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암 사적공원(尤庵 史蹟公圓)
남간정사(南澗精舍)
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호
언제 : 2019년 9월 28일 토요일
어디 : 대전광역시 동구 충정로 53(가양동)
가을이 완연한데
내 가슴엔 아직도 덥고 습한 여름이 계속되고 있는
9월 마지막 주말,
기차를 타고 대전역에 내려 우암 송시열 사적공원을 방문하였다.
여행을 간다는 것
자체가 나를 기분 좋게 하지만, 기차를 타고 창밖 가을 산천을 바라보며 덜커덩 소리와 함께
푸른 하늘 보며 새로운 경험의 기대와 지난 추억을 만지작거릴 수 있음은
역시 여행은 기차 여행이 적격일 것이다.
우암 송시열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 3,000회 이상 등장한 조선이 배출한 최고의 대학자로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기 위해 효종과 북벌계획을 추진하다 청에 발각되어 사직하기도 했으나,
효종과 더불어 청나라를 정벌할 계획을 추진하다 갑자기 효종이 죽음으로
북벌계획은 역사 속으로 묻히고 말았다.
만일
효종이 죽지 않았다면 청나라를 정말 정벌할 수 있었을까?
청나라를 정벌할 수 있었다면 조선의 역사는 그리고 현재 대한민국은 어떻게 변해있을까?
그러나
송시열은 성격이 솔직하고 과격하여 꾸밈이 없었고, 한번 옳다 확신하면 바꾸지 않았으므로
이 때문에 정치적으로나 학문적으로 적을 많이 두었다.
제주도 유배 중 정적인 남인들과 숙종에 의해 제주도를 떠나 지금의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83세 노구로 세상을 떠난다.
▲
우암 사적공원(尤庵 史蹟公圓)
▲
안내도
▼
▲
▼
남간정사(南澗精舍)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 1607~1689)선생이 일흔일곱의 나이에 벼슬에서 물러나
대전 동구 소제동에 살면서 흥농촌의 능인암 아래에 지은 별당이다.
우암의 사후 유림들이 목판을 새겨 송자대전(宋子大全)을 펴냈던 곳으로,
남간(南澗)이란 양지 바른 곳에 졸졸 흐르는 개울을 의미하는데, 주자의 시 "운곡남간(雲谷南澗)"에서
따온 이름으로 주자를 사모한다는 뜻을 가졌다.
朱子의 ‘雲谷南澗' 詩
危石下崢嶸。高林上蒼翠。中有橫飛泉。崩奔雜綺麗
위태로운 돌 가파르고 험하게 아래로 향하고
높은 산의 숲 푸르고 푸르게 위로 솟았구나
가운데 가로질러 나는 듯 흐르는 샘이 있으니
무너지듯 섞이는 모습이 기이하게 아름다워라
정사(精舍)
석가세존이 성도하고 난 뒤에 인도 중부 마갈타 국의 가란타 마을에 세워진 죽림정사(竹林精舍)가 효시이다.
그 후 유교나 도교를 숭상하는 이들이 그 업(業)을 이루기 위하여 산천경개가 뛰어난 곳에
질박하게 정사를 짓고 학문을 도야하게 되었다.
조선시대의 정사라고 하는 것은
성균관, 향교, 서원과 함께 일종의 학교로서 개인이 건립한 사숙(私塾)에 속한다.
그러나 간혹 별채에 '정사'라는 편액을 붙이는 경우도 있다.
▲
남간정사
▼
▲
‘南澗精舍’ 현판
尤庵선생이 谷雲 金壽增(곡운 김수증 1627~1701)에게 부탁해서
1687년(崇禎紀元後丁卯五月日)에 썼다는 陰刻이 현판 뒤에 새겨져 있다.
▼
▲
남간정사(南澗精舍)
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호
앞면 4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으로,
송시열이 말년에 강학을 위하여 지은 별당건물이다
2칸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왼편은 앞뒤 통칸의 온돌방을 들였고,
오른편 뒷쪽 1칸은 방으로 하고 앞쪽 1칸은 마루보다 높은 누를 만들어 아래에 아궁이를 설치하였다.
계곡의 샘에서 내려오는 물이 대청 밑을 통하여 남간정사 앞 연못으로 흘러가도록 하였는데,
이는 우리나라 조경사에서도 드문 매우 중요하고 독특한 양식이다.
남간정사 앞에는 원형의 넓은 연못이 있어 운치를 더하고 있으며,
남간정사 오른쪽에는 일제시대에 소제동에서 옮겨 지은 기국정이,
뒷편 언덕에는 후대에 지은 사당인 남간사가 있다.
作者 : 石村 李斗熙
華陽夫子卓賢豪, 四百年來聲價高.
溪山秀氣宛如畵, 風日純和不覺勞.
綠樹雲間聞鳥語, 淸泉谷口送松濤.
後學從尋瞻仰地, 整襟危坐醯香醪.
