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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馬처럼 걷는 부산+경남 여행

(산청) 지리산 내원사(內院寺)와 마지막 빨치산 마을 내원리


지리산 내원사(內院寺)와 마지막 빨치산 마을 내원리

 

 

 

 

언제 : 2019년 6월 1일 토요일

어디 : 경상남도 산청군 삼장면 대포리 583



남명선생의 기념관과 산천재 그리고 덕천서원을 둘러보고

내일 함양 벽송사와 서암정사 등을 보려면 오늘밤 산청에서 머물려고 여유롭게 산청으로 가던 중

 내원사라는 팻말이 보이는데 내 의지완 상관없이

내원사로 향한다. 


지리산 천왕봉 아래

내월천과 상장천이 어우러진 다리 반야교를 건너면  

일주문도 천왕문도 없는데,

대웅전 옆에 삼층석탑이 우두커니 서 있고 비로전과 산신각 그리고 요사채가 전부인 

소담한 절 내원사가 있다.


그러나

이 조그만 내원사에 국보 제233-1호인 석남암사지 석조비로자나불좌상과



보물 제1113호 내원사 삼층석탑이 있다.

 

  

내원사 골짜기


 

내원사 반야교 

 

 

 

 

 

 

 

 

 

 

 

 

 

 

 

 

 

 

비로전 - 대웅전 - 산신각 외

 

 

 

 

산청 내원사 삼층석탑(山淸 內院寺 三層石塔)

보물 제1113호


2중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세운 신라시대 탑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신라 무열왕 때인 657년때 처음 세워졌으나 1950년대에 도굴꾼들에 의해 파괴되었다.

1961년에 내원사에서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 - 맨 위의 지붕돌이 많이 부셔 졌으며, 상륜부는 남아 있지 않다.


3층으로 된 지붕돌은 평평한 느낌이지만 모서리를 올려 경쾌함을 더하려 하였다.

4개의 주름 지붕돌과 전체적으로 길쭉해진 모습은 통일 신라의 늦은 시기인 것임을 짐작케 한다.

 

그러나 여러장의 돌을 짜 맞춘 기단은 이른 시기의 전통을 잇고 있는 것으로 통일신라시대 석탑의 변화를

살릴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 받고 있다.


삼층석탑은

깊은 산골에 있는데도 온몸이 상처투성이다.

깊게 패이고 깍이고 깨져나간 그곳에는 어설프게 보수한 흔적이 여실한데,
 1994년도에 문화재청의 지휘로 산청군에서 어설프게 보수를 했단다.

 

 

 

 

 

 

 

 

내원사 전경

 

 

 

 

비로전

지리산 중턱에 있던 석남암사지에 있다가 현재 내원사로 옮겨 놓은 돌로 만든 비로자나불상이다.

비바람에 의한 마멸 때문에 세부표현은 명확하지 않지만

당당하고 세련된 모습이다.

머리 위에 있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는 높고 큼직한 편이나 약간 파손되었으며,

둥근 얼굴은 부피감이 풍부하여 8세기 불상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상체는 건장한 모습으로 자연스러운 가슴, 허리의 굴곡, 어깨나 팔의 부피감 등에서 사실미를 잘 표현하고 있다.

전신을 감싸고 있는 옷은 얇아서 신체의 굴곡을 잘 드러내고 있으며,

옷주름 역시 촘촘하고 부드럽게 표현하여 8세기 불상의 옷주름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손모양은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 쥐고 있는 모습으로

이 불상이 비로자나불임을 알려주고 있다.

이 비로자나불상은

불상의 중대석에서 발견된 납석사리호의 명문을 통해 766년(혜공왕 2)에 법승(法勝)과 법연(法緣) 두 승려가

받들어 돌아가신 두온애랑(豆溫哀郞)의 원을 위해 석조비로자나불상을 조성하여 무구정광대다라니와 함께

석남암수 관음암에 봉안하였다는 기록을 가진 중요한 불상이다.


이 불상은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기년명(紀年銘)의 지권인(智拳印) 비로자나불상으로서 중요하며,

편년자료가 부족한 고대조각사 연구에도 절대적인 자료로 평가된다.

더불어 지권인을 한 여래형(如來形)의 비로자나불 형식이 766년에 정립되었다는 사실은

새로운 불교 사상과 새로운 불교사의 흐름을 반영한 것으로서 주목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비로자나불상은

동아시아를 통틀어 명문이 밝혀진 최초의 지권인 비로자나불상으로서

도상적․양식적으로 불교미술사 연구에 매우 귀중하고 획기적인 자료이다. 뿐만 아니라 이 불상을 통해

 8세기 중엽경에는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이 불상에도 납입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어,

우리나라 불상 복장의 시원적 형태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기도 하다.


이미 불상의 중대석에서 발견된 납석사리호가 국보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 국보 제233호로 지정되어 있는 만큼,

이를 봉안했던 석불은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국보  제233호 
명 칭 영태2년명납석제호(永泰二年銘蠟石製壺) 

부산광역시립박물관  소장

통일신라 때의 거무스름한 곱돌(납석)로 만들어진

 항아리로 총 높이 14.5㎝, 병 높이 12㎝, 아가리 지름 9㎝, 밑 지름 8㎝이다. 

