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牛馬처럼 걷는 강원 여행

(삼척) 명승 제28호 : 죽서루와 오십천

 

언제 : 2022년 9월 28일 수요일

어디 : 강원도 삼척시 성내동 죽서루

 

 

묵호 등대에서 택시 이용

삼척 죽서루까지 가는데 3만 원 정도 나올 거라는데 2만 원에 가기로 결정

택시로 죽서루 앞에 내렸다.

 

2020년 11월 16일 죽서루를 방문했었는데,

그땐 없던 건물이 죽서루 서편에 짓고 있다.

 

오십천이 감돌아가는 물돌이의 절벽,

그 벼랑 위에 날아갈 듯 죽서루(竹西樓)가 아름답게 서 있다. 1875년(고종 12) 삼척부사로 부임했던

심영경(沈英慶)은 죽서루의 빼어난 모습에 감탄하여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이외에도 죽서루의 선경을 찬양한 글은 수없이 많다.

1662년(현종 3) 도호부사였던 미수 허목은 〈죽서루기(竹西樓記)〉에서 죽서루의 비경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조선의 동쪽 경계에는 경치가 좋은 곳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여덟 곳(관동팔경)은 가장 뛰어나다.”

 

 

 

 

 

 

 

죽서루도(竹西樓圖)

1788년 단원 김홍도가 그린 죽서루의 모습으로

오십천이 S자형으로 크게 감돌아가는 석벽이 눈에 띈다. 죽서루 아래에서 반대 방향으로 돌아가는 하천은

오늘날 직강으로 바뀐 상태다.

 

 

 

보물 제213호 : 죽서루

 

 

 

누각의 전면에 걸려 있는

 ‘죽서루’와 ‘관동제일루(關東第一樓)’ 현판은 1715년(숙종 41) 삼척부사 이성조가 쓴 글씨로

죽서루를 관동에서 제일가는 누각으로 표현하고 있다.

 

 

 

누각 안 ‘제일계정(第一溪亭)’은 허목의 글씨로

이것은 오십천의 계류와 기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죽서루의 아름다운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 '제일계정(시냇가에 있는 정자로는 제일)’ -

 

 허목이 삼척부사로 부임해왔던 때는 그의 나이 68세였다.

남인의 영수였던 그는 서인의 영수 송시열과의 ‘1차 예송논쟁’에서 패배해 삼척부사로 좌천됐다.

 

 

 

 

 

 

 

 

 

죽서루 마루를 받치는 기둥들은 자연 암반을 초석하여 기둥 길이가 다르다.

 

 

 

죽서루

작자미상

 

 

 

해선유희지소(海仙遊戱之所)

1837년(헌종 3) 부사 이규헌이 쓴 것이다.

- 바다 신선이 노니는 곳 -

 

 

중앙

제일계정

조선 현종대(1660~1662) 삼척부사 허묵 글씨

 

 

 

 

 

조선 21대 정조 어제시

 정조가 김홍도 그림을 보고 지은 시 

 

正祖의 御製詩


彫石鐫崖寄一樓(조석전애기일루)

돌 다듬고 절벽 쪼아서 세운 누각 하나

樓邊滄海海邊鷗(누변창해해변구)

누각 곁엔 푸른 바다 바닷가엔 갈매기

竹西太守誰家子(죽서태수수가자)

죽서 태수는 누구 집안의 아들이련가

滿載紅粧卜夜遊(만재홍장벽야유)

미녀들 가득 싣고 밤 새워 뱃놀이로세 

 

 

숙종의 어제시(御製詩)

 

硉兀層崖百尺樓 

위태로운 벼랑에 드높이 솟은 백 척 누각

朝雲夕月影淸流 

아침 구름 저녁 달 그림자 청류에 비치고

粼粼波裡魚浮沒 

맑고 깨끗한 물결 속에 물고기 뛰노는데

無事凭欄狎白鷗 

한가히 누각 난간에 기대 물새 희롱하네

 

 

 

정선()[1676~1759]의 『관동명승첩()』에 있는 죽서루 그림.

 

 

 

송강 정철의 글

관동지역의 경승을 얘기할 때 빠뜨릴 수 없는 인물이 정철이다.

정철은 45세에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했다. 그는 내금강과 외금강, 관동팔경을 유람한 뒤

조선가사문학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히는 〈관동별곡〉을 지었다.

죽서루에 올라 시를 남겼다.

 

 

좌측

이이(李珥 : 1536~1584)

조선 선조 때 이율곡이 죽서루에서 시를 차운하다.

