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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馬처럼 걷는 제주 여행

(제주) 사적 제396호 : 제주항파두리 항몽유적지

 

언제 : 2021년 12월 1일 수요일

어디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애월읍 항파두리로 50

 

 

물론

제주 서부지역은 오늘 비 내린다는 일기예보를 알았지만,

변화 심한 섬의 날씨는 가 봐야 아는 것.

 

09:30

제주공항에 내리니 빗방울이 떨어지다 말다 하여 2박 3일 함께 할 차를 렌트하여

항파두리에 가까우니 느닷없이 폭우가 내린다.

 

2017년 8월에 이곳 항파두리를 찾았을 때는

삼별초 항몽유적지는 전라남도 진도에나 있는 줄 알았던 항몽지가 제주도에도 있다기에 스쳐 지나갔다면 

오늘 다시 이곳을 찾은 이유는 

삼별초 유적지인 강화도에서 진도까지 다니며 나름 삼별초에 대한 공부를 했기 때문에

보는 눈이 달라질 것이란 생각이다.

 

 

 

항파두리 외성(토성) 형체

 

 

 

 

 

 

진도에서 대몽항쟁을 전개하던 삼별초가 제주에 들어온 것은

1270년(원종 11) 11월 3일 이문경(李文京) 부대의 제주 명월포(明月浦) 상륙이었다.

 이문경 부대는 이미 제주도에 거점을 마련하고 있던 관군(官軍)과

송담천(松淡川)에서 전투를 벌여 승리함으로써 제주도 내의 교두보를 확보하였다.

 

이어 1271년(원종 12) 5월 김통정은

진도의 용장성이 무너지자, 남은 삼별초 군대를 거느리고 제주도로 들어와 이문경 부대와 합세하여

대몽항쟁을 위한 본격적인 방어 시설을 구축해 나갔다.


이 항몽유적지는 1273년(원종 14) 4월

고려의 김방경(金方慶)과 원장(元將) 흔도(忻都)가 이끄는
여몽연합군(麗蒙聯合軍)에 의해 삼별초가 토벌되기까지 대몽항쟁의 거점이었다.

 

 

이 곳에 내외 이중으로 된 성을 쌓았다.

내성은 사각형의 석성을 쌓았으며, 외성은 언덕과 계곡을 따라 타원형의 토성을 쌓았는데,

그 길이가 15리에 이르러 성안의 면적은 약 30만 평이나 되었다.

성에는 4대문을 설치하고 성 안에는 대궐을 비롯하여 관아·병사·군기고·후망 소(堠望所)·옥사·훈련장 등을

시설하였으며, 우물과 저수지도 마련하였다.

 

김통정은 이 항파두성 외에도 명월(明月)과 애월(涯月)에는 목성(木城)을 축조하고,

조공포(朝貢浦 : 제주시 외도 포구)·귀일포·애월포·명월포·조선포 등에는 군항 시설을 갖추었으며,

적의 상륙이 예상되는 해안 300리에는 이른바 환해장성을 쌓기도 하였다.

 

세갈래 길 항파두리 안내판이 서 있다.

 

 

 

 

 

- 유리호프스(유리옵스) - 원산지 :남아프리카 - 관산용, 약용 -

 

항파두리에서

 

항몽의 피비린내 나는

항파두리 찾으니

스러진 흔적 검은 돌 틈새로

겨울비 내리고

 

이곳과 저곳을 경계하는

돌담 아래엔

 머나먼 아프리카 처녀 유리호프스

노란 꽃

젖어 반긴다

 

천 리 길 찾아온 나그네는

젖어

우는데

 

항파두리에서......

 

 

 

 

 

 

 

- 순의문 -

 

 

 

 

 

 

 

 

 

 

 

 

 

 

 

 

 

돌쩌귀

이 돌들은 그 옛날 삼별초의 김통정 장군이 항파두성을 쌓고

동. 서. 남. 북의 4대 문을 내면서 그 돌쩌귀로 사용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당시의 성문 규모가 확실히 밝혀지지 않아 이 돌들이 과연 그때의 돌쩌귀인지는 분명치 않다.

그렇지만 건축물에 이용되었던 것만은 확실하므로

항파두성에 따르는 유적물의 하나로 보존하게 되었는데,  최근 항파두성의 유적지를 정화하면서

주변에 흩어져 있던 10개를 모아 이곳에 보존하고 있다.

 

 

- 전시실 내부 -

 

항몽 유물

본 유물은 고려 삼별초군이 1271년 제주도에 입도하여 1273년 항쟁이 끝날 때까지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로 항파두성 주위에서 발견

순의문 앞에 전시된 돌쩌귀와 함께 이곳에 전시한다.

 

항파두성 전시실

 

 

삼별초

 

좌별초·우별초·신의군의 3개 별초군을 총칭한다.

고종 때 최우가 도적을 잡기 위해 야별초를 설치했는데 뒤에 그 군사가 많아지자 좌·우별초로 나누었고,

몽골의 고려 침입 때 몽골에 잡혀갔다가 탈출해온 군사와 장정들을 모아 부대를 창설하여 신의군이라 불렀다.

 

삼별초는 경찰·전투의 임무 외에 도성의 수비와 친위대로서의 임무도 수행했다.

삼별초는 고려의 정규군인 2군6위의 활약이 눈에 띄지 않는 가운데, 무인정권이 붕괴되고

고려가 몽골에 항복하자, 이에 반발하여 1270년 반란을 일으켰다.

