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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馬처럼 걷는 부산+경남 여행

(산청) 사적 제305호 : 덕천서원(德川書院)과 세심정(洗心亭)

 

 

 사적 제305호 : 덕천서원(德川書院)과 세심정(洗心亭)

 

 

 

 

 덕천서원은 산천재에서 약 1.6km 떨어져 있는데,

산천재는

지리산 천왕봉이 올려다 보이는 곳에 남명 조식(1501~1572) 선생이 직접 지어 제자들을 양성했던 곳이나 

덕천서원(德川書院)

선생이 돌아가신 4년 뒤(1576년)에 선생을 기리기 위해 선생의 제자들이 설립한 서원이다.

 

서원 출입구는 문이 세 개인 ‘삼문(三門)’이다.

반드시 ‘동입서출(東入西出·오른쪽으로 들어가 왼쪽으로 나온다)’ 해야 한다. 중간은 신(神)만 드나든다.

서원 정면에는

남명의 사상을 가르치던 ‘경의당(敬義堂)’, 좌우에는 유생들의 기숙사인 동재(進德齋)와 서재(修業齋)가 있고,

강학당 뒤에는 선생의 사당인 숭덕사(崇德祠)가 있다.

 

서원 앞에는 수백 년은 됐을 커다란 은행나무 한 그루가 서 있고,

덕천강가에는 세심정(洗心亭)이라는 작은 정자가 있는데, 

생전에 선생이 가끔 쉬셨던 장소에 제자들이 덕천서원을 세울 때 같이 세운 정자다.

 

1609년 조정에서 선생에게 영의정을 추증하고 사액 되자 크게 확장하여

옥산. 도산서원과 더불어 삼산서원으로 불리웠으며,

정조 때 명제상인 채제공이 원장을 지냈고, 최근엔 조순 전부총리가 원장에 취임했다.

 

대원군 때(1865) 훼철되는 비운을 겪었으나

1926년 복원하여 근래 선생의 선비정신과 교육사상이 새로 평가되어

산천재 등과 더불어 국가문화재 사적 305호로 지정되었다.

 

 

 

 

 

 

시정문(時靜門)

 

 

경의당(敬義堂)

 

덕천서원 강당 명칭인 ‘경의당(敬義堂)’은 남명 조식의 이 같은 가르침을 잘 대변하고 있다.

선생은 경의지학(敬義之學)을 바탕으로, 진정한 선비정신을 철저하게 실천한 인물이다.

 

 ‘경(敬)’은 성인이 되는 수양 방법으로,

항상 깨어있는 정신으로 매사에 거짓이 없고 도리에 어긋남이 없이 행동을 삼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의(義)’는 올바른 것을 실천하며 옳지 않은 것을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이라 할 수 있다.

 

덕천서원 현판

 모정(慕亭) 배대유(裵大維)가 썼고

경의당 현판

 약헌(約軒) 하용제(河龍濟)가 썼다.

 

 

수업재(修業齋) 서재

현판은 고봉(古蓬) 최승락(河龍濟)이 썼다

 

 

 

 

진덕재(進德齋) 동재

현판은 고봉(古蓬) 최승락(河龍濟)이 썼다

 

 

 

 

전사청(典祀廳)

 

 

석류꽃

 

 

 


사당인 숭덕사(崇德祠)

 

 

 


덕천강

 지리산 천왕봉 아래 중산리에서 모여 덕천서원 앞을 지나 진양호에 닿는다.

 

세심정(洗心亭)

덕천강가에 세워진 세심정은

덕천서원의 유생들이 휴식을 하던 장소로 주역의 성인세심(聖人洗心)에서 유래되었다.

 

 

 

 

세심정 옆 큰 바위에 음각된 선생의 시 : 浴川(욕천)

 

浴川(욕천) : 냇물에 몸 씻으며

全身四十年前累(전신사십년전루)온몸에 쌓인 사 십년 간의 허물
千斛淸淵洗盡休(천곡청연세진휴)천 섬 맑은 물에 모두 씻어 버리네
塵土倘能生五內(진토당능생오내)만약 티끌이 오장에 생긴다면
直今刳腹付歸流(직금고복부귀류)바로 배를 갈라 흐르는 물에 뿌리리



남명학의 요체는

內明者敬 내명자경 - 안으로 마음을 밝고 올바르게 하는 것이 (경)이고

外斷者義 외단자의 - 밖으로 밝고 올바름을 실천 단행하는 것이 (의)다 


을사사화- 1545년 (명종 즉위년) 직후

문정왕후와 그 외척인 윤원형(尹元衡)일가가 세도를 부리며 전횡을 일삼던 시절이었고

뜻있는 선비들은 낙향하여 실의를 달래던 때였다.

 

선생은 단성(산청)현감 고지를 받은 한 달 후 상소를 올린다.

남명이 1555년 단성(산청)현감 자리를 거부하며

어린 명종 임금에게 올린 단성소(丹城疏)는 강직한 기상을 볼 수 있는 선비문화의 상징이다

 

남명은 단성소에서

“나라의 근본은 없어졌고 하늘의 뜻도 민심도 떠나버렸다.

(중략)

오장육부가 썩어 배가 아픈 것처럼

온 나라의 형세가 안으로 곪을 대로 곪았는데도 누구 한 사람 책임지려고 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남명 조식 선생은

‘경(敬)’과 ‘의(義)’를 학문의 중심으로 삼았다.

마음을 밝고 올바르게 하는 것이 경이고,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 의다.

청렴은 성리학의 핵심 행위 규범인데 이를 몸소 실천한 분이 바로 남명선생이었다.

 

오늘날

국회의원들과 위정자들이 한번쯤 남명선생의 가르침을 교육 받을 이유가 있다.

오죽하면

우리나라 국회의원들이 국민에게 스트레스를 가장 많이 주는 집단이라며 우리나라를 떠나라고 할까?

 

남명은 항상 칼(경의검·敬義劍)과 방울(성성자·惺惺子)을 차고 다니며,

 “사사로운 욕심이 내장에 티끌만큼만 쌓여도 칼로 배를 갈라 맑은 물에 씻겠다는 뜻에서 검을,

이같은 뜻을 늘 깨우치고자 방울을 차고 다녔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곽재우 등 남명의 제자 50여 명이 의병장이 된 것도 바로 남명의 실천 유학 덕분이다.

 

덕천서원을 떠나며 영련2(詠蓮2) 시 한수 놓는다.

 

 

영련2(詠蓮2)-조식(曺植)

연꽃을 노래하다-조식(曺植)

只愛芙蕖柳下風(지애부거유하풍) : 다만 연꽃에

유하혜의 풍위 있음 사랑스러워

援而還止于潢中(원이환지우황중) : 손으로 당겨

보아도 연못 속에 있어라.

應嫌孤竹方爲隘(응혐고죽방위애) : 고죽군의 편협

함이야 응당 싫어하겠지만

遠播淸香到老翁(원파청향도로옹) : 맑은 향기 멀리

퍼뜨려 늙은이에도 이르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