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 2020년 11월 12일 목요일
어디 : 서울 종로구 세종로 1번지
이미
곱던 단풍은 낙엽 되어 지나가는 바람에 무심히 떨어져 행인들의 무심한 발걸음에 밟혀
찢기 우고 부서지는 늦은 가을날
코로나 19로 가을 각종 축제들은 취소되고
수그러들어야 할 확진자는 오히려 더 늘어나는 추세라 가능하면 외출을 자제하고 있는데,
학창시절부터 자주 찾던 고궁 가을 풍경이 궁금하여 창덕궁 후원 늦가을 풍경을 보려고
전철을 탔다
특별한 일도 없으니 느긋하게 가는데,
지하철 1호선 서울역에 사고가 발생하여 전철이 가다 서다를 반복하여
신길역에서 지하철 5호선으로 갈아 타 광화문역에 내렸다
지금이야 광화문 거리와 세종로 거리가 개벽을 해 옛 모습은 찾아볼 수 없으나
1960대 전차를 탔던 중고등학생부터 2002년 인천으로 가기까지 내 생활 근거지가 광화문 네거리였기에
옛날을 생각하며 걸으니 약식 수문장 교대식이 열리는 광화문에 도착한다
광화문(光化門)
경복궁의 남쪽에 있는 정문으로, ‘임금의 큰 덕(德)이 온 나라를 비춘다’는 의미이다
근정전으로 가는 3개의 문 중에 첫번째문으로,
1395년(태조 4) 경복궁의 기본구조를 갖춘 다음 1399년(태조 8)에 그 둘레에 궁성을 쌓을 때 세웠다.
조선의 법궁인 경복궁의 정문이었기 때문에
다른 궁궐의 정문에 비해 그 규모와 격식 면에서도 매우 웅장하고 화려했다. 또한 광화문은 담장 끝 동쪽과 서쪽에
각각 동십자각과 서십자각을 두어 조선의 5대 궁궐 가운데 유일하게 궐문형식을 갖추고 있기도 했다.
2층 누각인 광화문 앞의 양쪽에는 한 쌍의 해치 조각상이 자리잡고 있으며,
광화문의 석축부에는 세 개의 홍예문(虹霓門, 아치문)이 있는데,
가운데 문은 임금이 다니던 문이고, 나머지 좌우의 문은 신하들이 다니던 문이었다.
광화문의 가운데 문 천장에는 주작이 그려져 있다.
광화문은 한국 전쟁으로 두 차례 소실되었으며, 월대와 해태 등을 제외한 일부 복원공사가 완료되어
2010년 8월 15일 공개되었다.
요즘
광화문 수문장 교대식은 코로나 19로 간단하게 열리고 있다.
- 화려했던 예전의 광화문 수문장 교대식 -
광화문 수문장의 모습
1395년 정도전이 태조의 명으로 작명한
경복궁 勤政殿(근정전) 앞 제1문 ‘勤政門(근정문)’ 남쪽의 제2문 ‘正門(정문)’은 일반명사 ‘정문’과 구분이 안돼
1426년 세종의 명으로 집현전 수찬이 ‘弘禮門(홍례문)’으로 개명하고,
궁성 남문은 ‘光化門(광화문)’으로 작명했다.
1395년 음력 10월7일자 태조실록
“정도전에게 명하여 새 궁궐과 여러 전각들의 이름을 짓게 하니,
정도전이 이름을 짓고 아울러 이름의 의미를 써서 올렸다. 새 궁궐은 ‘경복궁(景福宮)’이라 하고,
연침(燕寢)은 강녕전(康寧殿), 연침의 남쪽은 사정전(思政殿)이라 했으며,
또 그 남쪽 전각은 근정전(勤政殿)이라 하고,
그 전문(殿門)은 근정문(勤政門), 그 남쪽 문[午門]은 ‘정문(正門)’이라 하였다.”
위 태조실록 기록을 대할 때,
아직 경복궁의 ‘궁성(宮城)’은 축조되지 않은 때였음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사진>에서 보듯, 정도전이 ‘정문’이라 칭한 문은 근정문 바로 앞(남쪽)에 있는
‘홍례문(1426년 세종 때 지어진 이름으로 후에 ‘흥례문(興禮門)’으로 바뀜)’을 말한다.
정도전이 이름 지은 1395년 음력 10월엔 근정전 앞 남쪽에는 2개의 문만 있었다.
그때는 궁성이 미완성 상태라 궁성의 남문인 ‘광화문’은 존재하지 않았다.
궁궐을 먼저 짓고, 궁성은 나중에 쌓았다.
경복궁성은 태조실록 1398년 음력 1월13일자 “궁성을 쌓는 역졸들에게 양식을 주라고 명했다”
기록처럼 1398년부터 본격 축조되었고,
1399년 음력 1월19일 정종 때 새 수도의 궁성과 외성이 모두 신축되었다.
- NEWSIS 2020-11-18 - 모셔온 글 -
흥례문(興禮門)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과 근정전의 정문인 근정문 사이에 있는 중문으로,
원래는 1426년(세종 8년)에 집현전에서 ‘예(禮)를 널리 편다’는 뜻의 홍례문(弘禮門)으로 이름을 지어올렸는데,
1867년( 고종 4년)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청나라 건륭제의 휘 홍력(弘曆)을 피휘하여
지금의 흥례문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현판은 2001년 설치했는데
서예가인 소헌 정도준鄭道準이 쓰고
중요무형문화재 제106호 각자장 기능보유자인 철재 오옥진吳玉鎭이 새겼다.
경복궁 근정문 및 행각(景福宮 勤政門 및 行閣)
보물 제812호
태조 4년(1395) 경복궁이 창건되면서 함께 세워졌으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고종 4년(1867) 경복궁 중건 때 다시 지어졌다.
