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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馬처럼 걷는 경기 여행

(수원) 봄날 화성을 걷다(동장대~화서문)

- 용연과 방화수류정 -

 

화성은 우리나라 성(城)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완벽한 성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더구나

용연에 반추된 방화수류정은 화성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다.

 

성(城)은 적의 공격을 막기 위해  쌓은 구조물이라면 화성은 용연과 방화수류정이란 정자가 있으므로

성(城)의 성격을 넘어선 아주 아름답고 자연을 벗하여 태평성대를 기원하는 여유로움이 넘친다.

그러나

방화수류정에는 화포를 쏠 수 있는 시설이 갖춰져 있어 유사시에는 군사시설임을 볼 수 있다.

 

몇 년 전 이곳을 찾았을 때는

연못 바로 앞까지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 사진 담기도 쉽지 않았는데

지금은 용연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게 시설을 보완해 관광객들은 용연 주변길을 벗어난 잔디밭에서 

휴식을 취하니 용연의 물이 더욱 맑아진 듯싶다.

 

 

- 성 밖에서 본 동암문 -

동암문(東暗門)

동암문은 화성 동쪽에 낸 비상 출입문으로,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설치하여 적이 모르게 출입하고

군수품을 조달하던 문을 의미한다.

화성에는 5곳의 암문이 있었는데

모두 벽돌로 만들었으며 동암문 상부에는 윗부분을 둥글게 만든 원여장을 설치했고,

좌우에는 네모난 비예를 세웠다. 비예는 암문 위에서 몸을 숨기고 적을 감시하기 위해 만든 여장이다.

성 안쪽에 도로가 생기면서 지형이 높아져 

1976년 동암문 복원 시 계단을 추가했다.

 

 

동암문에서 본 동북포루

 

 

 

동암문으로 성밖에 나오니 소나무 한 그루가 참 좋아 담아본다.

 

 

화성의 꽃 방화수류정과 용연 그리고 저 멀리 뒤로 장안문 지붕이 보인다.

 

 

용연과 방화수류정

 

 

- 일제 강점기 때 용연과 방화수류정 -

 

 

 

 

축 늘어진 수양버드나무가 인상적이다.

 

 

 

 

 

화홍문(華虹門)과 방화수류정

 

 

1848년(헌종  14) 홍수로 화홍문 유실

 

 

- 장안문 -

성곽 내벽을 따라 활짝 핀 노란 씀바귀꽃이 우뚝 솟은 장안문과 참 잘 어울린다

 

- 옹성문에서 본 장안문 -

 

 

- 장안문 전경 -

장안문(長安門)

장안문은 수원 화성의 북문이다.

정조는 장안(長安)의 의미를 '북쪽으로 서울의 궁궐을 바라보고, 남으로는 현륭원(융룽)을 바라보며

만년의 편안함을 길이 알린다.'라고 풀이했다.

문 밖에 항아리 모양의 옹성(甕城)을 만들고 방어를 위해 좌우에 적대를 세웠다.

 

장안문은 남문인 팔달문과 더불어 화성에서 가장 웅장하고 높은 격식을 갖춘 건물이다. 2층의 누각은 네 모서리 추녀가 길게 경사를 이루면서 용마루와 만나는 우진각 지붕 형태다.

길고 휘어진 목재를 구하기 힘든 조선 시대에 우진각 지붕은 궁궐이나 도성의 정문과 같은 건물에만 쓰였다.

문루 처마 밑에는 다포(多包)라는 화려하고 정교하게 다듬은 받침 목재를 짜 맞췄는데,

다포식 건물은 18세기 이후 궁궐에서도 거의 백 년 동안 짓지 않았기 때문에 특별히 강원도 출신의 승려 목수인

굉흡이 와서 건설을 도왔다. 

 

서울의 숭례문, 흥인지문과 함께 조선 시대 성문을 대표하던 장안문은 한국 전쟁 때

폭격으로 파괴도가 1975년에 다시 복원하였다.

석축에 총탄 자국이 남아 있다.

옹성 : 성을 지키기 위하여 성문 밖에 쌓은 작은 성

용마루 : 지붕 가운데 부분에 있는 가장 높은 수평 마루

 

 

 

 

- 성 안에서 본 장안문 -

 

 

 

 

 

 

장안문에서 본 북옹성문

 

 

- 1952년 문루가 사라진 장안문 -

 

장안문에서 화서문 가는 성벽에는 노란 씀바귀꽃이 피어 장관을 이루고 있다.

 

- 성안에서 본 화서문 -

 

- 성안에서 본 화서문 -

화서문(華西門)

보물 제403호

화서문은 수원 화성의 서문이다.

"화성의 서쪽"이란 뜻이지만 서쪽에는 팔달산이 있어 서북쪽에 문을 두었다.

문밖으로 넓은 평지가 펼쳐져 있어 주변을 감시하기 위해 높다란 서북공심돈을 함께 세웠다.

조선 시대 건축에는 일정한 위계질서가 있다. 같은 성문이지만 장안문과 팔달문은 높은 격식을 갖춘 반면

창룡문과 화서문은 한 단계 격을 낮춘 형태이다.

석축의 규모도 작고, 1층 문루에 팔작지붕으로 이루어졌다. 화서문은 창건 당시 모습을 잘 유지하고 있어

간결하면서도 섬세한 18세기 건축 기술을 보여준다.

옹성 안 석축에는 공사를 담당한 감독관과 우두머리 석공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서울과 개성, 강화도에서 온 석공이 참여했는데

박상길은 축성이 끝난 후 석공 가운데 가장 높은 등급의 상을 받았다.

 

- 성 밖에서 본 화서문 -

 

 

 

 

 

- 화서문과 서북공심돈 -

 

서북공심돈(西北空心墩)

서북공심돈은 화성 서북쪽에 세운 망루로 주변을 감시하고 공격하는 시설이다.

공심돈은 속이 빈 돈대라는 뜻으로 우리나라 성과 중 화성에서만 볼 수 있다. 보통 돈대는 성곽과 떨어진

높은 곳에 세워 적을 감시하는 시설이나, 서북공심돈은 서북쪽 성벽이 꺾이는 위치에 설치했다.

치성 위에 벽돌로 3층의 망루를 세우고

꼭대기에는 단층의 누각을 올려 군사들이 감시할 수 있도록 하고, 외벽에는 화포를 쏠 수 있는 구멍을 뚫어

공격 기능까지 갖추었다.

 

조선 정조 21년(1797) 정월, 완성된 화성을 둘러보던 정조는 서북공심돈 앞에 멈춰

"우리나라 성곽에서 처음 지은 것이니 마음껏 구경하라."며 매우 만족스러워했다.

화성에는 모두 세 곳에 공심돈을 세웠는데 서북공심돈 만이 축성 당시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치성 : 성벽 일부를 돌출시켜 적을 감시하고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든 시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