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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馬처럼 걷는 강원 여행

(강릉) 사적 제388호 : 강릉 대도호부 관아

 

 

 강원도 강릉시에 있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걸쳐 중앙의 관리들이 강릉에 내려오면 머물던 건물터로

1994년 7월 11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388호로 지정되었다.

 

강릉 임영관지는 강릉부 객사 건물인

임영관의 터이며, 객사(客舍)는 지방으로 출장 온 중앙관리의 숙소로 사용하였던 곳이다.

강릉의 객사는 "강릉부 읍지"(江陵府 邑誌) 건치 연혁에 따르면

'고려 태조 19년인 936년에 강릉을 동원경(東原京)이라 칭하고 임영관을 창건'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창건 당시의 규모 등은 확인할 수 없고 여러 차례에 걸쳐 중창되어 왔으며

일제강점기 강릉 공립 보통학교가 세워지면서 철거되었다.

 

강릉시청사 신축을 위해

수목의 채굴과 구 강릉경찰서 지하구조물의 철거 과정에서 임영관 건물지 및 조선시대·고려시대의

건물 하부구조와 다량의 유물이 출토되어 1994년 7월 11일 사적 제388호로 지정되었다.

 

2000년부터 전통문화도시 도심 관아 유적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임영관지 내 전대청(殿大廳)·중대청(中大廳)·동대청(東大廳)·서헌(西軒)의 4개 동 건물을 비롯한 석축,

담장 등 복원을 추진하여 2006년 완료하였다.

 

임영관지는 객사문 및 부사(府使)가 업무를 살폈던 칠사당(七事堂)과 함께 강릉의 관청 건물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강릉 대도호부의 위용

 

 

 

 

 

- 동헌과 별당 -

 

 

- 동헌 -

 

 

- 의운루에서 본 동헌과 객사 -

 

 

- 의운루 -

 

 

- 의운루에서 본 강릉 시내 -

 

강릉 대도호부관아(江陵大都護府官衙)

현재 객사문은 이 터의 남측에 국보 제51호로 지정 보존되어 있고,

서측에는 임진왜란 이후 경주에 있던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셔다 봉안하였던 집경전(集慶殿)터가 있다.

 

조선 영조 때인 1750년대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임영지(臨瀛誌)』에 의하면,

임영관은 936년(고려 태조 19)에 창건되었고, 그 후 1627년(인조 5) 대청(大廳)이 화재를 당하여,

1633년 부사 유문화(柳文華)가 다시 건축하였다. 그 후 수차례의 중수와 중창을 거쳐 1927년에 이르렀다.

 

『임영지』에 의하면, 강릉 객사의 규모는

전대청(殿大廳) 9칸, 중대청 12칸, 동대청 13칸, 낭청방(廊廳房) 6칸, 서헌(西軒) 6칸, 월랑(月廊) 31칸,

삼문(三門) 6칸 등 모두 83칸이었다고 한다.

 

- 국보 제51호 강릉 임영관 삼문 -
- 안에서 본 임영관 삼문 -

 

 

- 중대청 -

 

 

- 동대청 -

 

 

 

- 임영관 -

 

 

- 서헌 -

 

 

 

 

 

 

 

 

 

 

강릉 대도호부 관아는

조선시대 강릉 대도호부 행정 기관이 위치한 읍치(邑治) 공간으로 지방행정 기구들이 모여 있던 곳이다.
강릉은 고려 말인 1389년(공양왕 1) 대도호부로 승격된 이후 조선말까지 유지되어 오다가,

1894년 갑오개혁으로 지방 제도가 개편되면서 폐지되었다.

 

개인적으로 강릉 도호부에 대해 궁금했고 관심이 있었다.

삼국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영동지역은 지금처럼 교통이 편리한 지역이 아니라

걸어서 혹은 말 타고 대관령을 넘는다는 일이 쉬운 일이던가!

 

왕권의 영향이 타 지역에 비해 약하고

당연히 토호세력의 반발과 왜구의 침입에 시달려 군사기능이 강화되었을 것이란 생각이었다.

그러나

  수양버들 늘어진 물가에 멋들어진 누각 하나 없고 치안을 담당했던 감옥 등도 뵈지 않아 조금은 아쉽기도 했다.

 

허기야

먹고 살기 편하고 한양과 교류가 빈번해야 백성이 많아 관아의 위용도 있었을 터,

그러함에도

율곡 이이와 교산 허균과 허난설헌 등 뛰어난 행정가와 유명 문사들이 많아 

고려시대와 조선 시대의 영동지역의 삶이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