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 2020년 11월 28일 토요일
어디 : 서울 종로구 율곡로 99
창덕궁은 북악산 왼쪽 봉우리인 응봉 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조선의 궁궐이다.
1405년(태종 5) 경복궁의 이궁으로 동쪽에 지어진 창덕궁은 이웃한 창경궁과 서로 다른 별개의 용도로 사용되었으나
하나의 궁역을 이루고 있어 조선 시대에는 이 두 궁궐을 형제 궁궐이라 하여 ‘동궐’이라 불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모든 궁궐이 소실되어 광해군 때에 재건된 창덕궁은 1867년 흥선대원군에 의해 경복궁이 중건되기 전까지
조선의 법궁(法宮) 역할을 하였다.
또한 조선의 궁궐 중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임금들이 거처했던 궁궐이다.
경복궁의 주요 건물들이 좌우대칭의 일직선상으로 왕의 권위를 상징한다면
창덕궁은 응봉자락의 지형에 따라 건물을 배치하여 한국 궁궐건축의 비정형적 조형미를 대표하고 있다.
더불어 비원으로 잘 알려진 후원은 각 권역마다 정자, 연못, 괴석이 어우러진 왕실의 후원이다.
현재 남아있는 조선의 궁궐 중 그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창덕궁은
자연과의 조화로운 배치와 한국의 정서가 담겨있다는 점에서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
금천교 : 보물 제1759호
금천교는 창덕궁의 돈화문과 진선문(進善門) 사이를 지나가는 명당수(明堂水) 위에 설치되어 있다.
금천(禁川)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흘러내려 돈화문 오른쪽까지 와서 궐 밖으로 빠져나가는데,
이 어구(御溝)물가에는 화강석 6∼7단을 가지런하게 쌓은 축대를 설치하였다.
금천교는 창덕궁이 창건되고 6년 뒤인 태종 11년(1411) 3월 진선문 밖 어구에 설치되었는데,
그 후 숱한 화재와 전란에도 불구하고 창건 당시의 모습을 보존하여
현존하는 궁궐 안 돌다리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인정문 : 보물 제813호
창덕궁 인정문(昌德宮仁政門)은 창덕궁 정전인 인정전에 이르는 출입문으로,
선왕이 승하하면 인정전에서 즉위식을 올리지 않고, 인정문에서 즉위식을 올렸다.
창덕궁 인정전(昌德宮仁政殿) : 국보 제225호
창덕궁의 정전으로
왕이 외국의 사신을 접견하고 신하들로부터 조하를 받는 등, 공식적인 국가행사를 치르던 곳이다.
태종 5년 창덕궁 창건 때 지었으나
임진왜란, 화재 등으로 철종 7년 해체·보수공사를 하여 현재에 이르며,
인정전 앞뜰의 품계석은 정조 6년에 설치된 것이다.
인정전 좌·우로는 동행각 36칸과 서행각 38칸이 딸려 있다.
인정전 용마루에 보면 5개의 꽃 모양이 있는데, 다른 궁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
대한제국 황실 문양인 오얏꽃(조선 왕조의 성씨가 "자두 리")으로 마지막 임금인 순종이
창덕궁에 기거한 이후 장식되었단다.
인정전(仁政殿)은 중층건물이지만
내부는 하나로 터져 고주 위로는 대량을 걸고 고주 밖으로는 퇴량을 걸어 사방에 툇간을 만들었으며,
대량의 위치에 우물천장을 드리웠다.
천장 중앙에는 한 단을 높여 구름 사이로 봉황 두 마리를 채색하여 그려 넣었다.
고주 : 대청마루의 한가운데에 다른 기둥보다 높게 세운 기둥
후면 고주 사이에 용상(龍床)을 설치한 어좌(御座)가 마련되어 있고,
그 뒤에는 <오봉산 일월도 五峰山日月圖>의 병풍을 쳤다. 어좌 위에는 천장에서 달아낸 보개 천장을 두었다.
인정전은 한말에 내부시설 일부를 개조하고 전등을 가설하였다.
내부 바닥은 본래 전(磚)이 깔려 있었던 것을 서양식의 쪽나무로 바꾸고,
창도 내부에 서양식의 들어서 여는 창을 내고 커튼을 드리웠다.
또한, 궁내에 전기를 공급하는 시설을 갖추어 여러 개의 전등을 가설하였으며,
이들 새로운 시설은 황실을 상징하는 노란색으로 장식하였다.
품계석
정조 때 세운 품계석으로,
동쪽에는 문관, 서쪽에는 무관이 정렬했으며, 이를 동반과 서반이라고 하며 동반과 서반을 합쳐
우리가 알고 있는 양반이다.
