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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馬처럼 걷는 충남 여행

(논산) 논산 명재 고택(論山 明齋 故宅)의 가을

 

논산 명재 고택(論山 明齋 宅)의 가을

국가민속문화재 제190호

 

 

 

 

언제 :  2018년 10월 22일 월요일

어디 : 충청남도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

 

 

06:45

집을 나서

08:01

여수엑스포행 ITX를 타고 논산에 도착하여 노성면 명재 고택 가는 버스를 타고 끝없는 황금 들판을 달려

노성면 교촌리 내렸다.

 

11:15

정류장에서 약 10분 걸으니

노성 향교와 명재 고택이 보이는데, 한눈에 봐도 예삿터가 아니다.

 

마을 뒤로 해발 384m 노성산 두툼하게 마을을 감싸고 앞으로는 논산지역 특유의 구릉지대가 펼쳐지며

논에는 누렇게 익은 벼가 추수를 기다리고 논 둑에는 노란 들국화

 향기가 좋다.

 

아쉬운 것은 문화재 등은 월요일 휴관이라는 것이다.

명재 고택은 국가 민속문화재라 해설자가 상주하는데, 월요일은 쉬는 날이라 자리에 없고,

명재 고택도 집안 수리와 청소를 한단다.

 

 

좌측 도로가 명재 고택 오는 길 

 

 

명재 고택 앞 논두렁에서 담은 들국화

 

 

노성 향교와 명재 고택

 

 

 

△ 

윤증(尹拯, 1629년 ~ 1714년 1월 30일)은 조선 후기의 학자, 정치인, 사상가이다.

본관은 파평. 자(字)는 자인(子仁), 호는 명재(明齋)·유봉(酉峰),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윤선거(尹宣擧)의 아들로, 당색은 서인, 소론의 영수이다.


유계(兪棨), 김집(金集)의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권시의 문하에서도 수학했으며,

김집의 추천으로 김집 사후 우암 송시열의 문인이 되었다.

 

그러나

아버지 윤선거의 묘비문 문제로 발생한 '회니시비(懷尼是非)' 김익훈, 김석주의 역모 날조에 염증을 느껴

후일 노론이 된 주류파와 갈등하였으며,

아버지 윤선거의 비문 문제를 계기로 송시열과 절교한 후 소론의 영수가 되었다.

 

현종과 숙종은

윤증을 내시교관, 공조랑, 지평, 호조 참의, 대사헌, 이조 판서, 우참찬, 좌찬성, 우의정, 판돈녕부사 등

여러 번 관직에 제수했지만 그는 한 번도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최고 관직인 정승 자리마저 사양하니

윤증은 ‘백의정승(白衣政丞)’, 즉 관복을 입지 않은 정승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윤증이 살았던 17세기 조선은 정치 이념을 바탕으로 하는 정쟁이 어느 때보다 격렬했던 시기였다.

이른바 4색 당파라 해서 동인이 북인과 남인으로 갈라지고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졌던 시기였다.

이때 송시열이라는 정치 사상계의 거물과 맞서며 진보적인 소장파를 이끈 이가 바로 윤증이다.



회니시비(懷尼是非)

송시열이 살던 회덕(대전)과, 윤증이 살던 이성(노성)의 첫 자를 따 회니시비라 한다.

 

윤증의 아버지 윤선거(尹宣擧)와 송시열은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친구였다.

 

역시 친구 사이였던 송시열과 윤휴(尹鑴)가

현종 대에 예송(禮訟)으로 불화를 빚자 윤선거는 그들을 화해시키려 하다가 송시열의 불만을 샀다.

 

사제 관계였던 송시열(宋時烈)과 윤증(尹拯)의 불화는

 윤증의 아버지 윤선거(尹宣擧)의 묘갈명을 송시열이 정성을 들이지 않고 감정적으로 작성한 사건에서

비롯된 분쟁으로,

서인이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으로 갈라지게 한 사건이다. 

