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고찰 전등사 만추(傳燈寺 晩秋)
언제 : 2019년 11월 28일 목요일
어디 :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온수리 버스 정류장에서 약 15분 걸으면
아름드리 소나무 숲을 지나 삼랑성 남문 종해루와 높다란 성벽이 오르막길을 가로막는다.
전등사는
여느 절에서 볼 수 있는 일주문과 천왕문 등이 없고 삼랑성 남문인 종해루가
문지기 역할을 한다.
삼랑성을 쌓은 확실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고려사에는 단군의 세 아들이 성을 쌓아 삼랑성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전등사는 381년에 고구려 아도화상이 창건했으니 특이하게도 성 안에 절을 지은 것이다.
전등사의 문화재
대웅보전(보물 제178호)
약사전(보물 제179호) 범종(보물 제393호) 목조석기여래삼불좌상(보물 제1785호)
목조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 (보물 제1786호) 묘법연화경(법화경)목판 (보물 제1908호)
약사전 현왕탱(인천유형문화재 제43호) 약사전 후불탱(인천유형문화재 제44호)
청동수조(인천유형문화재 제46호)대웅보전 수미단(인천유형문화재 제48호)
대조루(인천문화재자료 제7호) 대웅보전 후불탱(인천문화재자료 제21호)
강설당 아미타불탱(인천문화재자료 제22호)
양헌수 승전비(인천기념물 제36호) 정족산가궐지(인천향토유적 제11호) 선원보각지(향토유적 제1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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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람배치도
1. 대웅보전 2. 약사전 3. 명부전 4. 삼성각 5. 무설전 6. 월송요 7. 대조루 8. 선불장/공양간 9. 적묵당/종무소
10. 강설당 11. 정족사고 12. 취향당 13. 향로전 14. 극락암 15. 종루 16. 남문 17. 양헌수비
18. 동문 19, 화장실 20. 죽림다원 21. 삼랑성 22. 부도전 23. 고려가궐지 24. 전등각 25. 문화해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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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랑성 남문 종해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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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등사 부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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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승과 동자승 나무 이야기
전등사에는 사진 좌측의 두 그루 커다란 은행나무가 있다.
수령이 5백 년이 넘는 나무들이다.
한 나무는 노승나무, 다른 한 나무는 동승나무로 불리는가 하면 암컷, 수컷으로 불리기도 한다.
은행나무는 암컷과 수컷이 서로 마주보고 있어야 열매를 맺는다.
그런데 전등사 은행나무는 꽃은 피어도 열매가 맺지 않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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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등사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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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등사 대웅보전
보물 제178호
대웅보전 지붕 기와 공사 중이라 대웅전 내부는 볼 수 있으나 외부는 사진과 같이 가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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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보전 목조석기여래삼불좌상 - 보물 제1785호
업경대(불상 좌우의 경대) - 인천유형문화재 제4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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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등사 대웅전 안 기둥
고종 3년 병인양요(1866) 때 프랑스군에 대항하여 결사호국의 각오로 전투에 임했던 장병들이
그들의 무운을 부처님께 빌기 위해 대웅보전 기둥과 벽면에 전쟁을 하는 심정과
그들의 영혼을 부처님께 의지하던 간절함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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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인양요 배경
1866년 1월초 대원군은 쇄국양이 정책의 하나로
천주교 금압령을 내리고, 9명의 프랑스 신부와 많은 조선인 천주교도를 처형했다.
이때 탄압을 피하여 탈출했던 3명의 프랑스 신부 가운데 리델이 7월 청나라의 톈진[天津]으로 탈출해
프랑스의 극동 함대 사령관 로즈에게 천주교 탄압 사실을 알렸다.
이 사건은 1846, 1847년 2차례 조선을 침략했다가 실패했던 프랑스에게 좋은 구실이 되었는데,
로즈는 강화해협을 중심으로 서울까지의 뱃길을 탐사할 목적으로 3척의 군함을 이끌고
1866년 8월10~22일에 제1차 원정을 단행했다.
프랑스 군함은 서울의 양화진·서강까지 올라와 수로탐사를 한 뒤 물러갔다.
이에 조선 정부는 황해도와 한강 연안의 포대를 강화하고 의용군을 모집하는 등 프랑스의 침략에 대한
해안 방어대책을 강화했고, 같은 해 9월 15일 로즈는 전함 3척, 포함 4척, 병사 1,000여 명으로
조선을 침략해왔다.
