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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馬처럼 걷는 대구+경북 여행

(영주) 2021년 부석사 만추(浮石寺 晩秋)

- 지장전에서 본 안양루와 무량수전 -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게 딱 좋은 날 부석사 가을 풍경이다.

2021년 10월 31일 흔히 시월의 마지막 날에 부석사를 찾은 것은 조금은 무리였다.

그러나

불자도 아니면서 부석사가 보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주말에 가능한 떠나지 않은 여행길에

인천에서 고속버스를 이용하지 않고 일부러 청량리역까지 나가 기차를 이용한 이유는

여행은 기차 여행이라야 여행의 맛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08:10

청량리역을 출발

09:40

풍기역에 도착했다. 

 

풍기에 오면 갈 곳이 많다.

희방사를 거쳐 소백산 연화봉에서 죽령으로 내려올 수도 있고,

부석사를 둘러보고, 소수서원과 선비촌과 금성대군 신단도 둘러볼 수 있고, 영주 무섬마을도 있으나

대중교통을 이용한 여행이고 내일 출근해야 하니 

오늘은 부석사에 내 마음을 풀어 놓기로 한다.

 

 

- 부석사 전경(모셔온 사진) -

사진 가장 좌측 : 관음전 - 중앙 상단 : 무량수전

부석사 가람은 대체로 같은 방향이나 안양루와 무량수전은 우측으로 틀어져 있다.

 

 

저 큰 당산나무 고갯길 너머엔 무엇이 있을까?

부석사 성보박물관을 지나 이 한 폭의 사진을 담을 수 있었던 것은 조용한 곳에서

커피와 준비한 간식을 들고 싶어 찾아간 곳이다.

 

멋들어지게 단풍 든 고목이지만,

이 고개를 넘나드는 수많은 불자들을 맞이하며 그들의 고뇌를 이 고개에 버리고 가라고

얼마나 애태웠을까? 

 

여행의 맛은 내가 얼마나 마음을 열고

보이는 것과 뵈지 않은 것까지도 소통을 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부석사는 마음을 가다듬고 눈길이 가는 대로 느끼며,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발길을 옮기며, 

영혼을 담은 내면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사바의 극락이기도 하다.

 

 

 

 

 

 

 

 

 

 

 

 

 

 

 

 

 

 

 

 

 

 

- 국보 제45호 부석사 소조여래좌상 - 

 

 

- 부석사 무량수전 천정 - 

 

 

 

삼층석탑앞에서

뒤 돌아보면 선인을 닮은 무량수전과 날아갈 듯 안양루 그리고 머리를 조아리는 부석사 가람이

한눈에 들어온다.

 

앞은 확 트인 광활한 대지,

우로는 높은 소백산 준령이 끝없이 이어지고 점점들이 추색으로 빛난다.

왜 이곳이 십승지의 첫 번째인지 알 듯싶다.

 

복잡한 주말이지만 기차 타고 버스 타고 머나먼 부석사를 찾아온 이유를

이제는 보인다.

 

 

- 보물 제249호 부석사 삼층석탑 - 

보통 절에는 탑이 대웅전 앞마당에 놓여있더구먼,

부석사 삼층석탑은 무량수전 앞마당을 벗어난 언덕 한편에 세워져 있다.

마치

전망대에서 사방을 경계하는 경계병처럼.

 

 

국보 2점과 보물 3점이 모셔진 길

일반인들은 무량수전과 삼층석탑까지만 보고 부석사를 보았다가 한다.

그러나

삼층석탑에서 이 산길을 따라 조금 올라가면 조사당과 1300년의 선비화가 내방객을 맞이한다.

그리고

국보 2점과 보물 3점이 있는 곳이다.

국보와 보물이 아무 절이나 있는 것 아니다. 아무리 큰 절이지만, 국보와 보물 한 점 없는 곳도

많은 것을 볼 때 결코 가볍게 지나칠 수 없는 곳이다.

 

사실

오늘처럼 인산인해인 날은 부석사에서 가장 조용하게 걸을 수 있는 곳이며

나를 잠시 놓아둘 수 있는 곳이다.

 

 

- 국보 제19호 조사당 -
- 의상대사 -

 

 

- 국보 제46호 조사당 벽화 -

부석사 조사당 벽화 국보 제46호

부석사 조사당 벽면에 그려졌던 고려시대의 벽화.

각 면 길이 약 205cm, 너비 약 75cm. 보살 2구와 사천왕 등 모두 6폭으로 화면의 손상이 심한 편이며,

현재 부석사 성보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다.

