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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馬처럼 걷는 서울 여행

(창덕궁) 낙선재와 동궁 그리고 궐내각사

 

 

낙선재(樂善齋)는

임금이 머물던 곳이지만,

궁궐같지 않게 소박하고 검소하며 구석구석 아름다움이 베인 곳이다.

 

낙선재는 1847년에 지어진 본래 이름은 낙선당으로

창경궁에 속했으나 지금은 창덕궁 건물로 조선 24대 헌종이 1847~1848년 사랑하는 경빈을 위해 지은 

낙선재 권역은

보물 제1764호인 낙선재와 동쪽의 석복헌, 그 옆의 수강재 등 총 9개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원래 왕의 연침공간 조성을 목적으로 낙선재가 지어지고

이듬해에 빈의 처소를 위하여 석복헌을 짓고 수강재를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884년 갑신정변 직후 고종의 집무소로 사용하며 이곳에서 지낸 바 있으며,

1917년 창덕궁에 큰 불이 났을 때 순종 황제도 내전 대신 낙선재에 머물렀다.

이곳은 황족들이 마지막을 보낸 곳으로 유명하다. 마지막 황후인 순정효황후가 1966년까지 여기서 기거하다 숨졌으며, 1963년고국으로 돌아온 영친왕과 그의 부인 이방자는 각각 1970과 1989년 이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덕혜옹주 역시 일본에서 1962년 낙선재로 돌아와 여생을 보내다 1989년 사망한

선왕조 최후의 왕손들이 슬프고도 기구한 운명을 마감한 무대이다

 

 

 

- 낙선재 일원 -

낙선재 뒤로 보이는 하얀 건물은 서울대병원

 

 

- 낙선재 장락문 -

 

 

 

 

 

- 낙선재 -

 

 

 

 

 

낙선재는 궁궐의 권위와 위엄을 보여주는 수준높은 다양한 문양의 창호들이 설치되어 있다.

특히 누마루와 그 뒤 온돌방 사이의 만월문은 단연 돋보이는 백미로 누마루 공간의 위계를 읽게 한다.

 

 

- 만월문 -

 

 

 

- 한정당 -

낙선재 석복헌 후원의 정자

 

 

- 석복헌(錫福軒) -

헌종은 경빈 김씨를 위해 창덕궁 내에 낙선재(樂善齋)를 지어 자신과 경빈의 사랑채로 사용했으며,

 석복헌(錫福軒)을 지어 경빈의 처소로 쓰게 하였다.

그러나 경빈과의 사랑도 헌종이 승하하자 600일만에 끝났다. 

 

 

- 수강재(壽康齋) -

정조 9년(1785년)에 지어졌다. 단종이 머물렀던 옛 수강궁(壽康宮) 자리다. 

순조 27년(1827년)부터 대리청정을 했던 효명세자(익종 추존)의 별당이었으며, 

헌종 14년(1848)에 헌종의 할머니이자 효명세자의 어머니였던 순원왕후의 거처로 중수했다. 

고종의 딸이자 조선의 마지막 옹주인 덕혜옹주가 역경의 삶을 삶을 보내다 1962년 귀국해 1989년 77살의 나이로 

숨을 거둘 때까지 거처했고, 장례식도 여기서 치러졌다. 

 

 

 

낙선재 전경

낙선재가 쇠잔해 가는 조선왕조 최후의 무대라는 감회를 느끼게 하는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돌이켜보면 일찍이 황태자였던 영왕 이은 이 1907년 12월 어느날 ,

이 곳 낙선재 뜰에서 놀고 있다가 느닷없이 11세의 어린 몸으로 통감 이토히로부미에게 이끌려

일본으로 납치되어 끝내 볼모 신세가 되었고,

황제에서 이왕으로 격하된 순종 황제가 1926년 4월 25일에 43세를 일기로 대조전 흥복헌에서

한 많은 일생을 마감한 이후,

순정효황후, 세칭 윤 비도 장장 43년이라는 긴세월을 홀로 낙선재에서 그 비운을 달랬다.

 

윤비는 1906년 13세에 동궁(순종)의 계빈이 되어 다음 해에 융희 황제(순종)의 황후가 되었으나.

1910년 한일합방 늑약이 강요되던 흥복헌 어전회의 때 옥새를 치마 속에 움켜 쥐고 통곡하다가

숙부 윤덕영에게 강탈당하는 통분을 격기도 했으며,

6.25동란 때는 공산당에 의하여 낙선재에서 쫓겨나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말년에 이르러 대지월이라는 불교의 법명을 얻어 나라의 비운과 자신의 고독을 달래다가 ,

1966년 2월 3일 낙선재에서 73세로 영욕의 일생을 마감하였다.