조선 정부는 순무영을 설치하고,
이경하·이용희·양헌수를 각각 대장·중군·천총에 임명하여 강화를 수복했다.
9월 20일 문수산성에서 다시 패한 조선군은 우세한 프랑스군의 화력을 이겨내고 강화도를 수복하는 데에는
기습작전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10월 1일 밤 양헌수가 549명의 군사를 이끌고 강화해협을 몰래 건너
정족산성에 들어가 잠복하여 10월 3일 정족산성을 공격해오는 프랑스군을 물리쳤다.
프랑스군은 전사 6명을 포함하여 60~70명의 사상자가 났으나, 조선군은 전사 1명, 부상자 4명뿐이었다.
조선군의 정족산성 승리는 프랑스군을 물러나게 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프랑스군은 1개월이 넘는 원정에 따른
병사들의 피로, 정족산성의 패배에 따른 사기 저하 등으로 10월 5일 강화도에서 철수했는데,
이때 대량의 서적·무기·금은괴 등을 약탈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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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등사 대웅보전 나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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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등사의 대표적인 건물인 대웅보전은
그 자체만으로도 조선 중기의 건축 양식을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전등사 대웅보전이 세상에 더욱 유명하게 된 것은 대웅보전의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나부상(裸婦像) 때문이다.
대체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신 신성한 법당에 웬 벌거벗은 여인인가 하고 궁금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나부가 아니라 원숭이로 간주하는 경우도 있다.
원숭이는 사자나 용과 마찬가지로
불교를 수호하는 짐승으로 중국, 인도, 동남아시아의 사찰에 모셔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등사 대웅전의 조각상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 나부상이라는 데 의견이 더 많다.
나부상과 관련해서는 유명한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전등사는 1600년 이상의 역사를 간직한 가운데 여러 차례 화재를 겪고 이 때문에 대웅보전도 여러 번 중건되었다.
그 중 지금의 나부상이 만들어진 것은 17세기 말로 추측된다.
당시 나라에서 손꼽히는 도편수가 대웅보전 건축을 지휘하고 있었다.
고향에서 멀리 떠나온 그는 공사 도중 사하촌의 한 주막을 드나들며 그곳 주모와 눈이 맞았다.
사랑에 눈이 먼 도편수는 돈이 생길 때마다 주모에게 모조리 건네주었다.
“어서 불사 끝내시구 살림 차려요.”
“좋소. 우리 그림 같은 집 한 채 짓고 오순도순 살아봅시다.”
도편수는 주모와 함께 살게 될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대웅보전 불사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공사 막바지에 이른 어느 날 그 주막으로 찾아가보니 여인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며칠 전에 야반도주를 했수. 찾을 생각일랑 아예 마시우.”
이웃집 여자가 말했다.
도편수는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다.
여인에 대한 배반감과 분노 때문에 일손이 잡히지 않았고 잠도 오지 않았다.
그래도 도편수는 마음을 다잡고 대웅전 공사를 마무리했다. 공사가 끝나갈 무렵 대웅전의 처마 네 군데에는
벌거벗은 여인이 지붕을 떠받치는 조각이 만들어졌다. 이것이 전등사 대웅보전에 얽힌 전설이다.
이 나부상이 더욱 재미있는 것은 네 가지 조각이 제각각 다른 모습이라는 점이다.
옷을 걸친 것도 있고 왼손이나 오른손으로만 처마를 떠받든 조각도 있으며
두 손 모두 올린 것도 있기 때문이다.
이 전등사 대웅전의 나부상은 희랍의 시지프스 신화를 연상케 한다.
그런가 하면 부처님을 모신 성스러운 전각이지만 그런 조각상을 세운 당시 도편수의 익살과 풍자,
그런 파격을 기꺼이 받아들일 줄 아는 전등사 스님들의 자비로운 마음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과연 그 대웅전을 중건했던 도편수나 스님들은 무슨 뜻으로 나부상을 올려놓았던 것일까?
단순히 사랑을 배신하고 욕심에 눈 먼 여인을 징계하고자 하는 뜻만은 아닐 것이다.
도망간 여인이 잘못을 참회하고 세상을 올바르게 살아가라는 염원도 들어있는 것이다.
또 그런 조각상을 보게 될 후대의 사람들에게 부처님의 자비로운 마음을 본받으라는 뜻도 담겨 있으리라.
그렇기에 전등사 대웅보전의 나부상은 보면 볼수록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전등사 홈페이지에서 모셔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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