*해설 : 남간정사에서 봄을 보냄
화양동 부자는 탁월하고 훌륭한 분인데
지난 사백 년간 그 명예는 높기만 했네
산수의 뛰어난 기상 그림처럼 아름답고
바람 알맞게 부는날씨 수고로움 잊겠네
푸른 나무 숲 구름 새로 새소리 들리고
맑은샘 내리는 골짜기 소나무 물결치네
후학이 이곳 찾아서 우러러 바라다보며
옷깃여미고 꿇어앉아 향긋한 술 따르네
▲
남간정사 뒤에 있는 샘
▲
남간정사 앞 연못으로 흘러드는 개울 옆에는 엄청나게 큰 나무가
남간정사의 풍치를 더욱 빛나게 한다.
▼
作者 : 霞山 李鍾福
亂落百花遠近皐 韶光駋蕩入詩騷
黃鸝織柳傳聲嬌 細雨成流發興豪
後學靑衿誠未達 斯文大老德彌高
鷄龍淑氣今猶在 南澗賞遊解鬱陶
멀고 가까운 언덕에 꽃들 어지러이지니
봄빛이 곳곳이 흐드러져서 시심에 드네
꾀꼬리 버들누비며 고운 소리 전해오고
가는 비 물을 불려 호탕한 흥취 돋우네
후학인 우리들 정성은 아직 모자라지만
우리유학 대로님의 덕성은 더욱더 높네
계룡산 기운들 아직도 그대로 남았으니
남간정사에 천천히 놀며 답답함을 푸네
▲
골짜기 물이 연못으로 흘러든다.
▲
남간정사 앞 연못
▲
송시열이 심은 배롱나무
송부자 -정조가 우암을 송자 혹은 송부자로 칭송한 대명사
▼
作者 : 直齋 金鑝坤
溪邊楊柳駐歸旄 風動蓮潭靜起濤
回顧尤翁遺蹟在 後生到此仰淸高
시냇가 버들은 돌아가는 길 멈추게하고
연못에 바람불어 물결 조용히 일으키네
우암선생 돌이켜 보니 남은자취들 남아
후생들 여기와서 청고한 풍모 우러르네
▲
옛 남간사(南澗祠)
송시열 - 송상민 - 제자 권상하를 모신 옛 사당
▲
기국정
▼
▲
▼
▲
▼
우암 송시열은
1607년 12월 30일(선조 40년 음력 11월 12일)에 지금의 충청북도 옥천군 구룡리(九龍里)의 외갓집에서
사옹원 주부를 지낸 은진 송씨 송갑조와 곽자방의 딸 선산 곽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1633년(인조 10) 경릉참봉으로 출사하여
대군사부, 진선, 장령, 찬선, 세자사부, 이조판서, 의정부좌의정, 우의정, 영중추부사 겸 영경연사사,
행판중추부사, 영중추부사 겸 영경연사에 이르렀다.
조선왕조실록에 3,000회 이상 등장한 조선이 배출한 조선 최고의 대학자로
윤선도와 함께
효종, 현종 두 국왕의 왕자 시절 가르친 스승이었으며, 별칭은 대로(大老), 송자(宋子), 송부자(宋夫子)이다.
당색으로는 서인, 분당 후에는 노론의 영수이다.
임진왜란, 병자호란으로 피폐해진 조선이 이를 극복하고 조선 고유의 찬란한 문화를 꽃피운 진경시대를 여는데
이론적 배경과 방향타를 제시한 주자학의 대가다.
조선의 정치사상계를 통일하여
지배원리를 제공한 조선의 가장 영향력 있는 대표적 인물로 평가받으나
사대주의 색채가 강하고 주자학을 멋대로 해석하여 비난을 받고
결국
숙종과 갈등 그리고 남인파에 의해 제주도에서 한양으로 국문 받기 위해 상경하던 6월 3일
정읍에서 만난 금부도사가 건넨 사약을 받고 최후를 맞이한다.
기사년(1689, 숙종15) 6월 3일
도성에 3배를 올린 뒤 사약을 받고 최후를 맞이한다.
당시 그의 나이 83세였다.
송시열은 여든세살이라는 아주 많은 나이에 사약을 마시고 세상을 떠났다는 점이 아주 특이하다.
조선시대에 대신은 역적이 아니면 사형당한 전례가 없었는데
송시열은 역적이 아니라 죄인들의 수괴라는 애매한 죄명으로 사형을 당했고
그것도 국문을 당하기 위해서 제주도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도중에 정읍에서 서둘러 사약을 마신 점이
상당히 특이한 죽음이다.
한국의 유학자 가운데 도통을 이은 성인을 의미하는 자(子) 칭호를 받은 유일한 인물로
그를 평소 존경하던 정조(正祖)에 의해 성인(聖人)으로 추숭되어 송자, 송부자(宋夫子)로 격상되고,
국가의 스승으로 추대되었다.
'牛馬처럼 걷는 충남 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전) 우암 사적공원(尤庵 史蹟公圓) - 남간사(南澗祠) (0) | 2019.10.07 |
---|---|
(대전) 우암 사적공원(尤庵 史蹟公圓) - 유물관과 장판각 (0) | 2019.10.02 |
(논산) 천 년 고찰 개태사(開泰寺) (0) | 2018.11.30 |
(논산) 만추의 노성 궐리사와 노성 향교 (0) | 2018.11.15 |
(논산) 논산 명재 고택(論山 明齋 故宅)의 가을 (0) | 2018.11.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