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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馬처럼 걷는 부산+경남 여행

(산청) 사적 제214호 : 산청 전 구형왕릉(山淸 傳 仇衡王陵)과 덕양전(德讓殿)

 

사적 제214호

산청 전 구형왕릉(山淸 傳 仇衡王陵)과 덕양전(德讓殿)

 

 

 


언제 : 2019년 6월 2일 일요일

어디 : 경상남도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산청 전 구형왕릉(山淸 傳 仇衡王陵)


가야 10대 임금인 구형왕의 무덤으로 전해지고 있는 돌무덤으로,

구형왕은 구해(仇亥) 또는 양왕(讓王)이라 하는데 김유신의 증조부이며, 우리나라 유일의 석능으로 

사적 제214호로 지정 되었다.


구형왕은 

521년 가야의 왕이 되어 532년 신라 법흥왕에게 영토를 넘겨줄 때까지 11년간 왕으로 있었다.

이 무덤을 둘러싸고 종래에는 석탑이라는 설과 왕릉이라는 2가지 설이 있었다.

 

이것을 탑으로 보는 이유는 이와 비슷한 것이 안동과 의성지방에 분포하고 있는데 근거를 두고있다.

왕릉이라는 근거는 『동국여지승람』, 『산음현 산천조』에

'현의 40리 산중에 돌로 쌓은 구룡이 있는데 4면에 모두 층급이 있고 세속에는 왕릉이라 전한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 무덤에 왕명을 붙인 기록은

조선시대 문인인 홍의영의 『왕산심릉기』에 처음 보이는데 무덤의 서쪽에 왕산사라는 절이 있어

절에 전해오는 『왕산사기』에 구형왕릉이라 기록되었다고 하였다.

일반무덤과는 달리 경사진 언덕의 중간에 총높이 7.15m의 기단식 석단을 이루고 있다.

앞에서 보면 7단이고

 뒷면은 비탈진 경사를 그대로 이용하여 만들었기 때문에 평지의 피라미드식 층단을 만든 것과는 차이가 있다.

 무덤의 정상은 타원형을 이루고 있다.

 

돌무덤의 중앙에는 ‘가락국양왕릉’이라고 쓰인 비석이 있고 그 앞에 석물들이 있는데

이것은 최근에 세운 시설물이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대부분 입으로 전해져 내려올뿐 기록이 없어 사실로 증명할 없는 안타까움이 있다.

구형왕릉이 사적(史蹟) 제214호로까지 지정되어 있지만

행정관청에서 발행하는 안내책자에

구형왕릉이라고 전해져 온다는 말인 「傳 仇衡王陵」으로 표기할 정도다.


구형왕릉의 산 아래에는 

조선 정조 17년(1793)에는 왕산사에서 전해오던 나무상자에서 발견된

구형왕과 왕비의 초상화, 옷, 활 등을 보존하기 위해 '덕양전'이라는 전각을 짓고,

오늘날까지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 

 

 

 

 

 

 

 

 

  

산청의 왕산

산청 방장산(지리산)중 왕산은 장대한 지리산맥의 동북쪽 끝으로 가락국 시조 대왕 김수로의 태왕궁지이다

서기 162년 김수로 대왕은 첫째 왕자인 게동에게 나라를 양위하고 가락지품천 방장산 자리에 별궁을 짓고

태후와 함께 이거하여 왕의 호를 '보주황태왕' 왕후를 '보주황태후'로 궁은 태왕궁으로,

산은 태왕산으로 명명하셨다


대왕께서는 태왕원군으로 38년간 계시다가 기묘년 3월23일에 서거하셨다

330 여년이 흐른 후 서기 532년 가락국 마지막 10대 양왕(구형왕)께서 시조대왕의 태왕산으로 들어오셨다

가락지품천 태왕산은

구형왕께서 이거한 당시에도 수정같이 맑은 물이 샘솟있어 궁궐의 이름을 '수정' 이라 편액하고

수년간 은거 하다가 붕어하시니 존호를 '양' 이라하였다

 

 

 

 

 

 

 

 

 

 

 

 

 

 

 

 

 

 

 

 가락국의 왕실

1대 : 김수로왕 - 2대 : 도왕 - 3대 : 성왕 - 4대 : 덕왕 - 5대 : 명왕

- 6대 : 신왕 - 7대 : 혜왕 - 8대 : 장왕 - 9대 : 숙왕 - 10대 : 양왕

 

 

 

 

 

 

 

 

 

 

 

 

 

 

 

김유신 장군의 비

 

  

가락국시조 김수로왕 태왕궁지비

 

 

구형왕릉 가는 길 초입에 있는 덕양전 

 

 

 

 

 

 

덕양전 인덕문 


 


 

 

 

 

가락국기념관

문이 닫혀 있고 관계자도 사람이 드나드느데 나와 보지도 않네

 

 

 

 

 

 

 

 

 


 

 

 

 

 

덕양전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0호

 덕양전은 홍살문과 함께 직사각형의 돌담을 두르고 

그 안에 영전각, 안향각, 추모재, 동재, 서재, 해산루 등 건물이 들어서 있다.

  


덕양전 안에서 본 입구

 

 

덕양전 전경 

 

  

해산루 - 연신문 - 덕양전

 

 

연신문 - 덕양전

 

  

 

 

 

 

 


 

 기원(紀元)을 전후로 

낙동강 유역에 사람들이 집단을 이뤄 살았던 변진 지역에 가야의 여러 나라가 있었다.

그중 AD 42년에 김해 지역에서 건국된 나라가 가락국이다.​ 

 

<삼국유사>의 가락국기에 의하면

가락국을 세운 사람은 김수로왕이었으며, 그 왕비는 아유타국에서 온 허왕후다.

가락국은 6가야의 맹주로서 주변의 다른 가야들 중 주도적인 위치에 있었다.

하지만 6세기경 신라의 세력팽창에 의해서 가락국의 후신으로 알려지고 있는 금관가야는 결국 멸망한다.

금관가야 마지막 왕인 구형왕은 신라에 나라를 양위한 뒤 낙동강을 건너

현재 행정지명인 경남 산청군 금서면 특리에 있는 왕산에서 은거하다 한많은 생을 이별한다.

 

전설에 따르면 구형왕은 "나라를 지키지 못했으니, 흙이 아닌 돌로 무덤을 쓰라"고 유언했다.

 521년 왕에 올라 532년 신라 법흥왕에게 영토를 넘겨줄 때까지

 11년간 왕으로 군림한 구형왕은 양왕이라고 불리며 돌무덤에 묻혀 있다.

구형왕과 왕비의 유물은 조선시대 1793년(정종 17년)에 왕산에 있는 사찰인 왕산사 나무상자에서 발견됐다. 

 

이후 구형왕의 후손인 김해김씨 문중은

석총 옆에 수호와 재실을 겸한 덕양전(德​讓殿)을 세우고

 매년 봄(음력 3월16일)과 가을(음역 9월16일)에는 구형왕(양왕)을 추모하는 향례(饗禮)가 치러져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