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회덕 동춘당(大田 懷德 同春堂 )과 동춘당 종택
언제 : 2019년 9월28일 토요일
어디 : 대전광역시 대덕구 동춘당로 80 (송촌동)
가는 날이 장날이었다.
오전에 우암 송시열 선생 사적공원을 구경하고
동춘당 송준길 선생의 종택이 있는 동춘당 역사공원에 오후 2시 30분에 도착했더니
오후 2시부터
동춘당 역사공원에서 제10회 김호연재 여성문화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이곳 마을 이름이 송촌동인데
은진 송씨의 집성촌이라 송촌동이란 지명을 가졌으며
옛날에는 회덕에서 최고의 건물이었을 터인데,
지금은 동춘당 역사공원을 빙 둘러 고층아파트들이 사방을 막고 있어
어쩌면
동춘당 고택들이 숨이 막힐 듯싶다.
2018년 10월에는 논산 명재 윤증 선생 고택을 방문하였을 때,
우암 송시열이 살던 회덕(대전)과, 명재 윤증이 살던 이성(노성)의 첫 자를 따 "회니시비(懷尼是非)"를
다루면서 왜 대전이라 하지 않고 회덕이라 했는가? 의아했는데 지금 대전이
옛날엔 회덕현이었음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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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춘당 종택 담장
김호연재라는 분은 어떤 분이 누구인지 궁금해 알아보니
동춘당 송준길의 증손부였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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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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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춘당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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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걸린 현판은 송준길 선생이 돌아가신 지 6년째 되는 해인 숙종 4년(1678)에
우암 송시열이 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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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춘당(同春堂)보물 제209호
조선 효종 때 대사헌, 이조판서, 병조판서를 지낸 동춘당(同春堂) 송준길(1606∼1672) 선생의 별당으로,
동춘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一자 모양의 평면으로 된 단층팔작지붕이며,
앞면을 널찍하게 다듬은 돌로 쌓은 단층기단 위에, 다듬은 돌 초석을 놓고, 방주(方柱)를 세워
주두 없이 직접 굴도리를 받친, 민도리집 양식이다.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별당건축물로
규모도 크지 않고 선비의 기질을 잘 나타낸 간소한 건물로, 이곳에서 독서와 교육을 하면서
동춘당의 한시
陽氣發處(양기발처)-양기가 발하는 곳이면
金石亦透(금석역투)-금석도 뚫을수 있으니
精神一到(정신일도)-정신을 한결같이 하면
何事不成(하사불성)-무슨일도 이루지못할까
皓天不復(호천불복)-맑은하늘은 회복되지 않으니
憂無彊也(우무강야)-근심이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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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춘당 고택과 주변을 돌아 보고 다시 동춘당으로 오니 마당에 없었던 밧줄이 있다.
저녁에 이곳에서 줄 타기 공연을 한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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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춘당 마당에서 밤에 줄타기 공연
동춘당 담 밖에는
보기에 범상치 않은 장송 두 그루가 비스듬히 서서 동춘당을 내려다 보고 서 있다.
서로 넘어지지 않게 팔짱을 끼 듯 보호대가 설치되었는데
마치 거대한 장승이 동춘당을 지키는 듯 하다.
송준길(宋浚吉- 1606년 12월 28일 ~ 1672년 12월 2일)
호 - 동춘당(同春堂)
조선시대 후기의 문신·성리학자·정치가로서 유교 주자학의 대가였다.
친척이자 친구인 송준길과 송시열은 한 스승인 김장생, 김집에게서 수학한 동문사이다.
학문적으로 송준길은 송시열과 함께 이이의 충실한 후계자로서
이이-김장생-김집으로 이어지는 기호학파의 주류를 형성했던 정통 성리학자였으며,
1624년(인조 2) 진사가 된 뒤
1649년(인조 25년) 김장생의 아들이자 그의 스승이며 산당(山堂)의 우두머리인 김집이 이조판서로 기용되면서
송시열(宋時烈)과 함께 송준길도 발탁되어 부사직(副司直)이 되었다.
이후 부사직·진선(進善)·장령 등을 거쳐 집의에 올랐고 통정대부로 품계가 올랐다.
송시열과 함께 효종의 북벌계획에 참여하였으나 김자점 등이 효종의 반청정책을 청나라에 밀고함으로써
청나라의 압력으로 송시열과 송준길은 사퇴하고 벼슬에서 물러났다.
1659년 병조판서·지중추원사·우참찬에 임명되어 송시열과 함께 효종의 측근에서 국정을 보필했다.
1670년 세자의 관례식에 참석한 뒤 낙향, 회덕에 은거하다 1672년 병으로 사망하였다.
저서로는 《어록해 語錄解》·《동춘당집》이 있다.
문묘에 종사된 해동 18현 중의 한 사람이다.
해동 18현
조선 최대의 고급 학술기관인 성균관에 가면 '대성전'이라는 건물이 있다.
이 건물에 해동 18현이라 불리웠던 명현들이 배향되어 있는데, 그래서 이 건물을 '문묘'라 칭한다고 한다.
즉, 이 문묘 18현이야말로
조선의 성리학 세계가 꽃피워낸 최고의 정신적 유산으로 모셔진다,
문묘에 배향된 명현 18현으로는
식견과 행실이 같았던 큰 봉우리-김굉필, 효행은 만 가지 덕목의 근원-정여창, 서른일곱 살의 검찰총장-조광조,
통치자가 지켜야 할 열 가지 조목을 만든 이언적, 성지가 된 도산서원-이황,
효제충신을 학문의 기반으로 한 김인후, 실천이 없는 학문은 무용하다-이이, 동방의 성현 우계 선생-성혼,
조선 예학의 법도를 세운 김장생, 도끼를 들고 상소문을 읽는다-조헌, 임금의 허물이 없어야 기강이 선다-김집,
일월은 사사로이 비추지 않는다-송시열, 행동과 언어가 모나지 않은 송준길,
끊임없이 군왕을 교화한 박세채, 심오한 이치는 마음을 닦는 데서 얻는다-최치원,
해동 경학의 터를 닦은 학덕-설총, 문교 진흥의 대업을 남긴 안향,
‘단심가’로 목숨을 바꾼 충절-정몽주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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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춘당 종택
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호
동춘당 선생이 관직에서 물러난 후 살던 곳이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넉넉한 대지 위에 안채와 사랑채, 가묘, 별묘 등이 여유있는 배치를 하고 있다.
동춘당과 함께 건축 당시의 모습이 잘 남아있어
조선시대 상류주택의 건축양식이나 생활상을 살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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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즈막한 산 아래 우거진 숲 끝에 동춘당 종택이 자리했는데,
주변에 고층 아파트들이 둘러싸여 사막화가 되어가는 곳에 곧 사라질 오아시스 같은 느낌도 들고
어쨋든
숨이 막힐 듯 답답함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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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춘당 종택 사랑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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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춘당 종택
일반인 출입금지라서 안채는 들어가 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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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세청풍
사랑채에 걸린 현판으로 백대에 부는 맑은 바람의 뜻
백세는 '오랜세월' 또는 '영원'을 뜻하고, 청풍은 매섭도록 맑고 높은 군자의 절개나 덕을 비유한다.
따라서 백세청풍은 영원토록 변치 않는 선비의 절개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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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씨가묘
송씨가문의 4대조 신위를 모시고 있다
사진 맨 앞이 동춘당이고 뒤에 □형 가옥은 동춘당 종택이며 그 좌측에는 별묘와 가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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