 

이후로 노론과 소론은

경종·영조·정조대로 이어지며 격렬히 대립했으나,

18세기 중반 이후에는 노론이 승리하면서 노론 일당의 전제정치체제로 굳어졌다

 

 



윤증 선생은 고택을 지어 몇 번인가 오가기는 했어도

고택에서 4km 떨어진 유봉에 있는 작은 초려에서 살다 그 곳에서 돌아가셔서

명재 고택의 “고”자를 옛“古”가 아닌 연고“故”자로 쓴다.

 

 

명재 고택 전경

 

 

 

 

 

 

 

 

 사랑채가 어떤 가림과 경계도 없다.

가림과 경계가 없다는 것은 아무나 오고 보라는 것이다.

 

그 옛날 

이름난 양반집에 솟을 대문과  담이 없이

남자들의 지극히 사유공간인 사랑채가 개방되어 있는 것은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을 법한데,

 휴관일이라 해설자가 없어 아쉽다.

 

사랑채 뒤로 안채인데,

정중하게 살림집이니 출입을 삼가해달라는 팻말이 있어 들어가지 않고 나온다.

 

오늘은 휴관일로

명재 고택과 장독 등을 청소하고 수리 중인데, 먼 길을 왔기에 피해가 되지 않도록 조심히 

사진을 담았다.

 

 

사랑채

문짝들을 햇볕에 말리고 마루 등은 수선을 하고 있다.

 

 

사랑채 마루

 

 

이은시사

'세상을 살면서 떠날 때와 머무를 때를 아는 사람이 사는 집'

 


도원인가

'무릉도원에 사는 사람의 집'

 

 

청소와 수리를 하는 사랑채

창문들을 햇볕에 말리고 수리를 하여 어수선하던 차

사랑재 앞 계단 좌측에 조그만 돌 무리가 있고 그 옆에 일영표준이란 석판이 있어 어울리지 않아 지나쳤는데,

그곳이 금강산과 해시계였다네.

 

 

사랑채 마당에서 본 장독대

 

 

측면에서 본 사랑채

 

 

안채

사랑채 뜰 한쪽엔 모과나무와 대추나무에 열매가 주렁주렁 열렸다.

 

 

 

 

명재 고택에 대문과 담장이 없는 이유

 

“우리 집에는 대문과 담장이 없어요.

 원래는 둘 다 있었지만 나중에 다 허물었어요. 그런데 그 이유가 재미있어요.

집이 지어지던 당시 조선은 우암 송시열尤菴 宋時烈을 중심으로 한 노론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윤증 선생께서는 그런 노론에 대해 정치적으로나 학문적으로 계속 문제점을 제기하셨죠.

오직 학문은 주자학뿐이며, 사람이 살아가는데 대의명분이 가장 중요하다라는 노론의 고루한 예학으로는

 현실 정치를 이끌어 나갈 수 없다라고 주장한 것인데,

윤증 선생이 계속 반대 의견을 내니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던 노론입장에서는 얼마나 눈엣 가시 같았겠어요.


그래서 윤증 선생을 감시하기 위해

 향교를 지금과 같이 우리 집 좌측으로 옮기고 더 높이 지어서 어떤 사람들이 집을 찾아오는지 염탐하려 했답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까 윤증 선생께서 대문과 담장을 모두 허물어 버리라고 명 하셨대요.

우리는 가릴 것이 아무것도 없고 떳떳하고, 당당하다는 것을 만천하에 보이셨던 거지요.”

 

윤증 선생 고택에 대문과 담장이 없는 이유를 설명을 해 주시던 윤완식 씨는 명재 윤증 선생의 13대손이다.

그냥 스쳐 지나가면 모두 다 똑 같은 한옥이고 고택이지만

고택은 수백 년간 종손의 종손으로 이어지면서 그 역사와 생명을 이어 내려오고 있다.