누가 하늘 도와 이 아름다운 누각을 세웠는가 그 지나온 세월 얼마인지 알 수가 없구나

들판 저 멀리 산 봉우리에는 검푸른 빛 서려있고 모래사장 부근에는 차가운 물 고여있네

시인은 본래 남 모르는 한이 많다지만 깨끗한 이곳에서 어찌 나그네의 근심을 일으켜야만 하오리오

온갖 인연 모두 떨쳐버리고 긴 낚시대 들고는 푸른 절벽 서쪽 물가에서 졸고 있는 갈매기와 놀아보리

 

중앙

이승휴(李承休 : 1224~1300)

고려말 학자. 정치가

높은 하늘 고운 색채 높고 험준함을 더하는데 햇빛 가린 구름 조각 용마루와 기둥에서 춤추는구나

푸른 바위에 비스듬히 기대어 날아가는 고니 바라보고 붉은 난간 잡고 내려다보며 노니는 물고기 헤아려 보네

산은 들판을 빙 둘러싸 둥그런 경계를 만들었는데 이 고을은 높은 누각 때문에 매우 유명해졌구나

문득 벼슬 버리고 노년을 편안하게 보내고 싶지만 작은 힘이나마 보태 임금 현명해지기를 바라네

 

 

 

 

 

- 용문바위 -

 

 

 

 

 

 

죽서루에서 올 가을 들어 처음으로 단풍이 든 풍경을 보다.

 

 

- 오십천과 죽서루 -

 

오십천(五十川)

강원도 태백시와 삼척시의 경계인 백병산에서 시작되어 동해로 흘러드는 하천이다.

총길이 46.06킬로미터, 유역면적은 350.16제곱킬로미터로 좁은 편이다.

곡류가 심하여 동해로 흘러가기까지 50번가량 꺾여야 한다고 해서 오십천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죽서루에서 굽어보는 오십천 경관과 강 건너에서 바라보는 죽서루와 절벽부의 경관이 뛰어나,

죽서루 주변 37,321m2이 명승 제28호로 지정되어 있다.

 

연어의 회귀천으로 유명한 오십천에는

은어·숭어·버들개·검정망둑을 비롯한 11종의 담수어가 서식하고 있는데, 공업화·도시화로 인한 하천오염에 따라

그 수가 줄어들고 있다. 

 

 

죽서루와 오십천

양양 낙산사의 의상대와 함께 송강 정철의 〈관동별곡〉에 소개된 관동팔경 가운데 하나로,

지방관아에서 지은 공루로 창건연대와 처음으로 지은이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고려시대였던 1266년(원종 7) 《동안거사집(動安居士集)》이라는 문헌에 서루(西樓)로 표기되었는데,

이 누각이 지금의 죽서루 위치에 지어졌던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므로 1266년 이전에 이미 지어졌던 것으로

추정되어 죽서루는 매우 역사가 깊은 누각임을 알 수 있다.

 

현재의 죽서루는 1403년(태종 3) 삼척부사 김효손이 옛터에 중창한 후 수차례의 중건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죽서루는 정면 7칸, 북쪽 측면 2칸, 남쪽 측면 3칸으로 지어진 특이한 형태의 누각으로

현재 보물 제213호로 지정되어 있다.

죽서루는 관아에 바로 붙어 있는 누각이다.

남원의 광한루는 주변에 고정원을 크게 조성했지만 죽서루는 지금까지의 발굴조사에서 고정원과 관련된 유구가

발견되지 않았다. 이것은 죽서루가 있는 오십천 주변의 경관이 너무 아름답기 때문에

별도의 정원 시설을 조성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죽서루의 동쪽에는 대나무 숲이 있는데

그 옛날 죽림 속에는 죽장사(竹藏寺)라는 절이 있었다고 한다.

죽서루라는 이름은 여기에서 유래한 것으로 죽장사의 서쪽에 위치한 누각을 의미한다.

죽서루에는 많은 편액이 걸려 있다. 누각의 명칭과 의미를 나타내는 현판, 죽서루의 역사를 기록한 편액,

죽서루와 오십천의 풍광에 관한 경관시를 수록해놓은 편액 등 수없이 많은 액자가 누각을 장식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누각의 전면에 걸려 있는 ‘죽서루’와 ‘관동제일루(關東第一樓)’라는

현판은 1715년(숙종 41) 삼척부사 이성조가 쓴 글씨로 죽서루를 관동에서 제일가는 누각으로 표현하고 있다.

또한 현판 중에는 ‘제일계정(第一溪亭)’이라 하여 허목의 글씨가 있는데,

이것은 오십천의 계류와 기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죽서루의 아름다운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