선정전 ; 보물 제814호
현재 궁궐에 남아있는 유일한 청기와 지붕이며,선정 문까지 긴 복도각이 특징이다.
선정전(宣政殿)은 어진 정치를 베푼다는 뜻으로,
평상시 임금이 고위직 신하와 일상 업무를 논하던 편전으로, 임진왜란과 인조반정때 화재로 소실된 것을
1647년(인조 25)에 재건하였다.
정전 : 인정전과 같이 의식을 위한 공간
편전 : 왕의 일상 업무를 위한 공간
1920년에 재건되면서
건물 입구에 자동차의 진입을 위한 돌출된 지붕이 설치되었다.
희정당(熙政堂) : 보물 제815호
원래 창덕궁의 내전에 속한 건물이었으나 조선 후기에 들어 편전으로 사용.
여러 차례 재건, 소실되면서 규모와 용도가 바뀌었으며, 1920년 경복궁 강녕전을 이건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20년에 재건할 때 한식을 위주로 하면서 양식을 가미하여
양식 탁자를 응접실과 회의실은 바닥마루, 유리창문, 문 상부의 휘장, 벽체 등을 꾸며 놓았다.
현재 응접실 좌우에 김규진(金圭鎭)의 <금강산도>·<해금강도>가 있다.
조선 말기와 한말에 걸친 궁궐 편전의 건축형태를 남기고 있는 점에서 주목된다.
희정당 지붕 옆에는 한문으로 령(寧)을 붙여 장수를 의미하였고,
희정당과 대조전은 복도를 설치하였으며, 희정당 건물 옆 창문은 튀어나오게 설계하여
궁궐에서는 보기 드문 건축방법이며, 창문은 모두 유리창이다.
대조전 : 보물 제816호
대조전(大造殿)은 창덕궁 내전 중 가장 으뜸가는 건물로
동쪽엔 경술국치를 결정했던 비운의 장소인 흥복헌이 있다.
1917년에 불에 탄 것을 경복궁 교태전을 헐어 가져와 1920년 완공했다.
흥복헌
1905년 11월 덕수궁 증명 전에서 강제적으로 체결된 을사늑약(乙巳勒約)으로
이미 조선은 국권을 일본에 빼앗긴 상태에서, 고종은 일제에 의해 퇴위를 강요당하여,
1907년 7월 순종이 황제에 오르고, 즉위하자마자 덕수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겨져, 왕비인 순종효 황후 처소인
대조전에 유폐된 채 억압된 생활을 하게 된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이 즉위한 지 4년째인 융희(隆熙) 4년.
경술년 여름 막바지 더위가 여전히 기승을 부리던 1910년 8월 22일 오후 2시
서울 창덕궁 대조전 흥복헌(興福軒)에서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렸다.
회의 안건은 단 하나, 한·일병 합조 약의 전권을 내 각 총리대신 이완용에게 위임하는 것이다.
순종과 총리대신 이완용, 내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조중응, 탁지부대신 고영희, 법부대신 이재곤, 궁내대신 민병석,
시종원경 윤덕영 등 각료들과 왕족 대표 이재면, 원로 대표인 중추원 의장 김윤식 등이 참석했다.
이완용이 5년 전 1905년 을사늑약 당시의 ‘활약’에 이어 다시 한번 나선다.
합방의 필요성과 불가피성, 그동안 일본과 교섭한 내용 등을 한 시간 가까이 설명했고,
이미 닷새 전 이완용이 손을 써 놓았던 나머지 각료들은 모두 마지못해 “옳다.”라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순종은 이완용의 발언 내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시간은 3시가 조금 넘어갔다.
마침내 순종은 “권신이 모두 가(可)하다면 짐도 이의가 없다. 동양평화를 위해 기쁜 일이다.”며
조약에 관한 전권을 이완용에게 위임하는 것에 동의했다.
이러한 마지막 어전회의를 흥복헌 입구 병풍 뒤에서 숨 죽이고 지켜보던 순종의 왕비 순종효 황후는
이완용에게 넘겨줘야 할 옥새를 치마폭에 감추고 내주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빼앗겨
통곡하는 상황에서 회의는 끝났다.
이완용은 위임장을 들고 지체 없이 농상공부대신 조중응과 함께 마차에 올라타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가 있는 통감관저로 달려갔다. 그리고 자신의 명의로 데라우치와 함께 합방조약을 체결하고 함께 샴페인을 마시며 자축했다.
숱한 외적의 침입과 전란 속에서도 지켜온 나라가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1910년 8월 22일 월요일 오후 5시였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1910년 8월 29일 일본의 강제 병합이 공식적으로 발표되어 조선왕조 519년이 종말을 고하고,
1926년 4월 마지막 황제 순종은 망국의 공간인 흥복헌에서 세상을 하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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