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년 고찰 개태사(開泰寺)
언제 : 2018년 10월 22일 월요일
어디 :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천호리
어렸을 적부터 개태사역은 수없이 지나친 곳이다.
서울 유학 중
방학 때 시골 내려가는 길에 지나치는 곳인데, 역 이름이 특이하게도 개태사였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관심을 갖게 되었지만, 지금까지 그 많은 날 무엇을 하다가
내 나이 67세가 기운 가을 깊어가는 날
개태사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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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태사 가는 중 기차에서 담은 가을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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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태사
어려서 부터 오늘까지 궁금했던 개태사가 누렇게 익은 벼 가운데 있어 가슴이 두근거린다.
나름
이름 값을 할 모양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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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호산 개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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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루(神鐘樓)
개태사는 일주문이 없고
신종루 아래 4천왕 그림이 그려져 있는 사천왕을 통과하여 돌계단을 오르면 개태사 경내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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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를 타고 오는 도로에서 본 개태사는
내 바램과 같이 초라하지 않게 보였는데, 경내에 서니 달랐다.
신종루를 통과하여 돌계단을 올라서니 5층 석탑이 중앙에 자리하고
뒤로 곧 개축해야 할 듯한 건물 정법궁과 팔각 지붕 건물 사이에 보통 절에서 볼 수 없던 태극기가 보인다.
그리고
왼쪽엔 극락대보전과 어진전이 있으며, 오른쪽엔 요사채가 절에 비해
어울리지 않고 거대하게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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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국화도
화려하지 않고 조촐하게 꽃망울을 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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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법궁과 창운각
정법궁과 창운각(1947년에 건립)에는 단군영정과 석가여래좌상이 모셔져 있다.
正法宮(정법궁)'이란 편액이 걸려 있고
기둥에는 "南北統一世界平和祈願大道場(남북통일세계평화기원대도장)"이로 쓰인 주련이 걸려 있다.
유구한 오천 년 민족사 중 단 두 번 있었던 통일의 역사 현장이
개태사가 중심이 되는 황산벌 일대인 것으로 보아 제3의 통일 성지로 개태사가 적지라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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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건은 통일의 대업을 이루자,
부처님의 은혜와 하늘의 도움이라 여겨 황산을 천호산으로 개명하고 개태사를 창건하였다.
그 뒤 이 절에는 왕건의 옷 한 벌과 옥대가 보관되었다고 하며, 국가 대사가 있을 때마다
어진에 나가 길흉을 점치기도 하였단다..
실제 공민왕은 강화도로 천도하려는 마음으로 개태사에 사람을 보내 그 가부를 점치기도 하였다.
그 후 우왕 2년부터 14년까지 3차례에 걸친 왜구의 침입으로 방화 약탈되고,
원수(元帥) 박인계(朴仁桂)가 이곳 전투에서 패함으로써 개태사는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이 빛을 잃은 개태사는 이후 조선시대엔 폐사된 채 내려오다가
1934년 불자에 의해 재건되었고
매몰되었던 미륵삼존석불과 5층탑을 세우고 일시 개태도광사(開泰道光寺)라 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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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지상정천궁(三一地上正天宮)
육각전각으로, 1946년에 건립한 용화전으로 미륵불을 봉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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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태사 철확
우리나라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고려시대 대형 철제 솥으로,
당시 개태사의 사세를 추정할 수 있으며, 법주사 철확과도 비교되고 있다.
1973년 12월 24일 충청남도 민속자료 제1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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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대보전(極樂大寶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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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여래삼존입상
보물 제219호
본존상의 높이 415㎝, 우협시보살상 346㎝, 좌협시보살상 349㎝.
개태사는 936년(태조 19) 태조가 후삼국통일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절이므로
이 삼존불상은 개태사 창건 당시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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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협시보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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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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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협시보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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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호산과 개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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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사채
어떤 이유가 있어 요사채를 크게 세웠을 것이나,
개태사를 둘러보면 극락대보전과 신종루를 제외하면
정법궁 - 삼일지상천궁 - 철확각 - 어진정 모두 4개 법전은 다른 절에 비해 초라하기 그지 없는데
어울리지 않게 크고 화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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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진전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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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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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태사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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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지에 반영되는 신종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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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태사(開泰寺)를 나서며
문득 생각한 곳이 강화도에 있는 고려 왕릉들이다.
남한에 고려 유적이 별로 없지만, 강화도에는 고려 왕릉이 4개나 있다.
고려 21대 희종(熙宗)의 석릉(碩陵) - 고려 22대 강종의 부인 원덕태후 유씨의 무덤인 곤릉(坤陵) -
고려 23대 고종의 홍릉(洪陵) - 고려 원종의 왕비 순경태후의 무덤인 가릉(嘉陵)이다.
그들의 무덤은 평범한 일반인 무덤과 다를 바 없어
조선의 왕릉에 비할 수 없다.
어쩌면
개태사도 그와 같을 수 있다.
조선 시대에는 숭유억불정책으로 잘 나가던 절도 폐사 시키던 때인데, 왜구에 의해 불 타
흔적도 남지 않은 절을 돌 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조금씩 불사를 하며 언제가 올 그날을 기다리는 것 같다.
신라가 삼국 통일을 할 때 황산벌 전투에서 승리한 후였고, 고려가 통일을 할 때도 이곳 황산벌에서
신검이 항복하여 통일을 이루었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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