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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馬처럼 걷는 강원 여행

(강릉) 시대의 반항아 허균과 허난설헌의 생가를 찾아

- 경포호반의 홍길동상 -

 

강릉 바닷가 사천과 이어진 교룡산(蛟龍山) 정기를 타고난 허균(1569~1618 호: 교산(蛟山)과 

난초향과 눈처럼 깨끗한 성품을 지닌 허초희(許楚姬) (1563~1589 : 호 - 난설헌)는 문향 강릉이 낳은 오누이 문인이다.

 

매천(梅泉 황헌(黃玹)은

이들과 허봉(許篈)을 가리켜 "초당 가문에 세 그루 보배로운 나무. 제일의 시선 재주는 경번에 속하였네"라고

찬국조제가시(讚國朝諸家詩)에서 칭송하였는데,

특히 그중 난설헌의 글재주가 가장 돋보여 신선 재주를 닮았다고 하였다.

 

오누이는 아버지 허엽(許曄)과 장남 허성(許筬) 그리고 허봉과 함께 허 씨 5문장가를 이루어

글 잘 짓고 학문하는 것을 자랑거리로 삼는 강릉 땅 초당에서 살면서 경포호의 아름다운 풍광을 탐승하며

시를 읇고 문학성을 키워 나갔다.

특히 막내 허균의 시 "경포호를 그리워하며"에서 

"내 집은 경포호의 서쪽에 있으니 바위돌 골짜기들이 회개명산과 같아라"라고 하는 등

여러 작품을 통해 강릉에 대한 애착을 표현했다.

 

 

 

 

 

 

 

 

 

 

 

 

 

강릉 올 때 마다 느끼는 감정은

단아하고 조용하며 깨끗하다는 것은 아마도 신사임당과 허난설헌의 영향 이리라.

오죽헌에서는 오죽을 보며 힐링을 하지만

허난설헌 생가인

초당 고택 주변의 솔숲은 복잡한 삶에서 벗어나고 싶을 땐 언제나 생각나는 곳이기도 하다.

 

오늘

그 솔밭길을 혼자 걷는다.

가까이 경포호가 있고, 파도 부서지는 동해바다가 있지만.....

 

- 솟을 대문 -

초당 고택

조선 선조 때 부친인 초당 허엽 선생이 살던 곳으로 허초희 님이 태어났으며,

허균 선생이 살았다고 전한다.

고택 안채에는 난설헌 허초희 님의 영정이, 사랑채에는 교산 허균 선생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토담과 주변 솔밭이 조화를 이룬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 명당으로 알려져 있다.

 

- 사랑채 -

 

- 사랑채 옆에 있는 배롱나무 -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으로 피폐해진 조선 중기 사회,

곳곳에서 고개를 쳐들고 있는 기회주의적 세력들. 이런 어수선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허균은 성장했다.

벼슬도 고위직은 아니지만 남들만큼 했다.

그러나 타고난 ‘끼’ 탓에 만족할 수 없었다.

양반 가문 ‘한량’이자 시대의 반항아 허균은 자신만의 이상 세계를 그리면서,

동지들을 규합해 거사를 계획한다.

그의 나이 쉰 살.

반정이 아니라 아예 판을 뒤집어엎는, 근본적인 혁명을 추구했다.

오랜 벗이기도 했던 왕 광해군마저 제거하려 계획했다. 허균이 그린 이상 사회는 힘없고 소외된 사람들이

행복하게 사는 사회였다. 과연 이런 게 가능한가라는 점에서는 지금도 이견이 분분하겠지만,

허균은 그런 세계를 만들려 했다.

 

- 허균, 최후의 19일 역사소설에서 -

 

- 사랑채에 모셔진 교산(蛟山) 허균 영정 -

 

 

 

 

- 사랑채와 안채 입구는 흙담으로 경계를 이루었다. -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사랑채가 있고, 흙담으로 안채와 사랑채의 경계를 이루며,

안채를 들어서면 곳간과 부엌 등이 있다.

 

- 안채 -

 

- 안채에 모셔진 허난설현 영정 -

 

- 안채에서 보는 입구와 창고 - 

 

- 안채 뒤뜰 툇마루에 사진을 담는 어린이들이 어여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