 

 

삼별초의 항몽

 

고려는 고종 18년(1231) 몽골의 무력 침입을 받고

나라는 전란 속에 빠졌지만 고려 정부는 수도를 강도(江都)로 옮기면서 강렬히 항쟁하니

몽골은 40년이 넘도록 고려를 장악하지 못했다.

 

그러나 원종 11년(1270) 고려 정부는 국왕이 바뀌면서 쇠약해져 몽골의 침략을 계속 막지 못하고 

몽골의 요구에 따라 39년간 몽골 항쟁의 상징이었던 수도를 다시 개경으로 옮겼다.

 

원종 이하 일부 중신들이 비록 개경에 가 있었으나

강화도에는 많은 문무 지배계급과 그들의 가족이 머물고 있었고 많은 물자와 선박이 남아 있어

삼별초는 충분히 항쟁을 계속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 가운데서 삼별초의 배중손 장군이 몽골의 뜻에 따르는 개경 정부에 강력히 반대하고 계속 항몽을 선포했다.

 

그러나 배중손은 강화도를 버릴 수밖에 없었다.

육지와 가까운 강화도가 전략상 좋지 못하리라 판단한 배중손은 곧 배를 모아 온갖 재물과 가족, 심지어는

노비까지 태우고 이튿날 강화도를 떠났다. 

 배중손과 삼별초 군사들은 왕손인 승화후 온(현종의 왕자인 평양공 기의 후손)을 왕으로 옹립하며 

본거지를 진도로 옮겼는데 전선과 운반선 등이 일천 여척에 이르렀다.

진도에 용장성과 대궐을 짓고

군사가 정비되자 서. 남해안을 장악하고 계속 항몽 했다.

 

원종 12년(1271) 5월 몽골과 고려 정부는 정예군으로 여몽 연합군을 구성하고

대대적으로 진도의 삼별초 본부를 공격하여 용장성은 함락되었고 삼별초가 왕으로 추대했던 승화후 온과

배중손 장군 그리고 많은 삼별초 군사들까지 목숨을 잃으니

새로운 지도자 김통정 장군은 남은 군사들과 함께 탐라로 들어왔다.

 

제주도를 항쟁의 거점으로 삼은 삼별초군은

적의 상륙 예상지인 함덕포(咸德浦)와 명월포(明月浦)의 지세를 고려하여 중간 지역인

항파두리에 둘레 15리에 달하는 내. 외성을 쌓고 특히 외성은 흙과 돌멩이를 섞어 쌓고 건물을 지어

삼별초의 근거지로 삼았다.

철옹성이라 할 정도로 견고한 항파두성과 주변에 자성을 쌓으며

군사들을 재정비하고 남해안 일대와 내륙지방까지 기습 공격하여 무기, 식량, 지방수령(몽골 협력자) 사살과 납치,

전선 파괴 운반선 몰수 등을 강행하면서 몽골군을 크게 혼란에 빠뜨렸다.

 

원종 14년(1273) 4월 28일

고려의 김방경(金方慶)과 몽골의 흔도(炘都)가 이끈 여몽 연합군은

군선 160척과 약 1만에 달하는 병력으로 함덕(咸德)과 비양도(飛揚島)로 상륙 삼별초군을 공격했다.

삼별초군은 여몽연합군을 맞아 함덕과 파군봉(坡軍峰) 및 항파두성에서 격렬한 방어전을 폈으나

 인원, 무기, 물자 등에서 워낙 열세인 데다 여몽 연합군은 최신 폭탄 무기를 앞세워 총공격이 강행되었고, 

삼별초 군사들은 최후까지 항쟁하다 부장급 70여 명은 항파두성을 탈출

붉은오름에 올라 혈전을 벌이다 전사하고

홀로 남은 김통정(金通精) 장군은 한라산으로 들어가 자결하고 말았다.

 

몽골 침입 이후

40여 년에 걸친 삼별초군의 항몽 투쟁은 끝이 났으며

제주도에서 최후까지 항쟁한 2년 6개월의 자취가 이 항파두성 사적지이다.

 

삼별초군을 평정시킨 몽골군은 병력을 철수하기는커녕

다루가치 총관부를 설치하고 군사를 주둔시켜 제주도를 몽골의 직속령으로 만들어 1세기 동안 지배하였다.

* 다루가치 - 원나라의 총독(總督)·지사(知事) 등을 호칭한 직명.

원나라에서 각 지역의 군사와 행정 업무를 위해 파견한 관리로,

고려에도 내정 간섭을 위해 파견됨

 

제주도는 해마다 수많은 공물을 바쳤고,

몽골의 일본 정벌을 위한 준비로 목마장(牧馬場)을 설치하여 군마를 기르고,

산야의 나무를 베어 함선을 건조하는 등 어려운 군역에 제주도민들이 수많은 고통을 당했다.

 

몽골의 목마 관리를 위해 제주에 투입되었던 목호(牧胡)들은

원(元)이 멸망한 뒤에도 남아 고려의 사절이나 제주 목사 등을 살해하는 등 만행을 저지르자

공민왕 23년(1374) 8월

고려는 마침내 최영 장군을 삼도 도통사로 삼아 전함 314척과 2만 5천여 명의 대군단을 이끌고

명월지에서 몽골 세력을 토벌하여 1세기에 걸친 몽골의 침략을 종식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