그래서 고택은 겉으로 보면 다 똑같아 보이지만 종가의 역사와 가풍에 따라 그 모습이 조금씩 다르고

그 가문의 흥망성쇠와 삶의 철학이 담겨져 있다.


조선 중기 권력을 장악한 송시열과 노론에 맞서

대문과 담장을 단번에 허물 정도로 그 정치적 신념이 강했던 명재 윤증.

그 분의 고고한 정신이 담겨 있는 고택이다.

 (모셔온 글)

 

※ 명재 고택 바로 옆에 향교가 노성 지역에 비해 크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런 이유가 있었네.

 


연지



명재 고택을 벗어나 장독대를 담으려고 오른쪽 언덕 위 느티나무 방향으로 가는 길에

 초가(초연당)가 자리하고 있다.

초연당(超然堂)

작은 도서관으로 다양한 행사와 함께 전통문화 체험과 국악배우기 프로그램이나 다례, 천연염색 등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단다.

 

 

 △

초연당을 지나 왼쪽에 명재 고택을 두고 언덕길 풍경 

 

 

명제 고택 장독대

 

500년 세월의 아름드리 느티나무 등 굽은 가지 아래 600여개 장독대가 줄 맞춰서 있다.

300년을 이어온 씨간장은

저 장독들 속에서 긴세월 숨 쉬며 지금은 교동 간장으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네.

 

 

언덕 위 느티나무 아래에서 기분 좋게 장독대 사진을 찍는데,

느닷없이

아래 사진 어떤 여자분이 사진 찍지 말라며 장독대 앞에 서서 손짓하며 사진을 지우란다.

(나중에 그러한 이유를 고택측에서 보내와 이해하였음)

  

단풍 든 느티나무 아래 앉아

 깊어가는 가을을 느끼는 여유를 갖고 점심을 들려고 했는데.....

 

그래서

좋은 위치에서 사진을 담지 못한 것이 지금 생각해도 아쉬움이 크다. 

 ▽

명재 고택 장독대

 

 

윤증이 벼슬에 나가지 않은 이유

 

윤증의 부친 윤선거1636년 병자호란 때 강화를 수비하며 강화가 함락되면 자살을 하기로 한 

이듬해 강화가 함락되자

강화를 지키던 동료들과 그의 아내는 자살했으나 윤선거는 성을 탈출하여 목숨을 건졌다.

 윤증의 나이 여덟살이었다.

 

윤선거는 1651년 이래 여러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강화도에서 홀로 살아나온 데 대한 자책으로 관직을 맡지 않았다.

윤증은 아버지가 강화도에서 어머니마더 자결을 한 죽음의 맹세를 저버린 행적에 부채의식을 갖고

평생을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을 이유가 되겠다는 생각이다.


현재

명재 고택 앞 한곳에는 윤증 어머니의 정려각이 세워져 있다.

 

 

명재 고택 사당

명재 고택 가장 후면에 위치한 사당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느티나무 언덕에서 장독대 사진을 찍는데, 어떤 여자가 장독대 앞에 서서 사진을 찍지 말라며

찍은 사진은 모두 지우란다.


행여

찍었던 사진 모두를 지우는 것을 확인할까 더 찍지 않고 궐리사로 이동했다.  


쉬는 날은

사진을 찍지 못하는건가 그래서 관람자도 거의 없었던 건가?


그러나

사진을 왜 지우라고 하는지 떳떳하게 물어나 볼걸, 찍었던 사진도 지워버릴까 봐

궐리사로 가 버린 내가 나이 헛 먹었다. 

 

 명재 고택과 나와의 인연이 이렇게 되는 거라면 어쩔 수 없어서인지

결국

명재 고택을 보고 떠나며 느낀 소감도 적을 공간이 없다.


(명재 고택에서 사진을 지우라는 이유에 대해 설명을 보내 충분히 이해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