근정문의 현판은 경복궁을 중건할 때 신석희申錫禧(1808~1873)가 썼다
일화문(日華門)과 월화문(月華門)
문무백관들은 조회가 열릴 때 정문인 근정문을 이용하지 않고 각각 일화문과 월화문을 이용하였다.
근정문 앞에서 주로 옥외에서 실시하던 국왕 주관의 행사가 열렸기 때문이다.
일화문과 월화문은 근정문의 양쪽에 난 작은 문으로
1395(태조 4)년에 처음 지었으며 임진왜란 때 불탔었다. 그러나 1867년 경복궁 중건 후에 재건하였으며,
정전에서 조회할 때 무반은 서쪽의 월화문으로,
문반은 동쪽의 일화문으로 출입했다
'일화日華'는 '해의 정화'를 뜻한다.
'해[日]'는 음양의 이치 상 양陽의 성격을 띠므로, 동쪽문의 이름으로 만들었다.
'월화月華'란 의미는 '달의 정화'를 의미한다.
'달[月]'은 음양의 이치에서 음陰의 성격을 띠므로, 서쪽 문의 이름으로 택했다.
근정전(勤政殿) -국보 제233호
경복궁의 정전正殿으로
신하들의 조하(朝賀)를 받거나 정령(政令)을 반포하는 정전(正殿)으로, 때로는 사신을 맞아들이기도 하고
양로연(養老宴)이나 위로연을 베풀기도 하던 곳이다.
현재의 건물은 1867년 중건된 것으로,
경복궁 창건 당시인 1395년(태조 4)에 지은 건물이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뒤 270여 년 만에 다시 지은 건물이다.
근정전에서 근정문에 이르는 어도(御道) 좌우에는
정1품부터 정9품까지의 품계를 새긴 품계석(品階石)을 배열하였으며 차일(遮日)을 칠 때 사용하였던
차일고리가 앞마당에 남아 있다.
이 품계석은 태조가 근정전을 지을 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고
정조임금 때 위계질서가 문란하여 질서를 바로 세우기 위해 세워진 것란다.
조정의 마당엔 모두 박석으로 깔려있다.
근정전 현판은 경복궁을 중건할 때 이흥민李興敏이 썼다.
이흥민은 철종哲宗(1849~1863) 때에 성균관 대사성까지 지냈고
고종 대에도 도승지 등 높은 관직에 있었던 문신이다.
근정전 답도(踏道)
단으로 설치된 근정전 답도는
디딤돌 사이에 비스듬히 끼워져 있으며 답도 양옆으로는 임금만 다니는 디딤돌 어계를 놓았다.
그리고 그 옆의 소맷돌에는 길게 엎드려있는 형상의 해태를 배치했다.
그 위에는 구름 속에서 노니는 봉황과 각각 모서리 귀퉁이에는 당초문을 넣었다.
답도 전면에도 문양을 넣어 양옆의 어계와 문양이 어울리도록 했다.
봉황이란 한 마리를 뜻하는 것이 아니고 수컷은 봉(鳳), 암컷은 황(凰)이라 하며 한 쌍을 봉황이라 부른다.
그리고 봉황은 용(龍)과 학(鶴)이 사랑을 나누어 태어났다는 상상의 새다.
봉황의 외형적인 특징은 뱀의 목과 제비의 턱과 거북의 등과 물고기의 꼬리 모양을 하고 단혈산에 산다고 하는데,
단혈산은 태양을 마주하는 길운의 상징이라고 한다.
어좌(御座)
임금의 자리인 어좌(御座) 뒤에는 일월오악도(日月五岳圖) 병풍을 놓았고,
위에는 화려한 장식으로 닫집을 꾸몄다. 일월오악도(日月五岳圖)는 일월오봉도(日月五峯圖)라고도 하는데,
왕권을 상징하며 백성들의 태평성대를 염원하는 의도에서 제작된 것이다.
다섯 개의 산봉우리(동악⇨금강산, 서악⇨묘향산, 남악⇨지리산, 북악⇨백두산, 그리고 중악은 북한산을 의미)와
해(임금), 달(왕비), 소나무, 물이 일정한 구도로 배치되어 있다.
천장의 쌍용
천장 중심부에는 장방형 틀을 돌리고
다출목의 작은 포작을 다포식으로 틀어올려 천개를 마련하고 구름무늬 사이에 쌍룡과 여의보주를 조각하였는데,
황제를 상징하는 발톱이 무려 7개나 되는 칠조룡이다.
1395년(태조 4년)에 창건한 근정전은
임진왜란 때 전소되었고, 현재의 건물은 전소 후 약 270년이 지난 1867년 중건되었다.
근정전은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건물 중 가장 큰 목조 건축물이다.
밖에서 볼 때는 2층이나 실내에서 보면 통층 구조로 지어졌다.
그리고 뒷면을 제외한 3면을 2단 월대(月臺)로 만들고, 월대 주위의 돌난간에는 12지상(十二支像)의 석상을 세워
정전 수호의 의미를 담았다.
조선의 법궁인 경복궁 근정전.
사진은 2011년 근정전에서 진행된 고유제 장면으로 동아일보에서 모셔온 사진
'牛馬처럼 걷는 서울 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적 제122호)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창덕궁 (0) | 2020.12.04 |
---|---|
경복궁의 만추 (0) | 2020.12.02 |
(사적 제157호) 고종이 황제에 즉위한 환구단(圜丘壇) (0) | 2020.10.05 |
(국립중앙박물관) 백사 이항복 종가 기증전 (0) | 2020.08.26 |
(국립중앙박물관) 김홍도의 풍속도첩 (0) | 2020.08.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