병들고 세자였던 문종이 대리청정을 하자,

그는 동생인 안평대군과 함께 신하들에게 세종과 문종의 교지를 전하기도 하였다. 수양대군과 안평대군 형제는

당시 조정 중신들이 왕권에 공공연히 도전하는 것을 보고 탐탁지 않게 여기며 후일을 기약했다고 한다.

그러나 둘째 아들 수양과 셋째 아들 안평에게 야심이 있다는 것을 간파한 부왕 세종대왕은

수양과 안평을 궐 근처에서 떨어져 있게 했다.

 

문종이 승하하고

나이어린 조카 단종이 왕위에 오르자

 김종서나 황보인 등 의정부 신하들의 힘이 왕권을 능가하고 있었다는 상황 속에서

왕실과 훈신들은 위기의식을 느끼게 되었다. 이때 종친들은 저마다 두각을 드러내고 있었고,

아우 안평대군 계열이 왕위에 뜻을 두고 있음을 알게 되자 수양대군 역시 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측근인 권람, 한명회 등과 결탁하여

1453년(단종 1) 10월 계유정난을 일으켜 조선 7대 임금으로 즉위하고,

왕권의 강화를 위하여 의정부 서사제를 폐지하고 전제왕권제에 가까운 육조직계제를 단행했으며,

집현전을 폐지하고 경연을 없앴으며, 왕명 출납 기능이 있는 승정원을 강화시키고,

호패법을 복원하였으며,

군제 정비에도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아 많은 치적을 세워 조선 초기 왕권 확립에 크게 공헌했다.

 

그러나 사육신으로 불리는 집현전 학사 출신 관료들이 단종 복위를 계획한 사건이 발각되자

이들을 모두 살해하였을 뿐 아니라

선왕이자 조카인 단종을 유배지에서 죽이는 등 수많은 정적의 피를 보았다.

 

 

계유정난(癸酉靖難)

 

1453년(단종 1) 단종 보위 세력의 정치 주도에 불만을 품은 수양대군이 일으킨 쿠데타였다.

1453년 10월 10일 수양대군은 한명회, 권람, 홍달손을 집으로 불러 자신이 직접 반대파 세력인 김종서를

제거할 것임을 알렸다.

그리고는 미리 권람을 시켜 김종서의 집을 엿보게 한 후 향정, 유소, 종 임운과 함께 바로 김종서의 집으로

향하였고, 수양대군의 명을 받은 임운은 철퇴를 내리쳐 김종서를 살해하였다.

다음날 새벽,

수양대군은 단종이 있는 시좌소로 가서 환관을 통해 현재의 상황에 대하여 단종에게 형식적인 보고를 하였다.

그리고 궐 안이 좁다는 이유를 내세워 재상들이 시종을 두고 혼자 들어오게 하여

그들을 순서대로 죽이는 방법으로 미리 작성된 살생부에 오른 인물들에 대한 살육을 하고 이러한 절차를 거쳐 영의정, 이조판서, 병조판서, 내외병마도통사 등을 겸임하며 실제 정권과 군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2년여가 지난 1455년 6월 2일 단종으로부터 옥새를 건네받고

6월 11일 7대 임금으로 즉위하였다.

 

 

세조는 피부에 고름이 생기다가 문둥병으로 이어졌고,

만년에는 왕위 찬탈로 인한 인간적인 고뇌에 싸여 불교에 귀의했다고도 한다.

반면 적장자였던 조카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행위가 유교의 시각으로는 결코 용납되지 않는 만큼,

세조의 불교 융성 정책은

유교적 입지가 약했던 세조 나름의 성리학자 견제수단이었다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이는 유교 성리학을 국교로 하는 조선의 국가 이념과 정면 배치되는 것이었다.

 그의 불교 귀의에 항의하여 김종직을 비롯한 사림 학자들과 훈구 유학자들은 연명 상소와 사퇴 등으로 

항의의사를 표시 했으며, 

 1468년 세조는 자신의 건강이 점점 악화되어 가고 있음을 깨닫고,

한명회 및 신숙주, 구치관 등을 불러 그들에게 왕세자를 잘 보필해 줄 것을 부탁했다.

음력 9월 7일에 왕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다음 날인 8일에 승하하였다. 당시 나이 향년 52살이었다.

 

세조 능의 전경

 

 

세조와 정희왕후의 비(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