 

원래는 조사당 안쪽 입구에서부터 사천왕상, 보살상의 순으로 돌아가며 배치되어 있었다.

 

보살상은 풍만한 얼굴에 높고 화려한 보관을 썼으며 옆으로 약간 비튼 측면관으로 서 있다.

훼손이 심해 잘 보이지 않으나 한 상은 합장을 하고 있고, 다른 한 상은 지물을 들고 있는 것 같다.

이 두 보살상은 사천왕과 함께 배치된 것으로 보아 불교의 호법신(護法神)인 범천과 제석천으로 추정된다.

 

지국천·증장천·광목천·다문천으로 구성된 사천왕은

갑옷과 투구를 걸친 무인형으로 악귀를 밟고 서 있는데 무서운 얼굴과 건장하고 당당한 자세에서 불법을 수호하는

위엄이 엿보인다.

지물로는 칼과 창만 알아볼 수 있어 각 상의 명칭을 밝히기가 어렵다.

 

이 벽화는 조사당의 건립과 함께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그 뒤 몇 차례 보수되어 원래의 모습이 많이 손상되었지만 고려불화의 양식이 어느 정도 남아 있는

비교적 오래된 작품으로서 중요한 예이다.

 

- 2018년 5월 6일 부석사를 방문했을 때, 조사당 선비화가 꽃을 피워 담았던 사진이다. -

 

 

- 자인당은 현재 출입금지 구역이라 2018년 5월 6일 사진 -

자인당에는

비로자나 여래좌상과 석가여래좌상 보물 3점을 모신 곳이라

오늘 이곳은 출입금지구역인데 오래전에 담았던 사진을 이용했다.

 

- 북지리 석조여래좌상 - 보물 제220호 -1호,  보물 제1636호 - 보물 제220호-2호

 

 

 

- 돌담 -

 

 

오불회괘불도

보물 제1562호 - 860cm x 600cm

이 괘불도는 1754년에 제작된 것이다. 원래 부석사에는 이 괘불도가 제작되기 60년 전인

숙종 10년(1684)에 제작된 것이 있었으나(현재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745년 현재의 괘불도를 다시 제작하였고, 1684년에 만든 것은 수리하여 충청도 제천 신륵사에 옮겼다고 한다.

현재의 괘불도는 이전의 것과 구도가 유사하여 그것을 범본으로 삼아 그린 것으로 보인다.

 

고려 각판

보물 제735호

이 각판은 부석사에 소장된

진본(晋本), 주본(周本), 정원본(貞元本)의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을 새긴 목판으로

13~14세기에 제작되었다. 대방광불화엄경은

크고 방정하고 넓은 뜻을 가진 부처님의 가르침을 화려한 꽃으로 장식한 것 같은 경전이다.

부석사 화엄경판은 우리나라 화엄종의 시조인 의상대사가 창건하여 화엄사상을 발전시켜 나간

부석사에 소장되어 그 가치가 더욱 크다.

 

 

- 부석사 모과나무 -

 

 

- 선묘화 -

선묘 설화

의상(義相)이 당나라에서 공부할 때 동주에 있는 신도의 집에 머무르게 되었는데, 

신도의 딸 선묘가 의상을 사모하게 되었다.

허지만, 의연하게 대하는 의상의 굳은 의지에

"영원히 스님의 제자가 되어 공부와 교화, 불사에 도움을 드리겠다"는 원(願)을 세웠다.

 

훗날 의상이 떠난다는 소식에 미리 준비한 용품을 담아 해안으로 달려갔으나 이미 의상이 떠난 후였다.

선묘는 가져온 함을 바다로 던지며 배에 닿기를 기원하고 용으로 변하여 대사를 모시고 불도를 이루게 해 달라는

주문을 외우고 바다에 몸을 던졌다.

 

신라에 귀국한 의상은 중생을 교화하던 중 676년(문무왕 16)

태백산의 한 줄기에 절터를 발견하였으나 이미 다른 무리들이 살고 있었다.

이때 갑자기 선묘룡이 나타나 큰 바위를 공중에 들었다 놓았다.

이에 놀란 무리들이 굴복하고 모두 의상의 제자가 되어 불사를 도왔다.

 

돌이 공중에 떴다고 해서 절 이름을 부석사(浮石寺)라 지었다.

그 부석은 무량수전 서쪽 암벽 밑에 있으며 선묘룡은 무량수전 앞 석등 밑에 묻혀 절의 수호신이 되었다.

1967년 5월 신라 오악 학술조사단이 무량수전 앞뜰에서 이 설화를 뒷받침하는

5m가량의 석용 하반부를 발굴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