이 항아리 표면에는 15행으로 돌아가며

비로자나불의 조성 기록과 함께 영태 2년<신라 혜공왕 2년(766)>이라는 기록이 남아있어,

신라 비로자나불 좌상의 제작 연대를 8세기로 끌어올리는 역할을 했다.


새겨진 글자는 크기가 일정하지 않고 불규칙하게 나열되어 있어 판독이 애매한 곳도 있으나,

죽은자의 혼령을 위로하고 중생을 구제하길 바라는 글로 되어 있다. 



 

 

 

  

 

 

 

 

 

 

 

 

 

 

 

 

 

 

 

 

 

 

 

 

 

 

 

 

 

 

 

 

 

조그만 절이지만,

국보와 보물을 모시고 있으니 그 무게는 듬직하다.


아직

시간 여유가 있어 내원사 반야교를 건너 

내원사 계곡 더 이상 길이 없는 동네 내원리를 찾아간다.


이런 것이 여행의 맛이다.


전혀 생각도 못했는데, 우연히 찾아가는 곳.

잘 포장된 지리산 속으로 구불구불 외길을 따라 올라가니 조그만 암자도 지나고 내원사계곡 야영장도 지나

외길 10여 분 올라가니 더는 갈 길이 없다.


깜짝 놀라고 몸이 움츠러든다.

이 내원리가 한국 전쟁도 끝난지 10년이 지난 1963년 11월 12일 입산 13년 만에 

최후의 여자 빨치산이 잡힌 마을이란다. 




 


더 갈 길이 없는 마지막 마을

최근에 포장했는지 정비가 잘된 외길을 따라 지리산 깊은 골 너덧채 뿐인 집을

기웃거려도 인적은 없고 야생 꽃들이 집을 지킨다.

 ▼  

내원리 안내원리마을 전경

 ▲  

내원리를 떠나며

 

내원사를 둘러보고 나오니 가슴 한편이 허전하다.

다행히

국보 제233-1호인 석남암사지 비로자나석불좌상을 보았다는 것으로 다행이다 여기며,

부족한 한 곳을 채우려고

무심히 내원리라는 마을을 찾아 들었다.

 

이곳이 빨치산과 관련 있음도 모르고,

지리산 반달곰이 나타나 가축을 잡아먹는다는 것도 모르고 길 끝까지 갔는데

뜻하지 않게 분단의 역사 현장이다.

 

이곳은

 빨치산 마지막 2인으로 남은  '이홍이, 정순덕'을 1963년 11월 12일 이홍이는 사살되고

 정순덕은 생포되며,  

빨치산 토벌 작전이 막 내린 곳으로

그 아지트는 이 마을에서 조금 더 올라가야 한다.

 

한 여자의 기구한 운명적 삶의 흔적이 배어있는 지리산 내원리 안내원리
찾는 이조차 없어
적막감이 긴장감으로 이어지는 곳.

한동안 이곳은 철저히 출입통제구역으로 아니 저주받은 땅으로 인식되어 민가조차 없었던 지역

지금은 철거되어 빈터만 남았단다.


 

지리산 마지막 빨치산이 체포된 곳 안내문


 



 


정순덕이 생포될 때 갖고 있던 소지품


분단시대와 이데올로기의 유령이 남긴 비극의 한 현장
지리산 최후의 2인부대, 망실공비, 여자 빨치산 - 정순덕의 고향마을이자 마지막까지 빨치산 활동을 하다가
동료 이홍희는 사살되고 정순덕은 총상을 입고 검거된 마을이다.


마지막 빨치산 정순덕

 1933년 6월 2일 경남 산청군 출생 16세에 50년 1월 같은 지역 성석근과 결혼했으나

 50년 한국전쟁 당시 빨치산으로 활동한 남편을 찾아내라는 토벌대의 고문에 못 이겨 결혼 7개월 만인

 51년 2월 남편을 찾아 산으로 들어갔다가

남편도 죽고 대부분의 빨치산이 사살되면서 63년 12월 입산 13년 만에 체포돼

 최후의 여자 빨치산으로 기록되었다. 

 

 체포 당시 다리를 절단당했지

비전향장기수의 길을 선택 23년간 옥고를 치루다 1985년 전향서에 도장을 찍고 85년 8월 출소했다.

출소 후

하층 노동자로 전전하다가 1995년경 서울 봉천동 낙성대 ‘만남의 집’에 기거하다가

1999년 3월에 뇌출혈로 수술을 받은 후 반신불수의 상태에 2004년 재차 마비가 와서

2004년 4월 1일 사망했다.


2000년 비전향 장기수 1차 송환때 북송을 원했지만,

 고향이 남한(경남 산청)이고, 전향서를 썼다는 이유로 송환 대상에서 제외됐다.

2004년 인천 길병원에서 뇌출혈로 사망.