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 2020년 12월 9일 수요일
어디 :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국화리 산 180
12월 9일 세계는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망자가 150만 명을 넘어섰다.
이는 지난해 12월 세계보건기구(WHO)에 ‘정체불명의 폐렴’으로 코로나19가 처음 보고되고 약 1년 만이다.
12월 들어 우리나라도
우려할만하게 코로나 19 확진자들의 증가가 급속이 늘어나고 있어 9일 현재 확진자 수는 39,432명이고
사망자는 556명이다.
그동안 여행도 하지 않고
일주일에 2~3일 탁구장에 나가 스트레스를 풀었는데, 수도권도 사회적 거리두기 2.5로 격상되면서
탁구장도 못 나가, 강화도를 걸으며 역사도 공부할 겸 터미널에 도착하니
터미널 공사 중이라 어수선하다.
오늘 강화도에 온 목적은
남한에는 고려의 흔적이 거의 없는데, 강화도 천도로 고려왕릉 4기가 남아 있어
23대 고종의 홍릉, 22대 강종비 원덕태후의 곤릉, 21대 희종의 석릉, 24대 원종비, 김약선의 딸 순경태후의 가릉을
찾아 보려는 것인데,
오늘은 버스 연계가 어려워 고려산 중턱에 있는 23대 고종의 홍릉을 담았다.
고려 고종(高宗)은 제23대 국왕(재위: 1213년~ 1259년)이다.
(1192년 2월 3일 (음력 1월 18일)~ 1259년 7월 21일 (음력 6월 30일)
강종 1년(1212년)에 태자에 책봉되고, 이듬해 강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재위 기간 동안의 대부분을 최씨 일가의 무단정치로 인하여 실권을 잡지 못하였으며,
1213년부터 1219년까지 최충헌이 실권하였고 1219년부터 1249년까지 최우가 실권하였으며
1249년부터 1257년까지 최항이 실권하였고 고종 45년(1258년) 최의가 살해됨으로써
4대 60년에 걸친 최씨무신정권이 종식되었지만
왕정복고는 이루어 지지 못하고 류경과 김준이 실권을 맡았다.
고려 왕의 무덤이라고 하여
우리가 본 경주 신라고분들과 백제의 고분들과 비교를 하면 적잖이 실망할 것이다.
그러나
강화군 양도면에 있는 21대 희종의 능인 석릉은 고종 홍릉보다 못하다. 찾아가는 길조차도 어렵다.
개경을 버리고 강화로 천도한 혼란기라서일까?
홍능 후면에서 본 전경
저 멀리 흰빛의 띠처럼 보이는 곳은 김포와 강화 사이를 흐르는 염하이다.
1231년부터 30여 년 간에 걸쳐 몽고의 침략이 자주 있어
1232년 강화도로 천도방침이 6월 16일 확정되어 7월 7일 고종이 개경에서 강화도 승천포로 입도하여 첫발을 디딘 곳이며
이후 몽골과 교섭을 할 때는 두 나라 사신들이 드나들던 곳이다.
28년간(1270년) 강화에서 장기항쟁했으나, 백성들은 막대한 인명과 재산의 피해를 가져왔다.
1270년 몽고의 세력을 등에 업은 원종(元宗)과 그 일파의 거사로 최씨 무신정권이 몰락하고,
1270년(원종 11) 5월 23일 개경으로 환도할 것을 논의하면서 막을 내렸다.
1232년 대구 부인사(符仁寺)에 보관되고 있던 현종 때의 대장경판이 소실되고,
1238년(고종 25)에는 경주 황룡사의 9층탑이 불에 타버렸다.
이듬해 몽고에서는 고종의 친조와 성곽 철거를 조건으로 철병하고 실행을 강요하므로 하는 수 없이
영녕공 준을 볼모로 보냈다.
그러나 몽고에서는 친조를 시행치 않은 것을 이유로 자주 침입하므로
1259년에는 부득이 태자 전(倎, 뒤의 원종)을 보내어 조회의 형식을 취하고 강화의 내성과 외성을 헐었다.
이러한 태자의 친조와 성곽의 철거는 몽고에 대한 굴복을 뜻했으며,
1270년 몽고의 세력을 등에 업은 원종(元宗)과 그 일파의 거사로 무인정권은 무너졌으나,
그후로 몽고의 정치적인 간섭을 받게 되었다.
또한 몽골과 화의한 원종(元宗)이 개경환도를 선포하자
최우 집권 당시 설치한 삼별초군(三別抄軍)은 개경환도를 반대하는 반란을 일으키며 강화도에서 원과 투쟁하였다.
이것이 삼별초의 난(1270년)이다.
고려 제24대 임금인 원종(1219~1274년)은 고종의 맏아들로 이름은 왕식(王植)이다.
1235년(고종 22) 태자에 책봉되고, 1259년 강화를 청하기 위해 표(表)를 가지고 몽골에 갔다.
고종이 죽자 1260년 귀국해 즉위했다.
그는 태자를 몽골에 보내는 등 몽골에 성의를 표명해 원활하게 국교를 수립하고자 했다.
배중손(裵仲孫)을 중심으로 삼별초(三別抄)가 항전을 선포하고, 3년간 대몽 항전을 벌인 것도 원종 때의 일이다.
삼별초의 대몽항쟁이 진압된 뒤
1274년 원나라의 매빙사(媒聘使)가 남편이 없는 부녀자 140명을 요구하자 결혼도감(結婚都監)을 설치하고
민간의 독녀(獨女)와 역적의 처, 종의 딸 등을 보내니 백성들의 원성이 높았다고 한다.
원나라의 간섭과 무신정권 사이에 끼어 별다른 업적을 남기지 못한 원종이지만
그가 묻힌 소릉은 송악산과 매봉산 사이에 높은 지대에 만들어져 일반인의 접근이 쉽지 않았던 탓에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강화도- 4기
홍릉(사적224호) 고려 23대 고종(1192∼1259)의 무덤 - 고려산 기슭.
석릉(사적 369호) 고려 21대 희종(1204∼1237)의 무덤 - 진강산 동쪽기슭.
가릉(사적 370호) 고려 24대 원종(1259∼1274)의 왕비 순경태후의 무덤 - 진강산 남쪽기슭.
곤릉(사적 371호) 고려 22대 강종(1211∼1213)의 왕비 원덕태후의 무덤 - 동쪽기슭.
내 블로그 2012년 9월 13일 홍릉- 석릉 - 곤릉 - 가릉을 볼 수 있습니다.
경기 고양- 1기
고릉(사적191호) 고려 34대 공양왕(1389∼1392)과 부인 순비 노씨의 무덤 -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산65-1.
한달 전만해도 단풍 보며 아름답다며 좋아했는데,
푸르던 숲이 그립다.
어쩌면 코로나 19의 영향으로 마음이 삭막해진 이유이리라.
여름같았으면 쳐다보지도 않았을 시들어가는 초록 나뭇잎마저 그리워 진다.
그것이 사람을 포함한 생명 있는 모든 것의 삶이거늘.....
그래서 가수가 그렇게 노랠 했구나
있을 때 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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