 

또한 영왕 이은도 조국이 광복되었지만 곧바로 환국하지 못하다가

1963년 12월 가까스로 귀국길에 올랐을 때는 이미 말을 못하는 기억상실의 상태였다.

그 후 7년간의 병원치료도 헛되이 1970년 5월 1일 낙선재에서 눈을 감았다.

 

11세에 일본으로 납치되어 1920년 4월 28일 일본의 4대 귀족의 하나인

나시모토 미야케의 19세 난 규수(후에 이방자로 개명)와 결혼 했지만 , 8.15종전으로 일본의 황족도 아니고

한국 국적도 갖지 못한 신세가 되어 20년 가까이 도쿄에서 생활하다가 볼모로 끌려간지

무려 57년 만에 식물인간이 되어 환국한 것이었다.

함께 돌아온 여왕비 이방자여사도 그 후 낙선재 생활 27년,

향년 88세를 일기로 1989년 4월 30일에 역시 이 곳에서 운명하였다.

 

이방자여사는 자신의 저서 <비련의 황태자비>에서 영왕과의 결혼 사정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나는 1916년 8월 , 볼모가 되어 일본으로 잡혀와 있던 영왕의 약혼녀로 정해졌다.

나와 이은 전하는 단순한 한일 민족융화라는 목적뿐만 아니라 권력 투쟁의 음모 속에서 희생된 것이다."

이방자 여사는 결혼 다음 해인 1921년 8월 첫아들 진을 안고 첫서울 나들이를 하였는데

사흘째 되던날 갑자기 진이 폐렴으로 세상을 떴다.

 

고종 황제의 고명딸인 덕혜옹주도

정신질환상태에서 독감으로 1989년 4월 21일에 낙선재에서 한 맺힌 생애를 마쳤다.

덕혜옹주는 1912년 복녕당 양씨의 몸에서 태어난 마지막 옹주로서,

1918년 여덟 살의 어린 나이로 시종이던 김황진의 조카와 약혼까지 맺었지만 별 수 없이 일본으로 업혀가고 말았다.

어머니인 양 귀인의 무릎에 싸여 어리광을 부리던 어린아이었지만, 일본인들이 옹주마저 볼모로 데려가려는 낌새가

보이자 부랴부랴 늘상 가까이 있는 시종의 조카와 약혼을 맺어 놓은 것이었다.

 

이와 같은 아버지 고종황제의 근심어린 배려도 헛되이 1919년 고종께서 운명하시자마자

일본인들은 다음해에 10세 난 옹주를 납치하여 우리나라의 지위를 낮춰 버릴 셈으로

일개 대마도도주의 아들과 강제 결혼을 시켰다.

대마도주 아들과의 동거 생활 3년 만에 덕혜옹주는 그 동안의 시련으로 인한 우울증에 실어증까지 겹쳐

끝내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이처럼 낙선재는 조선왕조 최후의 왕손들이 슬프고도 기구한 운명을 마감한 무대였다

 

 

 

- 성정각(동궁) 일원에서 본 인정전 -

 

 

 

- 성정각 -

 

 

 

성정각

성정각은 세자의 공부방이었으며, 그 옆에 직각의 보춘정 날개채가 참 아름답다

 

 

 

남향에는 보춘정, 동향에는 희우루 현판이 붙어있다.

 

 

관물헌(觀物軒)

성정각 뒤편에 있는 관물헌(觀物軒)은

왕이 자주 머물면서 독서를 하거나 접견을 했던 곳으로 현재는 집희(緝熙)라는 현판이 있다.

원래는 스물여섯칸의 큰집이었으며,

갑신정변 때 김옥균 일파가 고종을 옹위하고 청나라와 맞서던 곳이다.

 

 

- 창덕궁 후원에 갈 사람들이 안내자의 설명을 듣고 있다 -

 

 

 

칠분서와 삼삼와 그리고 승화루

성정각과 낙선재 사이에는 왕세자의 거처인 중희당(重熙堂) 즉 동궁이 있었으나,

지금은 청덕궁 후원으로 가는 길과 창경궁으로 가는 길이 있고, 중회당과 복도로 연결되어 세자의 서적을 보관했던

칠분서(七分序)와 삼삼와(三三窩) 그리고 승화루(承華樓)가 남아있다.

 

 

- 승화루 -

 

 

 

 

 

 

- 궐내객사 -

 

 

 

- 규장각 -

 

 

 

억석루에는 역대 국왕이 적은 현판을 보관하는 장소로

한옥이지만 중국풍의 건물형태를 하고 있다.

 

 

 

- 선원전 -

 

선원전에서 본 창덕궁 정전과 양지당

왼쪽 건물은 선원전 오른편에 있는 내찰당이며, 정면 작은 문은 재실인 양지당으로 들어가는 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